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앞에서 배운 삶의 지혜

by정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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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초입인데도 후덥지근하다. 아직 아침인지라 에어컨 대신 창문을 활짝 연다. 그러자 붉은 배롱나무 꽃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올해 배롱나무 꽃은 유난히도 붉고 아름답다. 꽃잎이 바람을 따라 하나둘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지금이 절정인 듯하다.


이 배롱나무 꽃을 바라보다 보니 지난해 아내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해마다 우리 부부에게 붉은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던 배롱나무가 2~3년 전부터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가지 끝에 꽃봉오리는 맺혔지만 꽃은 피는 둥 마는 둥 했고, 예년의 화려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령이 25년을 넘기면서 나무도 노쇠해진 걸까. 나와 아내는 고민 끝에,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무가 화단만 차지할 뿐 아니라 관리도 까다로우니 이제는 베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성경에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도 주인은 나무를 당장 베지 않고 한 해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지 않느냐고. 우리도 한 해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올해 여름, 우리 배롱나무는 어느 해보다도 붉고 탐스러운 꽃을 피워냈다.


올여름 피어난 배롱나무 꽃은 기다림이 맺어 준 결실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관계도, 삶의 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람은 종종 눈앞의 실망 앞에서 성급히 결정을 내리곤 한다. 변화가 더딘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 쉽게 좌절한다. 그러나 자연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해를 더 기다려 본 인내가 이렇게 붉고도 아름다운 꽃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라고. 그리고 배롱나무가 간직하고 있던 잠재력처럼, 인간의 존재 또한 끊임없는 가능성 위에 놓여 있지 않은가.


서양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존재를 '불안 속에 놓인 가능성'이라 했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성장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한 번의 실패나 실망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태도는 인간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이다. 때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내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지 모른다. 씨앗이 흙 속에서 조용히 싹을 틔우듯, 인간의 가능성 역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동양의 사상에서도 기다림은 깊은 통찰의 주제다. 『논어』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급히 하려고 하지 마라. 작은 이익을 보려 하지 마라. 급히 하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단지 느긋함을 권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 삶의 리듬을 이해하라는 가르침이다. 오늘날처럼 빠른 결과를 요구하는 슬롯에서 우리는 점점 기다림의 미덕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위대한 변화는 언제나 더디게 다가오는 법이다.


삶에서의 기다림은 단지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며 수동적으로 머무는 일이 아니다. 진정한 기다림은 준비하는 시간이며, 관계를 되새기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이다. 내가 타인에게 기대하는 바를 돌아보고, 그 사람이 다시 피어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용기를 기르는 시간이다. 사랑도, 우정도, 인간적인 성장도 이러한 기다림 속에서 비로소 깊어진다.


기다림은 결국 믿음과 연결된다. 언젠가 꽃이 피리라는 믿음,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나 자신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신뢰이며 관계에 대한 바카라임이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삶을 더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다. 성급함은 인간을 얕게 만들지만, 기다림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사람은 누군가가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쉽게 등을 돌리곤 한다. 그러나 그 순간 한 번쯤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기대는 과연 정당했는가. 나는 그에게 충분한 시간과 이해를 주었는가. 그리고 끝까지 기다릴 용기가 내게 있었는가.


우리는 종종 시간을 흘려보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흘러간 것은 시간이 아니라 조급했던 우리의 마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기다림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자신을 익혀 가는 과정이다. 사람도 나무도 그렇게 자신의 계절을 준비한다.


여름 아침, 붉은 꽃을 아낌없이 피워 올린 우리 집 배롱나무는 오늘도 말없이 내게 가르쳐 준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서둘러 피어나는 꽃이 아니라, 기다림 끝에 피어나는 꽃이라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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