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엔드리스 섬머)을 바라보며

by정용우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 세월 도시에서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수록 흙을 밟고 나무와 꽃을 가까이하는 삶이 그리워졌다. 먼저 내려와 집을 손보고 마당을 가꾸기 시작했다. 몇 년 뒤 손주들을 돌보던 아내도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우리 집 정원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꽃을 좋아하는 아내의 손길이 더해지면서 계절마다 새로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정원은 단순히 꽃과 나무를 심은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삶을 함께 만들어 온 시간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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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꽃 사랑은 내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디선가 새로운 꽃모종이나 씨앗을 구해 온다. 나 역시 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즐겁고, 좋은 나무를 보면 심고 싶은 마음도 있다. 다만 우리 집 땅은 한정되어 있다. 이미 심을 자리는 거의 차 있는데 새로운 꽃은 계속 들어온다. 그래서 가끔은 아내에게 “이제는 그만 사 와도 되겠다. 심을 데가 없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꽃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좋은 꽃을 알아보는 아내의 안목은 인정하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 더 많은 꽃을 품고 싶은 마음과 현실 사이에서 생기는 작은 실랑이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새로운 꽃을 사 올 때면 내 눈치를 조금 보는 편이다.


몇 년 전에도 아내는 수국 한 그루를 사 왔다.

“조금 비싸지만 좋은 품종이래.”

그때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수국은 흔히 볼 수 있는 꽃이고, 그저 아내가 좋아하는 꽃 하나가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여름, 그 꽃이 내 눈길을 붙잡았다. 다른 꽃들은 계절을 따라 하나둘 자취를 감추는데, 그 수국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피어 있었고, 또 새로운 꽃송이가 올라왔다. 궁금한 마음에 아내에게 물었다.


“이 꽃 이름이 뭐지?”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엔드리스 섬머.”

끝없는 여름이라는 뜻이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웃음이 났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꽃의 모습을 이보다 잘 표현한 이름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몇 년 전 아내가 했던 말이 새롭게 들렸다. “조금 비싸지만 좋은 품종이래.” 그때는 ‘비싸다’는 말만 기억했는데, 이제는 ‘좋은 품종’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꽃은 처음 살 때의 가격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보낸 시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꽃값은 그날 한 번 치렀지만, 그 꽃은 해마다 꽃으로 값을 돌려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수국 한 그루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는 우리의 생활과 추억이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 엔드리스 섬머는 내게 단순한 수국 한 그루가 아니다. 몇 년 전 아내가 심어 놓은 작은 꽃이 우리 정원의 한 계절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꽃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뿐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조금씩 달라졌다. 젊은 날에는 빨리 피고 크게 드러나는 것에 마음을 두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오래 견디며 자신의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어쩌면 꽃도 사람도 가장 깊은 아름다움은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오래 함께한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인지 모른다.


돌이켜 보면 정원을 가꾸며 살아온 시간은 꽃을 키운 시간이면서 동시에 삶을 다시 배운 시간이었다. 젊은 날에는 눈에 보이는 성취와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래 곁에 머물러 주는 것들의 가치가 더 크게 다가온다. 한 그루의 나무도 그렇고, 한 포기의 꽃도 그렇고, 함께 살아온 사람도 그렇다. 처음에는 평범해 보였던 것이 시간이 흐른 뒤 가장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아내가 골라 온 수국 한 그루가 오늘 내 마음속 특별한 꽃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내년에도 아내는 새로운 꽃을 찾아올 것이다. 나는 아마 또 “이제 심을 자리가 없는데 또 샀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정원에 심는 것은 꽃만이 아니라 함께 보낼 시간이라는 것을. 몇 년 전 아내가 골라 온 작은 수국 한 그루가 오늘 내게 가르쳐 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엔드리스 섬머를 바라보며 나는 꽃보다 먼저 세월을 보고, 꽃을 심은 사람의 마음을 본다. 그리고 그 곁에 오래 함께해 온 한 사람에게 다시 고마움을 느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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