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오르는 동안, 익어가는 것
5층.
팻말은 낡았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마다 이전 숫자들이 희미하게 겹쳐 보인다. 몇 번이나 새로 칠했을까. 계단실 벽은 그 세월을 다 받아 적은 듯 얼룩덜룩하다.
숨이 찬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다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리듬을 탄다. 이 오래된 주공아파트의 계단은 폭이 좁고 발판이 닳아 반질거린다. 손잡이 대신 벽을 짚고 오르던 사람들의 손자국이 거기, 눈에 보이지 않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왼쪽 벽에 붙은 계량기함. 색 바랜 경고 스티커. 누군가 붙여놓고 간 종이 한 장이 반쯤 떨어진 채 바람에 흔들린다. 설명은 없다. 그저 그렇게, 오래 거기 있었다는 사실만 남아 있다.
창.
오른편으로 열린 창 하나가 계단실의 유일한 숨구멍이다. 그 창을 통해 나뭇가지가 들어와 있다. 초록 잎사귀 사이, 아직 덜 익은 열매 몇 알이 매달려 있다. 노랗고 붉은 기운이 반반씩 섞인 껍질. 익어가는 중이다.
나는 오르는 중이고, 저것은 익어가는 중이다.
같은 시간, 다른 속도. 나의 숨은 가쁘고 저 열매의 시간은 느리다. 그러나 둘 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다. 5층은 아직 멀고, 열매는 아직 딱딱하다.
계단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앞서 걸어간 발자국들, 등에 멘 가방의 무게, 사각거리는 옷깃 소리만 남기고 지나간다. 빛은 창으로 들어와 벽의 절반만 물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늘에 남는다. 그 경계가 계단 한 칸마다 조금씩 움직인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 계단을 먼저 오른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오늘도 누군가는 이 창밖의 열매를 스치듯 보고, 잊고, 다시 오늘의 계단을 오를 것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 왜 오르는지, 언제 다 익는지. 그저 오르는 동안 창밖의 시간이 함께 흘러간다는 것.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 발걸음이 느려진다. 도착이 아니라, 도착 직전의 숨. 그 사이 어딘가에 오늘의 나는 머물러 있다.
열매는 아직, 다 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