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경주 원효로 골목, 두 알의 풋콩처럼 나란히 이어온 남매의 물회 이야기
경주역에서 조금 떨어진 원효로 골목.
붉은 벽돌집들이 나란히 등을 기대고 서 있다.
햇빛은 담벼락에 걸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오래된 자전거 한 대가 골목을 지키고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선들이 하늘을 가득 가른다.
마치 누군가의 삶이 얽히고설킨 시간처럼.
골목 한편에는 녹이 슨 푸른 대문이 있다.
세월이 벗겨낸 파란색 사이로 붉은 녹이 피어올랐다.
그 대문 한가운데 남겨진 글자.
囍.
기쁠 희.
누군가의 결혼식이 있었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지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골목은 시간을 품는다.
그리고 조금 더 걷는다.
벽에는 오래전 간이역을 그리워하는 그림이 남아 있다.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추억이 남고,
기차가 떠난 자리에는 이야기가 남는다.
그 골목 끝에서 다시 파란색을 만난다.
이번에는 녹슨 대문이 아니다.
남매물회의 푸른 간판이다.
신기하게도 골목에서 보았던 색과 닮아 있다.
붉은 벽돌이 시간을 말하고,
푸른 대문이 추억을 말했다면,
남매물회의 파란 간판은 지금을 이야기한다.
벽 한쪽에는 녹이 슨 파란 대문이 남아 있다.
세월이 벗겨낸 푸른색.
어쩌면 남매물회 사장님도 어릴 적 이런 골목에서 놀지 않았을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골목을 채우던 시절.
파란 대문은 바뀌어도
그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골목 끝에서 다시 파란색을 만난다.
남매물회의 푸른 간판이다.
25년 동안 구룡포에서 이어온 부모님의 손맛을
남매가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집 메뉴 이름도 누나물회,
동생물회다.
음식 이름조차 가족 이야기다.
붉은 육수 위에 참가자미 회가 수북하게 올라가고,
아삭한 채소가 한가득 담긴다.
한 숟갈 먹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난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자란 골목을 닮는다고.
붉은 벽돌도,
녹슨 파란 대문도,
남매가 지키는 물회 한 그릇도.
모두 같은 시간을 지나온 풍경처럼 보였다.
경주에서 물회를 먹었는데,
이상하게 골목이 먼저 기억에 남았다.
숟가락으로 육수를 먼저 떠봤다.
차갑다.
그런데 단순히 시원한 맛이 아니다.
살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새콤함이 먼저 들어오고,
뒤늦게 은은한 단맛이 따라온다.
그 위에 얇게 썬 참가자미를 올려 먹으면
쫄깃한 식감이 한 번 더 씹히며 바다 향이 올라온다.
자극적이라기보다 계속 숟가락이 가는 맛.
몇 번 먹다 보면 어느새 육수부터 먼저 떠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숟가락을 들어 올리니 참가자미 한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얇게 썰린 회는 부드럽게 휘어지고,
그 아래로 소면과 채소가 함께 따라 올라온다.
입에 넣는 순간 새콤한 육수가 먼저 닿는다.
뒤이어 참가자미의 쫄깃함이 씹히고,
오이와 채소의 아삭함이 한 번 더 입안을 정리한다.
회를 먹는 것 같기도 하고,
국수를 먹는 것 같기도 하다.
물회 한 그릇 안에 회와 면과 채소가 함께 들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한 숟갈은 시원하고,
다음 한 숟갈은 개운하다.
그래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 숟가락이 간다.
물회를 거의 다 비웠을 무렵이었다.
접시에 담긴 풋콩을 하나 집어 들었다.
껍질을 열자 초록빛 콩알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문득 남매물회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누나와 동생.
붉은 벽돌 골목을 지나,
녹슨 파란 대문을 지나,
파란 간판 아래에서 만난 물회 한 그릇.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초록 콩 두 알.
따로인 듯 닮아 있고,
닮은 듯 다른 두 알.
25년 동안 이어온 부모님의 손맛도,
지금은 그렇게 남매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주 원효로 골목을 걸으며 만난 것은 물회만이 아니었다.
한 골목의 시간과,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함께 먹고 온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