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순경

by마루

개구리

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제천 시내의 가로등 불빛은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길게 번져 있었고, 스튜디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 누군가 오래된 이야기를 두드리는 손가락 같았다.


돌잔치 사진을 현상하고, 결혼식 스냅을 정리하고, 마지막 파일 저장 버튼을 누른 뒤 컴퓨터 모니터를 껐다.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방 안에는 외장하드 돌아가는 미세한 진동음과 빗소리만 남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석종이었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오래된 친구는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술이 들어갔는지.


화가 났는지.


아픈지.


오늘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거웠다.


낡은 돌덩이 하나가 수화기 너머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야."


"왜."


"소주 한잔하자."


"갑자기?"


"그냥 와."


"무슨 일 있는데?"


잠시 침묵.


그리고 짧게.


"와."


그 한마디에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서서갈비집 문을 열자 뜨거운 숯불 냄새가 훅 밀려왔다.


고기 굽는 소리.


소주잔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 웃음소리.


그 속에 석종이는 혼자 앉아 있었다.


이미 소주병 하나가 비어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씩 웃는 척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나는 단번에 알았다.


오늘은 학교 다닐 때 이야기하는 날이 아니다.


오락실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경찰 아버지 몰래 수갑 차고 놀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부른 얼굴이 아니었다.


소주가 몇 순배 돌고 나서야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야."


"응."


"사람 살려본 적 있냐?"


나는 웃었다.


"사진사는 사람 안 살린다."


"그래..."


석종이는 잔을 비웠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나는 살려봤어."


그 말은 이상하게도 자랑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백 같았다.


죄를 털어놓는 사람처럼.


충원파출소.


그때 나는 순경이었다.


비 오는 날이었다.


오늘처럼.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사람도 없고 사고도 없고.


파출소 처마 밑에서 담배나 피우고 있었지.


그때 전화가 왔어.


다리 위에 여자가 있다고.


난간에 매달려 있다고.


순찰차를 몰고 달려갔단다.


와이퍼가 정신없이 움직였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고가 다리 위에는 택시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어.


"저기요."


"어디요?"


"저기..."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보였다.


흰색.


비 속에 서 있는 흰색.


그게 처음엔 사람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마치 젖은 종이인형 하나가 난간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고.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를 맞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있었다.


손 하나만 놓으면 끝날 위치.


석종이는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했다.


살려야 한다.


그런 생각보다.


무섭게 하면 안 된다.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그래서 웃었다.


억지로.


"아이고."


"비 오는데 거기서 뭐 해요."


"내려와요."


"나도 춥다니까."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만 내렸다.


빗방울이 난간을 두드렸다.


강물은 까맣게 출렁였다.


세상에 소리가 이렇게 많을 수 있는데.


그 둘 사이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30분.


40분.


시간 감각도 사라졌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거리가 좁혀졌다.


석종이는 말했다.


그때부터는 경찰이 아니었다고.


그냥 사람 하나 붙잡으려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마지막 순간.


라이터를 꺼냈다.


젖은 라이터였다.


틱.


불이 안 붙었다.


틱.


또 안 붙었다.


틱.


또.


또.


"나 담배 피워야 되는데."


"좀 도와줘요."


"응?"


그녀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향했다.


아주 잠깐.


정말 잠깐.


석종이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탁.


손목을 잡았다.


"야."


석종이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 촉감이 아직도 안 잊혀."


나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얼음장 같았어."


"진짜."


"죽은 사람 잡는 느낌이었어."


잠시 침묵.


그리고.


"근데..."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


"안쪽은 따뜻했어."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안쪽은 따뜻했다.


피부는 차가웠다.


비를 맞았으니까.


밤바람을 맞았으니까.


세상에 지쳤으니까.


그런데 그 안쪽에는.


아직 살아 있으려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주 작게.


촛불 하나만큼.


그 온기를 느낀 순간.


석종이는 안도했다고 했다.


살았다고.


이 사람 살았다고.


이제 괜찮다고.


하지만 사람의 운명은 경찰도 못 막는다.


한 달 뒤.


같은 비.


같은 다리.


같은 신고.


그리고 일주일 뒤.


떠오른 사체.


석종이는 말을 멈췄다.


갈비집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실제로는 여전히 시끄러웠는데.


우리 둘 사이만 조용했다.


"알아?"


녀석이 말했다.


"그때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도 그 온도를 기억한다는 거야."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얼굴을 잊는다.


이름을 잊는다.


목소리를 잊는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몸에 남는다.


손바닥에.


뼈에.


신경에.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석종이는 마지막 소주를 비웠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군가를 완전히 구할 수 있을까.


그날 석종이는 분명 그 여자를 살려냈다.


하지만 결국 구하지는 못했다.


살리는 것과 구하는 것은 어쩌면 다른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는 지금도 누군가의 손목을 붙잡고 있을 것이다.


차가운 피부 아래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온기를 믿으면서.

작가의 이전글"그때는 TV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