1. 김제 처음에는 잡음인 줄 알았다. 새벽 3시

by마루

1. 김제

처음에는 잡음인 줄 알았다.


새벽 3시 17분.


김제평야는 아직 어두웠고, 송신소 철탑의 항공장애등만 일정한 간격으로 붉게 깜빡이고 있었다.


야간 근무자는 모니터 한쪽에 생긴 낯선 파형을 바라봤다.


짧았다.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단파에는 원래 잡음이 많다. 태양 활동과 전리층 상태에 따라 수신 환경이 변하고, 멀리 떨어진 송신 신호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잡히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반복이었다.


신호는 정확히 같은 간격으로 돌아왔다.


3시 17분 11초.


다시.


그리고 137초 뒤.


또다시.


그는 자동 저장을 걸었다.


파형은 이상할 만큼 깨끗했다.


강한 신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약해서 잡음 속에 묻힐 정도였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았다.


전리층 상태가 변해도 중심 주파수가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신호의 형태였다.


일반적인 음성도 아니었고 모르스 부호도 아니었다.


디지털 통신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변조 방식과도 달랐다.


그런데 분명히 반복되고 있었다.


반복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헤드폰을 썼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화이트 노이즈.


그뿐이었다.


그런데 분석 프로그램은 화면 아래에 계속 같은 문장을 띄웠다.


UNKNOWN MODULATION


그는 그날 아침 근무일지에 짧게 적었다.


03:17 미확인 단파 신호 수신.

137초 간격 반복.

원인 확인 필요.


그것이 전부였다.


그날까지는.


2. 박스


사람들은 나중에 그것을 ‘박스’라고 불렀다.


실제로 상자가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안테나가 받아낸 신호를 시간순으로 쌓아보니 데이터 안에 경계가 나타났다.


시작점이 있었고 끝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구조가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구원 한 명이 말했다.


“이거 박스 같은데요.”


그 이름이 그대로 굳었다.


김제 박스.


72시간 동안 수신된 데이터를 합치자 용량은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압축 파일도 아니었고 알려진 어떤 데이터 포맷도 아니었다.


암호처럼 보였지만 암호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암호라면 최소한 암호화되기 전 데이터의 흔적이나 구조가 어느 정도 드러나야 했다.


그런데 이것은 달랐다.


무작위처럼 보이는 숫자 사이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규칙이 나타났다.


연구원이 화면을 확대했다.


“소수잖아.”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니터 앞으로 모였다.


숫자는 계속됐다.


누군가 말했다.


“자연 잡음이 이럴 수 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3. 확인


데이터는 서울로 보내졌다.


며칠 뒤 정부 산하 연구기관과 대학 연구팀이 참여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외계인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오류를 찾는 것이었다.


장비 결함.


소프트웨어 오류.


인근 송신원의 간섭.


군 통신.


항공 통신.


위성.


불법 송신.


태양 활동.


전리층 이상.


가능한 원인을 하나씩 지웠다.


그 과정에 몇 주가 걸렸다.


그리고 이상한 사실 하나가 발견됐다.


김제에서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수신 시각을 역산해 세계 여러 지역의 전파 관측 자료를 대조하자 비슷한 시각, 비슷한 주파수 대역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흔적들이 발견됐다.


일본.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


신호의 세기는 달랐지만 내부 간격은 같았다.


137초.


자료는 더 이상 한 방송사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 공동 분석팀이 만들어졌다.


NASA와 여러 전파천문 연구기관에도 데이터가 전달됐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누구도 박스를 열지 못했다.


오히려 분석할수록 이상해졌다.


데이터에는 분명 규칙이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사용하는 정보 구조와 달랐다.


헤더가 없었다.


파일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도 없었다.


문자도 없었다.


영상도 없었다.


좌표도 없었다.


그런데 무작위는 아니었다.


한 연구자가 말했다.


“우리가 암호를 못 푸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가 화면을 가리켰다.


“우리가 이걸 파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4. 중간값


6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분석팀은 데이터를 여러 수학적 공간으로 변환해보고 있었다.


주파수.


시간.


위상.


편광.


푸리에 변환.


통계적 자기상관.


그날 한 연구원이 신호의 세기를 버리고 간격만 남겼다.


그리고 간격과 간격 사이의 비율을 계산했다.


모니터에 숫자 하나가 나타났다.


0.00729…


그는 처음에는 계산 오류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렸다.


같았다.


데이터의 다른 구간을 넣었다.


또 같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옆 연구원이 화면을 봤다.


“뭔데?”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역수를 취했다.


숫자가 바뀌었다.


137에 가까운 값.


방 안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세구조상수?”


빛과 전하를 띤 입자의 전자기적 상호작용과 관련된 무차원 상수.


단위를 바꿔도 사라지지 않는 숫자.


인간이 만든 미터도 아니고 초도 아니고 킬로그램도 아닌, 자연 그 자체의 관계에서 나오는 값.


그날 처음으로 연구진은 이 신호가 왜 숫자를 사용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서로 언어도 다르고,


문자도 다르고,


시간의 단위도 다르고,


길이의 기준도 다른 두 존재가 처음 만난다면,


무엇으로 말을 시작할 것인가.


영어도 아니다.


수학 기호도 아니다.


그것조차 인간이 만든 표기법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였다.


서로가 살고 있는 우주가 공유하는 법칙.


