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를 사랑하되, 그 사랑은 ‘정신’이어야 하리

by정용우

지난 일요일, 일흔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딸과 아들이 정성껏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구례에서 여름휴가를 마친 딸아이 가족이 진주에 있는 아들 집으로 합류하면서 모처럼 자식들과 손주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아들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손주들이 우르르 현관으로 몰려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가움은 온통 할머니에게로 쏠렸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품에 덥석 안기며 격하게 반가움을 표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고개만 슬쩍 끄덕일 뿐이었다. 특히 유치원생인 막내 손자는 할머니 품에 안겨 헤어날 줄을 몰랐다. 아내가 “할아버지한테도 가서 한번 안겨 봐라” 하고 부추겼지만, 아이는 할머니 눈치만 살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가 다가가 “우리 장손, 할아버지가 한 번 안아 보자” 하며 손을 내밀었으나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겨우 안기는 시늉만 하더니 이내 다시 할머니 품으로 도망치듯 달아나 버렸다.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아이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할머니는 늘 자주 같이 놀아주고, 맛있는 것을 챙겨주며, 씻겨주고 입혀주는 존재다. 게다가 아이들의 조잘거림에 일일이 장단을 맞춰주니 대화도 잘 통한다. 반면 나는 자주 만나지도 못할뿐더러, 아이들과 가까워지는 데 작은 한계도 안고 있다. 귀가 어두워 아이들이 소곤거리는 입모양과 가느다란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대화가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니 아이들의 미지근한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저 내가 어쩔 수 없는 짝사랑에 홀로 취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짝사랑이라 해서 가벼이 여길 것은 아니다. 짝사랑 역시 삶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한 형태가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짝사랑이야말로 내면의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진정한 사랑을 연습하는 중요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대답 없는 벽 앞에 선 듯 아쉽고 서운한 감정이 밀려드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솔직한 심사다. 나의 손주 사랑이 딱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이 아쉬움과 서운함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감정에 휘둘려 섭섭함에 사로잡히는 사랑은 순간의 기분에 좌우되는 ‘감정’의 사랑일 뿐이다. 그런 사랑은 나 자신을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은연중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손주 사랑은, 비록 시작은 서글픈 짝사랑일지라도 마침내 ‘정신’으로 다듬어진 사랑이어야 한다.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마음이 끌려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사랑이라면, 정신으로서의 사랑은 내 마음의 상태나 신체적 제약과 상관없이 오직 상대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바카라임과 결단’이다. 진짜 깊고 단단한 사랑은 이처럼 흔들리지 않는 정신이 되어 일상에서 증명되는 법이다.


조부모가 어린 손주를 돌볼 때 보여주는 ‘정신’으로서의 사랑은 체력적 한계와 밀려오는 피로, 순간적인 짜증을 누르고 아이의 세계를 온전히 받아주는 인내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손주를 돌보는 일은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한 고된 노동이다. 그저 귀엽고 예쁘다는 감정만으로는 그 고단한 시간을 견뎌낼 수 없다. 내 몸의 통증과 피로를 이겨내고,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해 끝까지 다정한 눈빛을 잃지 않으며 손을 잡아주는 조부모의 묵묵한 행동, 그것이 바로 ‘정신’이 이끄는 사랑의 실체다.


생일 파티의 마지막 순서로 식탁 위에 케이크를 놓고 축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되었다. 온 가족이 식탁 둘레로 모여섰다. 키 큰 어른들은 뒤에 서고 아이들이 앞에 섰다. 오늘의 주인공인 나는 의자에 앉아 막내 손주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키가 제일 작은 막내 손자가 키 큰 누나나 형과 어깨를 맞대고 촛불을 함께 불어 끌 수 있도록 받쳐주기 위해서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인사조차 어설프게 하며 달아나던 손주가, 이번에는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리고 “하나, 둘, 셋” 소리에 맞춰 촛불을 힘차게 불어 끄는 일에 열정적으로 동참했다. 아까의 서운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이의 작은 온기가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순간, 나는 이 어린 손자를 품에 안은 채 마음속으로 하나의 생각을 깊이 가다듬었다. 나는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사랑에 대해 말하고 행동하기를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순간의 감정에 흔들리는 사랑이 아닌, 바카라임과 인내로 단단해진 ‘정신’으로서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더라도 아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그것이 내가 일흔셋의 나이에 다시 배우는 사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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