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다방이었다

다방

by마루

괴테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다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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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런 다방을 볼 수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담배 냄새가 있었다.

커피 냄새보다 담배 냄새가 먼저였고, 그 뒤에 오래 끓인 물 냄새와 눅눅한 의자 냄새가 따라왔다.

테이블 한쪽에는 알루미늄 보온병이 놓여 있었다.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지, 이미 식어버린 물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보온병이었다.


카운터 안에는 젊은 레지가 앉아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선풍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시원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의 무료함을 이쪽저쪽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다.


성냥갑은 늘 손 닿는 곳에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성냥을 그으면, 잠깐 불꽃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그 짧은 불빛 옆에 100원짜리 운세 기계가 있었다.


누군가 심심풀이로 동전을 넣었다.


다르륵.


손잡이를 돌리면 안에서 작은 종이 하나가 밀려 나왔다.

말려 있던 종이를 펴면 오늘의 운세가 적혀 있었다. 애정운, 재물운, 기다리던 소식, 조심해야 할 말.


대단한 말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맞을 수 있도록 적당히 흐리고, 누구에게나 빗나갈 수 있도록 적당히 애매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종이를 그냥 버리지 않았다. 한 번 읽고 웃다가, 다시 펼쳐 읽었다.

믿어서가 아니었다. 마음에 걸려서였다.


나는 그런 문장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스즈키 유이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나는 괴테보다 먼저 그 다방을 떠올렸다.


2001년생의 젊은 일본 작가가,

첫 장편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도 괴테라는 이름을 앞세운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멀게 느껴졌다.

괴테, 일본 문단, 아쿠타가와상. 그런 말들은 다방의 보온병이나 100원짜리 운세 기계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소설의 출발을 듣는 순간, 거리가 조금 좁혀졌다.


저명한 괴테 연구가 도이치가 홍차 티백에 달린 작은 꼬리표에서 괴테의 문장을 발견한다.

문제는 그 문장이다.

평생 괴테를 연구한 사람조차 본 적 없는 문장.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자기 학문과 삶을 건드리는 문장.


대단한 고서도 아니고, 강의실 칠판도 아니고, 누군가의 유언도 아니다.

식사 끝에 아무렇지 않게 따라온 홍차 티백의 꼬리표 하나. 그런데 그 가벼운 종이 위의 문장이 한 사람을 흔든다.


나는 거기서 멈췄다.


사람은 왜 작은 문장 하나에 붙들리는가.


괴테의 이름이 붙으면 문장은 갑자기 무거워진다. 홍차 티백에 인쇄된 한 줄도, 그 이름 때문에 다시 읽힌다.

반대로 다방의 100원짜리 운세는 가볍다. 아무도 그 문장을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기다리는 소식이 있는 사람은, “기다리던 소식이 늦어진다” 같은 문장 앞에서 한 번 더 멈춘다.


문장은 원래부터 깊었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사정에 닿는 순간 깊어진다.


내게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괴테에 관한 소설이라기보다, 문장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읽혔다.


젊은 작가는 위대한 작가의 이름을 가장 가벼운 종이 위에 올려놓았다.

괴테와 홍차 티백. 권위와 일상. 문학과 우연. 그 사이에서 소설은 묻는다.

우리는 문장의 진실을 믿는가, 아니면 그 문장 뒤에 붙은 이름을 믿는가.


나는 그 질문을 오래전 다방의 운세 기계 쪽으로 가져왔다.


100원짜리 운세에는 아무 권위가 없었다.

괴테도 없고, 학문도 없고, 상도 없었다. 그저 담배 냄새와 보온병과 선풍기 옆에 놓여 있던 작은 기계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거기서 나온 종이를 펼쳤다. 어쩌면 사람은 늘 자기 삶을 설명해줄 작은 문장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을 때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같은 노을 앞에서 누군가는 그냥 예쁘다고 하고, 누군가는 오래 말을 잃는다.

같은 골목 사진 앞에서 누군가는 낡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자기 어린 시절을 본다.


사진 안에 원래부터 답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보는 사람 안에 이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사진은 그것을 건드릴 뿐이다.


문장도 그렇다.


괴테의 문장도, 100원짜리 운세도, 홍차 티백의 꼬리표도 결국 사람 안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는 장치인지 모른다.


요즘 나는 AI 앞에서도 가끔 그 다방을 떠올린다.


AI에게 글을 묻는다. 첫 문장을 묻고, 제목을 묻고, 사진 옆에 놓을 말을 묻는다.

그러면 AI는 빠르게 대답한다.

문장은 매끈하고, 결론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걸 그대로 가져다 쓰면 이상하게 맛이 없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I는 많은 말을 알고 있지만, 내가 앉아 있던 다방의 냄새는 모른다.

보온병의 미지근함도 모르고, 선풍기가 무료함을 흔들던 오후도 모른다.

젊은 레지의 표정도 모르고, 성냥불이 켜졌다가 꺼지던 짧은 순간도 모른다.


그건 내가 가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AI가 준 문장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대신 오래된 운세 종이처럼 펼쳐본다.

이 말이 내 삶에 닿는가.

이 문장에 내가 본 것이 들어 있는가.

내 냄새가 빠져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 어떤 문장은 지운다.

어떤 문장은 반으로 자른다.

어떤 문장은 다시 다방으로 데려간다.


담배 냄새와 보온병과 선풍기 옆에 다시 앉혀본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조금 내 문장이 된다.


도이치가 홍차 티백 위에서 괴테를 발견했다면, 나는 100원짜리 운세 기계 앞에서 문장의 이상한 생명력을 배웠다.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은 가끔 아주 작은 문장 하나에 붙들린다. 그 문장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날의 내가 너무 쉽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일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남이 남긴 문장 하나에 잠깐 기대었다가,

다시 내 냄새가 나는 자리로 돌아오는 일.


다르륵.


그 소리와 함께 밀려 나오던 말린 종이 한 장.


내 글은 어쩌면 아직도 거기서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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