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 본다
비 오는 날이었다.
희뿌연 흰색이 눈앞에 펼쳐지고, 뒤에는 숲이 서 있었다.
내 머릿속은 그 순간 '담장'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오래전에 보았던 호수를 꺼냈다.
안개가 천천히 물 위를 지나가던 아침.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던 수면.
말없이 풍경을 바라보던 사람의 뒷모습.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기억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사진을 보고도 같은 풍경을 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담장을 보고, 어떤 사람은 호수를 본다.
사진에는 담장이 있었을지 몰라도,
내 안에는 끝내 호수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