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 식사 후, 혈당 관리를 위해 집 근처 강둑길을 걷는다. 어느덧 일과가 된 이 길의 맨 끄트머리에는 초등학교 동창 녀석이 농사짓는 논이 있다. 우리 또래들이 저마다 살길을 찾아 외지로 떠날 때, 고향에 남아 평생을 흙과 씨름한 친구다. 일평생 한 우물만 파왔으니 그야말로 농사박사다.
농사도 대규모로 지으면 큰돈이 된다. 고향을 지키며 농사에 전념한 친구들은 매년 정직하게 번 돈으로 땅을 사 모았고, 이제는 그 면적이 어마어마한 대농(大農)이 되었다. 시금치를 베어낸 자리에 다시 감자를 심어 쉴 틈 없이 대지를 가꾸는 친구의 부지런함은 앞으로도 풍요로운 결실을 이어갈 것이다.
이 친구 덕분에 올해는 감자꽃 구경을 제대로 했다. 수천 평의 드넓은 논에서 일제히 피어난 감자꽃은 마치 들판에 흰 눈이 소복이 내린 듯 장관이었다. 감자꽃 중에는 보라색도 있지만, 친구의 농장에 피어난 것들은 대부분 하얀색이었다. 웬만한 꽃 축제 못지않게 아름답고 눈부신 풍경이었다.
그 경이로운 풍경을 즐긴 지 제법 며칠이 지난 어제, 산바카라길에 보니 그 많던 감자꽃이 완전히 져버렸다. 마치 봄볕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린 겨울 눈처럼 싹 사라진 모습을 보니, 이제 땅속 알맹이를 키워낼 침묵의 시간이 왔음이 실감 났다.
친구의 거대한 농장을 보며, 나도 우리 집 마당 한구석 작은 텃밭에 감자를 심었다. 평소 감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서다. 아내는 여러 품종 중에서도 특히 보라감자를 선호하는데, 몸에 더 좋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서 보라감자 몇 개를 사 와 4등분 한 뒤, 요 앞전 연휴 때 가족 바비큐 모임을 하면서 모아 둔 재를 묻혀 소독했다. 그리고 정성스레 땅에 묻었다. 그다음부터는 사람이 할 일은 없다. 땅과 씨앗이 알아서 키워낼 뿐이다. 모든 존재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안간힘은 참으로 숭고하다. 그 힘을 믿고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 농심(農心)의 시작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 텃밭은 강둑길 친구 농장처럼 쑥쑥 커주지 않았다. 남보다 조금 늦게 심기도 했거니와 비닐 멀칭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어 늦나 보다 하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흙을 들치고 새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초록빛이라 내가 느끼는 감동은 더했다. 생명은 이처럼 언제 어디서나 기어코 약동하기 마련이다. 봄볕과 바람이 부르면 언제고 대지를 뚫고 나올 힘을 생명은 이미 제 안에 간직하고 있었다. 이 경이로운 생명력을 마주할 때마다 우주가 보여주는 기적을 보는 듯해 마음이 설렌다.
싹을 틔운 감자는 당초의 우려를 씻어내듯 무럭무럭 자라나 드디어 꽃을 피워냈다. 자세히 보니 별처럼 예쁜 모양이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17세기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리 장식으로 감자꽃을 꽂았을 정도라니 과연 그럴만하다.
감자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아련하게 겹쳐온다. 예전 우리 부모님들은 감자밭에 꽃이 피면 튼실한 알을 생산해야 한다며 꽃송이를 가차 없이 따내곤 하셨다. 나 역시 부모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밭고랑에서 꽃을 따 모으던 기억이 선하다. 꽃으로 갈 영양분을 땅속 알맹이로 보내 자식들에게 배고픔만큼은 남기지 않겠다는, 우리 부모님 세대의 눈물겨운 삶의 궤적이었다.
이것이 요즘 같은 과학농법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 하여 나는 굳이 꽃을 따내지 않고 그 자체를 즐거이 바라보며 상상에 잠긴다. 감자를 단지 허기를 채울 식량으로만 보지 않고, 피어난 꽃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 우리 삶에 풍요가 찾아온 듯하여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난다.
오늘도 텃밭을 둘러본다. 우리 집 감자는 싱그럽고 활기차게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머지않아 흙 속에서 굵은 알맹이를 쏟아낼 녀석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
이 소박한 기쁨 속에서 문득 깨닫는다. 감자를 키워내는 이 작은 일조차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와 참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세상에 생명을 기르는 일보다 숭고한 일은 없을 것이다. 흙을 만지고 자라남을 지켜보는 동안 내 안에서 타자를 향한 자애(慈愛)의 마음이 커짐을 느낀다. 결국 다른 생명을 기르고 돕는 이 정성은, 거울처럼 되돌아와 내 삶을 더 온전하고 풍요롭게 가꾸는 길일 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