5. 열리지 않는 문


그 발견은 세상을 뒤집지 않았다.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137이라는 숫자가 나타난 것만으로 외계 문명의 신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우연일 수도 있었다.


인간이 규칙을 보고 싶어 하는 습성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연구는 계속됐다.


1년.


그리고 2년.


인공지능도 투입됐다.


당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모델들이 신호의 구조를 분석했다.


AI는 수십억 가지 변환을 시도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상한 결론을 냈다.


데이터 내부에 데이터가 존재한다.


그런데 읽을 수 없었다.


암호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데이터를 펼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없었다.


연구진은 그것을 열쇠라고 불렀다.


하지만 AI는 조금 다른 표현을 내놓았다.


KEY NOT REQUIRED.

CONDITION REQUIRED.


열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조건이 필요하다.


무슨 조건인지 아무도 몰랐다.


온도인지.


중력인지.


전자기장인지.


시간인지.


관측자의 위치인지.


혹은 아직 인간이 측정하지 못하는 무엇인지.


박스는 그렇게 닫혀 있었다.


6. 20와트


그해 겨울, 젊은 연구원 하나가 김제로 내려왔다.


처음 신호가 잡힌 장소를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김제평야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황색과 흰색 철탑들이 겨울 들판 위에 길게 서 있었다.


그는 철탑 아래에서 한참 하늘을 올려다봤다.


옆에 있던 송신소 직원이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거 보고 별소리를 다 합니다.”


“뭐라고 하는데요?”


“새 잡는 그물 아니냐고도 하고.”


연구원이 웃었다.


그러다 다시 철탑을 바라봤다.


전리층.


인간은 한때 그 보이지 않는 층을 이용해 지구 반대편으로 목소리를 보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보이저 1호가 떠올랐다.


20와트 남짓한 송신기.


그 작은 신호를 지구에서는 거대한 안테나로 듣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뒤집혔다.


왜 우리는 이것을 송신자의 힘으로만 생각했을까.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서울 연구실로 전화했다.


“박스 데이터 다시 열어봐요.”


“지금요?”


“신호 세기 말고 수신 조건을 봐요.”


“무슨 말이에요?”


그는 철탑 사이의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우리가 받은 게 메시지가 아닐 수도 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면 뭔데요?”


그가 말했다.


“주소일지도 몰라요.”


7. 거리


그날 밤부터 계산이 다시 시작됐다.


전리층 상태.


지구 자전.


태양의 위치.


달의 위치.


김제송신소의 좌표.


당시 태양계 행성들의 위치.


지구의 공전 속도.


은하 중심에 대한 태양계의 운동.


변수를 하나씩 넣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AI가 아주 이상한 상관관계 하나를 찾아냈다.


박스가 반복되는 137초의 간격은 정확히 일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시계에서는 일정하게 보였지만 소수점 아래 깊숙한 곳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지구의 운동과 맞물려 있었다.


연구진은 그것을 제거했다.


그러자 처음으로 박스의 내부 구조가 변했다.


모니터에 점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


수천 개의 점이 이어졌다.


누군가 숨을 삼켰다.


별자리가 아니었다.


은하 지도도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3차원 좌표로는 설명되지 않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점이 반복해서 같은 위치에 겹쳤다.


연구원이 말했다.


“거리 계산해봐.”


계산 결과가 나왔다.


약 1만 8천 광년.


그런데 박스 내부에서는 두 점 사이의 값이 계속 같았다.


0.


연구실에 있던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1만 8천 광년 떨어져 있는데,


데이터 안에서는 거리가 없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계산이 틀렸겠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AI가 마지막 분석 결과를 화면에 띄웠다.


DISTANCE IS NOT A VARIABLE.


거리는 변수가 아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처음 보는 문장이 하나 더 나타났다.


그 문장은 AI가 번역한 것이 아니었다.


박스 안에서 처음으로 직접 분리된 구조였다.


숫자도 아니었다.


영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컴퓨터가 그것을 똑같은 형태로 읽었다.


137 : 0 : 1


아무도 그 뜻을 몰랐다.


그날 새벽 3시 17분.


김제송신소의 안테나에 다시 신호가 들어왔다.


2년 만이었다.


이번에는 137초를 기다리지 않았다.


신호는 단 한 번 들어왔다.


그리고 사라졌다.


연구실의 모든 화면이 동시에 꺼졌다.


3초 뒤 다시 켜졌다.


김제에 있던 연구원이 창밖을 바라봤다.


철탑은 그대로였다.


들판도 그대로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서울 연구실에서 전화가 왔다.


상대방은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래요?”


수화기 너머에서 겨우 목소리가 들렸다.


“박스가 열렸어요.”


“뭐가 들어 있는데요?”


긴 침묵.


그리고 대답이 돌아왔다.


“사진입니다.”


“무슨 사진?”


“지구요.”


그는 피식 웃었다.


“지구 사진이 뭐가 이상해요?”


상대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파일 하나를 전송했다.


연구원은 휴대전화 화면을 열었다.


푸른 지구가 있었다.


구름이 있었고 한반도가 보였다.


김제평야도 있었다.


그리고 김제송신소의 주황색과 흰색 철탑들이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했다.


철탑 아래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자기 자신이었다.


휴대전화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사진 하단에는 숫자가 하나 기록되어 있었다.


촬영 시각이었다.


내일 오전 03:17:11.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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