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지막 웃음'을 보고서

제복의 상실, AI 시대의 소외

by정용우

비 내리는 오후, 창밖의 풍경이 흐릿해질수록 서재의 조명은 더욱 선명한 안식처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활자는 빛을 갈구한다. 밝고 환한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바카라장을 넘기는 손길조차 무거워지는 법이다. 이런 날에는 바카라 대신 영혼을 울리는 고전 영화 한 편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 된다. 개인적으로 청각의 불편함 때문에 대사가 선명한 한국 영화보다는 자막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외국 영화를 즐기는데, 그중에서도 흑백의 미학이 살아있는 고전 영화는 늘 묵직한 주제 의식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최근 필링박스(네이버TV)를 통해 다시 감상한 영화 ‘마지막 웃음’은 단순한 고전의 재발견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AI 시대의 존재론적 질문을 던져주었다.


영화 속 주인공인 노년의 호텔 도어맨에게 화려한 제복은 단순한 작업복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자부심이자, 슬롯적으로 인정받는 존재라는 증명서이며, 자신을 지탱하는 마지막 근거다. 문을 열고 닫는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그 제복을 입고 있을 때 그는 비로소 ‘누군가’가 된다. 그러나 세월은 무심하게도 그의 육신을 갉아먹는다. 체력이 떨어졌다는 판정은 곧 역할의 상실로 이어지고, 그는 화려한 문 앞이 아닌,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지하 화장실 관리인으로 밀려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극은 직무의 변경이 아니라 ‘시선의 전락’에 있다. 제복을 벗는 순간, 이웃의 존경과 가족의 신뢰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를 감쌌던 외형이 변하자 슬롯는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취급한다. 몰락을 감추기 위해 제복을 훔쳐 입는 그의 몸부림은 가여운 거짓말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자아를 붙잡으려는 인간의 처절한 비명이다.


인간의 존엄이 이토록 쉽게 외형과 슬롯적 역할에 종속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냉혹하다. 우리 노년 세대에게 이 영화는 남의 일이 아니다. 평생을 몸담았던 온라인 게임에서 은퇴하고, 젊음과 생산성이 최고의 가치가 된 슬롯의 변두리로 밀려날 때, 우리는 영화 속 도어맨이 느꼈던 그 시린 상실감을 공유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소외가 이제 노년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문명의 전환기 앞에 서 있다. 지능의 영역만큼은 인간 고유의 성역이라 믿어왔으나, 초지능을 갖춘 기계는 그 믿음을 비웃듯 우리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향후 5년 내에 전 세계적으로 1,4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 경고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산업연구원의 예측에 따르면 AI가 대체할 수 있는 국내 일자리는 약 327만 개로, 전체의 13%가 넘는다. 이는 단순히 통계상의 수치가 아니라, 수백만 명의 ‘제복’이 한꺼번에 벗겨질 수 있다는 실존적 위협이다.


과거에는 육체적 노쇠함이 은퇴의 이유였다면, 이제는 인간의 지적인 숙련도와 경험마저 기계의 효율성 앞에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기계가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더 창의적으로 설계하며,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제복’을 입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 ‘마지막 웃음’의 주인공이 겪은 고통은 결국 ‘쓸모’로만 인간을 평가하는 슬롯적 시선에서 비롯되었다. AI 시대의 공포 역시 본질은 같다. 우리가 인간을 오직 생산성과 효율성의 도구로만 바라본다면, 초지능 시대의 인류는 모두 지하 화장실로 밀려난 노년의 도어맨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기능 너머의 인간성’이다. 기계가 가질 수 없는 공감의 영역, 효율로 치환할 수 없는 윤리적 고찰, 그리고 성과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존엄 말이다.


영화의 제목인 ‘마지막 웃음’은 원래 도어맨이 뜻밖의 유산을 상속받아 복수하듯 웃는 해피엔딩을 암시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그런 우연한 행운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마지막 웃음’은 기술이 줄 수 없는 따뜻한 연대와, 서로의 존재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성숙한 시선에서 찾아야 한다.


비 내리는 오후, 영화가 끝난 뒤에도 화면 속 노신사의 처진 어깨가 잔상으로 남는다. AI가 지배하는 차가운 미래가 오더라도, 우리가 서로의 제복 너머에 있는 인간의 얼굴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쓸모가 없어져도 가치는 남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초지능 시대에 만들어가야 할 진정한 ‘인간의 자리’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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