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찰 화엄사에서 느끼다

by정용우

서울에서 먼 길을 내려온 대학 동창들과 함께하는 남도 여행이 어느덧 이틀째를 맞이했다. 오늘의 여정은 지리산 자락이 깊게 품어 안은 하동과 구례의 고찰들을 차례로 거니는 길이다. 아침 일찍 하동 쌍계사의 맑은 계곡 소리와 푸른 차밭의 싱그러움을 뒤로하고 구례로 향하는 길목에서, 친구들의 기대는 온통 화엄사에 쏠려 있었다.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유서 깊은 고찰이건만, 서울이라는 거대한 빌딩 숲에서 평생을 보낸 친구들은 아직 화엄사의 일주문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 땅의 남쪽이 고향인 나로서는 젊은 날의 고뇌와 환희가 있을 때마다 숱하게 드나들었던 친숙한 도량이었기에,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안내하는 발걸음에는 은근한 설렘과 노년의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은빛 물결을 보며, 나는 친구들에게 내가 기억하는 화엄사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몇 번이고 정답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화엄사 경내에 들어선 순간, 내 기억 속의 풍경은 낯선 현실 앞에서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재회였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엄사 역시 그 흐름을 피하지 못하고 거대한 변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옛날, 우리가 젊었던 시절, 이곳을 찾았을 때 느꼈던 그 특유의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매끄럽고 번듯하게 잘 닦인 현대화의 흔적들뿐이었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유독 불편하게 만든 것은 새롭게 들어선 수많은 전각들이었다. 템플스테이를 위해 새로 지은 시설들과 승가대학 운영을 위해 세워진 웅장한 건물들이 경내의 빈자리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전통적인 사찰 양식을 본떠 기와를 얹고 단청을 칠했으니 겉모습은 분명 옛 건물 형상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흉내에 불과했다. 콘크리트 뼈대 위에 무늬만 기와집으로 얹어놓은 신식 건물들 앞에서는 세월이 빚어낸 은은한 고풍스러움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종교적 경외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화엄사라 하면 자고로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의 웅장한 목조 실루엣과 그 마당을 지키는 석등, 그리고 수많은 불교 문화재들이 자아내는 장엄한 기운으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 아니던가. 세월의 때가 묻어 시커멓게 바랜 나무 기둥과 투박한 돌계단이야말로 이 고찰의 진짜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화엄사는 오래된 국보들이 지닌 역사의 무게보다, 세련되게 지어진 현대식 한옥 건물들의 화려함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심지어 사찰 한가운데에 버젓이 자리 잡고 커피를 파는 가게를 마주했을 때는 묘한 이질감마저 느껴졌다. 은은한 향내 대신 번지는 고소한 커피 향은, 이곳이 수행의 도량인지 유명 관광지의 유원지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머리로는 이해한다. 불교의 진리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시대가 변했으니 사찰도 대중과 호흡하기 위해 편리함을 쫓고, 찾아오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규모를 키우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순리일지도 모른다. 산속의 절이라 하여 언제까지나 무소유와 고립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세월의 거센 물살을 따라잡기 벅찬 노년의 세대에게, 이렇듯 번잡하고 빠르게 변해가는 옛 공간의 모습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지나온 날들을 되짚어보며, 마음속에 묻어둔 추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 먹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게 오랜 고찰은 번잡한 속세를 떠나 언제든 찾아가 기대어 쉴 수 있는 ‘추억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곳이었다.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주어, 지난날의 나를 온전히 마주하게 해줄 것만 같았던 그 성소(聖所)마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안타깝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화엄사를 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 일주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푸른 능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웅장함으로 말없이 우뚝 서 있었다. 사바세계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요동치지만, 거대한 자연은 그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킬 뿐이다. 변하는 것은 결국 인간사가 남긴 덧없는 흔적들과 그것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어느 늙은 나그네의 마음뿐인가 싶다. 빛바랜 옛 자취와 고즈넉한 숨결을 잃어버린 화엄사의 낯선 마당에서, 나는 차마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의 야속함과 이제는 연기처럼 희미해져 가는 내 청춘의 기억을 소리 없이 되새기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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