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이름에 운명이 담기듯, 고을의 이름에도 그 땅이 품은 기운과 지향점이 담기기 마련이다. 내가 머무는 이곳, 경남 진주의 지수(智水)가 그러하다. '지혜로운 물'이라는 뜻을 품은 이름처럼, 이곳은 굽이쳐 흐르는 남강의 물줄기가 마을의 핏줄이 되고 지혜의 근간이 되는 곳이다. 일흔을 넘긴 생의 후반전, 만물이 푸르게 깨어나는 이 찬란한 봄날에 나는 매일 같이 남강의 둑길을 걸으며 이 지혜로운 물줄기가 들려주는 무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
지수는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든든한 삶의 터전이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남강 덕분에 이곳 사람들은 천수답을 바라보며 하늘만 원망할 필요가 없었다. 칠십 평생을 살아오며 전국적인 가뭄에 온 나라가 들썩일 때도, 이곳 지수에서 물 걱정에 밤잠을 설친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강물이 범람하며 실어 나른 비옥한 토양은 너른 들판을 만들었고, 그 옥토 위에서 자란 풍부한 물산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풍요는 인심을 낳고, 인심은 다시 평화로운 공동체를 일구었으니 이 모든 복락이 결국 남강으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진주 대곡면과 의령 하정면의 경계를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보고 있노라면, 왜 우리 선조들이 이 고을을 '지수'라 이름 붙였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단순히 농사를 돕는 물을 넘어, 인간의 도리와 삶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영험한 기운이 강물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이곳 지수로 이주한 후 거의 매일 약 2km(왕복 4km)의 강둑길은 이제 내 삶의 없어서는 안 될 '사유의 정원'이 되었다. 탁 트인 강줄기가 시야를 시원하게 열어주는 이 길 위에서 나는 건강을 다지고 내면을 살핀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바카라장 속에서 잠자던 옛 성현들의 말씀이 물결을 타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그 말은, 물의 성질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 비로소 가슴에 와닿는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결코 다투지 않는다(水善利萬物而不爭). 남강은 들판의 곡식을 키우고 갈증 난 목을 축여주지만, 한 번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한 물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處衆人之所惡). 남보다 높아지려 애쓰고 앞서가려 발버둥 치는 인간의 욕망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둑길을 걸으며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만 향하는 강물을 보면 내 안의 꼿꼿했던 아집이 조금씩 녹아내림을 느낀다. 자기를 낮춤으로써 결국 바다라는 거대한 완성을 이루는 물의 겸손이야말로, 지수가 내게 주는 첫 번째 지혜다.
공자(孔子) 역시 물을 바라보며 군자의 도리를 찾았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어느 날 제자가 공자에게 "군자는 어찌하여 큰물을 보면 반드시 살피십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물이 가진 여러 덕목을 설파했다.
물은 쉼 없이 흐르며 생명을 살리니 '덕(德)'이 있고, 낮은 곳을 향해 흐르는 길에 일정한 도리가 있으니 '의(義)'가 있으며, 거대한 골짜기에 임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용(勇)'이 있다고 했다. 특히 어떤 그릇에 담겨도 그 모양을 따르며 굽이굽이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물의 유연함은,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한 덕목이다. 강물은 장애물을 만났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바위를 만나면 휘돌아가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뛰어내린다. 그 기백과 유연함을 동시에 갖춘 남강의 흐름은 일흔셋이라는 내 나이에도 여전히 배워야 할 숙제로 다가온다.
매일 아침 마주하는 남강은 어제의 강물이 아니다. 끊임없이 흐르기에 늘 새롭고, 늘 깨끗하다. 고여 있지 않기에 썩지 않는 물처럼, 나의 사유와 성찰도 이 강물을 닮아 매일 새로워지기를 소망한다. 이제 내 나이 일흔셋. 내 남은 생의 시간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이 지수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동안만큼은 이 '지혜로운 물'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는 점이다. 강물이 전해주는 무욕(無慾)의 평온함과 유유자적한 흐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수인(智水人)'으로 거듭나는 길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강둑길로 나선다. 저 멀리 남강이 은빛 비늘을 파닥이며 나를 부른다. 물소리는 여전히 낭랑하고, 들판은 넉넉하다. 지혜로운 물이 흐르는 이곳, 지수에 산다는 것은 내 생애 가장 큰 행운이자 축복이다. 강물과 나란히 걷는 이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인생이라는 커다란 강물의 흐름을 겸허히 배워나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