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유머, 인생의 진정한 비밀번호

by정용우

오늘 아침, 스마트폰 진동음과 함께 날아든 카지노톡 메시지 한 통이 하루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평소 존경하는 하성규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시 한 편이었다. 문학세계사에서 펴낸 제3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수상 작품집 『가까이 있어서 고맙다』에 수록되었다는 그 시의 제목은 「비밀번호」였다.


- 카드 비밀번호를 자꾸 잊는다

겨우 떠올려 적어두고는

그 종이를 또 잃는다


요즘은

내가 제일

비밀스럽다


시를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기분 좋은 청량감이 밀려왔다. 이것은 비단 하 교수님만의 이야기가 아니요,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는 우리 세대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기 때문이다. 망각이라는 노년의 불청객을 이토록 유쾌하고 품격 있게 받아치는 정신의 여유라니. 나는 즉시 온기 어린 답장을 만들어 교수님께 전송했다. 시 한 편이 매개가 되어 노학자들의 아침이 위트와 정으로 풍성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참으로 팍팍하다. 특히 효율과 정확성만을 요구하는 현대 슬롯에서 무언가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불안과 자바카라을 낳기 십상이다. 은행 창구나 마트 계산대 앞에서 기억나지 않는 네 자리 비밀번호를 붙잡고 쩔쩔맬 때의 그 아득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겨우 적어 둔 수첩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집안을 헤집고 다닐 때의 허탈함은 또 어찌할 것인가.


그러나 하 교수님은 그 마주하기 싫은 ‘망각’을 서글픈 퇴화로 두지 않았다. 오히려 "요즘은 내가 제일 비밀스럽다"라는 기막힌 역발상을 통해, 스스로를 신비롭고 매력적인 존재로 격상시켜 버렸다. 자바카라과 탄식이 머물 자리에 재치와 유머라는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일찍이 “말의 위트는 기쁨을 주지만, 삶의 위트는 인생을 구원한다”라고 말했다. 재치와 유머는 단순히 사람을 웃기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거친 일상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깎아내고, 메마른 삶에 숨구멍을 열어주는 가장 강력한 영양제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 역시 “인류에게는 정말로 효과적인 무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웃음이다”라며 유머가 지닌 치유의 힘을 예찬했다.


유머는 문제 자체를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는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당황하던 순간이 유머라는 렌즈를 통과하는 순간, 인생의 근사한 에피소드로 재탄생하는 기적을 우리는 이 시에서 목격하게 된다.


젊은 날의 유머가 날카로운 기지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노년의 유머는 삶의 굴곡을 다 지나온 이들이 가질 수 있는 넉넉한 관조의 미학에서 비롯된다. 내 몸과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그 결핍마저도 웃음으로 보듬을 수 있는 여유는 오랜 세월이 선물한 완숙함 그 자체다.


만약 우리가 깜빡깜빡하는 자신을 향해 "나이가 드니 이제 다 끝났구나"라며 한탄만 했다면 우리의 노년은 얼마나 어둡고 무거웠겠는가. 하지만 "내가 요즘 참 비밀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라며 허허 웃어넘길 수 있다면, 노년은 쇠퇴의 계절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풍요로운 황금기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시인 괴테는 노년에 이르러 “맑은 아침의 햇살처럼, 우리 마음속에 늘 즐거운 위트가 살아 숨 쉬게 하라”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품격 있는 유머 한 자락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경구다. 오늘 나에게 전달된 하 교수님의 메시지 하나가 나의 온 하루를 기쁨으로 채웠듯이 말이다.


창밖의 푸른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 역시 오늘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실수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내게도 망각의 순간을 유머로 치환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조금은 생겼기 때문이다.


하 교수님의 시 ‘비밀번호’는 오늘 하루를 즐겁게 열어갈 수 있는 진정한 인생의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향해 짓는 부드러운 미소와 여유다. 삶의 영양제가 되는 유머가 곁에 있기에, 노년의 길목은 쓸쓸하기보다 오히려 참으로 다정하고 고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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