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화단에는 상사화가 많이 심어져 있다. 그저 신기한 꽃이다. 봄이 오면 다른 꽃들처럼 잎부터 올라온다. 싱그러운 초록빛 잎은 한동안 화단을 채우지만, 정작 꽃은 피우지 않는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잎은 서서히 누렇게 변하면서 말라버린다. 꽃 한 송이 피워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데 여름이 깊어질 무렵이면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꽃대 하나가 불쑥 솟아오른다. 잎 하나 달리지 않은 채 곧고 깨끗한 줄기가 하늘을 향해 자라난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 모습은 마치 오랫동안 자신을 다듬어 온 사람처럼 단정하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끝에서 연분홍 꽃이 활짝 피어난다. 언제 저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품고 있었을까 싶을 만큼 곱다.
잎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는데 꽃은 이제야 피어난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 또한 잎을 만나지 못한 채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꽃을 상사화라 불렀다. 이름 하나에도 오랜 세월 사람들의 상상력과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몇 년 전, 아내가 대전에서 손주들을 돌보다가 시골로 내려와 나와 함께 살게 되었다. 꽃을 좋아하는 아내는 이것저것 새로운 꽃을 많이 사 왔다. 어느 날은 내게 상사화를 닮은 꽃이 있다며 구근 한 봉지를 내놓았다. 이름은 꽃무릇이라고 했다.
우리는 화단 한쪽을 할애하여 꽃무릇 구근을 정성들여 심었다. 꽃무릇은 추운 겨울에도 푸르름을 유지하면서 잘 자라났다. 그런데 날씨가 따뜻해지자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잎이 이내 누렇게 시들어 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상사화와 꼭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꽃 한 번 피우지 못하고 잎이 시들어 버리는 모습이 똑같았다.
한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꽃무릇 차례다. 나는 꽃이 피기 전에 화단부터 정리한다. 주변의 잡초를 뽑아내는 일이다. 꽃대가 올라오는 길을 막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고, 어렵게 피어날 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땀을 흘리며 잡초를 정리하다 보면, 마치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마당을 쓸고 닦는 기분이 든다.
상사화가 진 지 스무 날 남짓 지나자 꽃무릇의 꽃대가 솟아오른다. 꽃무릇을 심은 화단에서 상사화처럼 잎은 하나도 없는데 꽃대만 쑥 올라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끝에는 선홍빛 꽃이 터져 나온다. 상사화가 연분홍의 단아함이라면 꽃무릇은 붉은 불꽃 같은 열정이다. 색은 달라도 둘 다 잎 하나 없는 맨몸으로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오래 바라보는 것은 꽃보다도 꽃대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말쑥하게 솟아오르는 그 줄기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맑아진다. 어떻게 저렇게 깨끗할 수 있을까. 잎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땅속에서는 무슨 시간이 흘렀을까.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품고 있었기에 저토록 단정한 모습으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식물학적으로는 구근 속에 영양분을 저장해 두었다가 꽃을 피워낸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보다 다른 생각에 더 오래 머문다.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자기 안에 좋은 것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기에 마침내 저런 꽃대를 세우고 저런 꽃을 피워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평소 품는 생각과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선한 마음도, 따뜻한 기억도, 감동했던 순간도 모두 마음속 어딘가에 저장된다. 당장은 드러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들은 말과 표정이 되고 행동이 되어 밖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미움과 원망, 욕심과 분노도 오래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얼굴과 삶을 통해 드러나고 만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저장해 온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상사화와 꽃무릇이 꽃을 피우기 위해 긴 시간을 땅속에서 준비하듯,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무엇을 마음에 담아 두느냐에 따라 언젠가 삶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런 생각을 한다. 젊은 날에는 무엇을 이루느냐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무엇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다.
지금 가을 초입, 선선한 기운이 퍼지면서 꽃무릇이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다. 잎 하나 없이 말쑥하게 솟아오른 꽃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오래 머문다.
보이지 않는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꽃은 하루아침에 피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마음에 무엇을 담아 왔는지는 언젠가 반드시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으로 피어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