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의 빌런들

자율과 통제 그리고 권리와 의무 사이

by이은호


"남의 일에 신경 끄고 당신이나 잘하세요."


살고 있는 아파트 일층에 소박한 규모의 헬스장이 있다. 전담 관리직원도 없고 일주일에 한 번 여사님들이 청소를 해주는 정도다. 나머지는 이용자들이 알아서 정리 정돈하며 깨끗하게 사용해야 한다. 물론 곳곳에 헬스장 이용 규칙이 붙어있다.


언젠가 러닝머신에서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창문 너머 아파트 울타리 밖에서 한 남자가 후문 쪽으로 향하는 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남자는 헬스장으로 들어와 내 한 칸 건너 러닝머신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별도의 헬스장용 운동화로 갈아 신은 게 아니고 아파트 외부로부터 신고 다녔던 신발을 그냥 신고 있다는 것이었다. 헬스장 입구에 '외부신발 착용금지'라고 빨간 글씨로 커다랗게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저씨, 밖에서 신던 신발 그냥 신고 들어오셨죠. 운동용 신발로 갈아 신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입구에 안내문도 있는데."


이용 규칙을 중요시하는 내가 그걸 넘기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남의 일에 신경 끄고 당신이나 잘하세요.'라고. '뭐 어때서? 남이야 신발을 갈아 신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이용 규칙을 지키라고 다시 재촉하자, 그는 '내 신발이 당신 신발보다 더 깨끗하다. 벗어봐라 한번 대보자.'며 억지를 부렸다. 이후 몇 마디 더 실랑이가 오가자, 급기야 그는 '당신 몇 살이냐?'며 나이를 따졌다. 뜬금없이 무슨 나이? 내가 보기엔 자기가 나보다 더 어린것 같은데. '아니, 헬스용 신발 신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자, 그는 할 말이 없는지 대꾸 없이 러닝머신의 스피드를 높였다.


성질 같아서는 그 얄미운 면상에 한방 날리고 싶었지만, 이성적인 작가(?) 체면에 그럴 수는 없는지라 하던 운동을 포기하고 헬스장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관리사무소에 들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계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었다. 부슬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집앞 하천변에서 러닝을 하였는지 아래위로 유니폼이 촉촉이 젖은 남자가 역시 신던 신발 그대로 발자국을 찍어가며 헬스장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중량물을 들고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러닝으로 유산소운동을 하고 왔으니 이어서 근육운동을 하려는 걸까. 자신의 몸관리는 신경 쓰면서 기본 질서는 무시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사람과 함께 운동할 맛이 나지 않았다. 운동을 그만두고 짐을 챙겨 나오면서 한마디 하였다.


"아저씨, 다음부터는 헬스용 신발 갈아 신고 운동합시다. 젖은 신발로 발자국 다 남기며 좀 심한 거 아닙니까?"


그다음부터 난 아파트 헬스장에 발길을 끊었다. 결국 빌런들의 승리로 끝난 셈이 되고 말았다.




"조금 전 102동 상층부에서 중앙광장 쪽으로 페트병이 든 쓰레기를 투척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보행자나 입주민이 다칠 수 있으므로 물건을 투척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드립니다."


어느 날 오전, 실내 스피커를 통하여 관리사무소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누가 창문 밖으로 물건을 던졌다는 것이다. 그런 몰상식한 짓은 남의 동네 일로만 알았는데, 마침내 우리 아파트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그 후로도 투척행위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유행처럼 여러 곳으로 번졌다. 종류도 다양하였다. 빵봉지, 페트병, 빈깡통, 담배꽁초, 음식물 쓰레기 등등. 비록 치명적인 흉기가 될만한 중량물이 아니고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언제 무슨 불상사가 벌어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입주민들 불만이 관리사무소로 빗발쳤다. 관리 안 하고 뭐 하냐고. 입주민 중 특히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들의 불안이 컸는데,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무방비로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관리사무소에서 경찰에 신고하여 두 번인가 경찰이 다녀가고, 나중에는 과학수사대까지 출동하였으나 별반 소득이 없었다. 투척된 증거물에서 지문을 채취하더라도 용의자가 특정되지 않는 한, 전체 입주민을 대상으로 수사나 지문채취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수사는 시작도 못하고 종료되고 말았다. 아마도 중량물이 떨어져 누가 죽거나 아이들이 크게 다치기라도 해야 수사가 이루어질 것 같다.


관리사무소에서 수시로 안내방송을 하고 유인물을 게시하여 입주민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으나, 투척행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보다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 사정상 아파트는 절대로 바람직한 주거환경이 못된다. 더구나 요즘 세상은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더 그러하다. 많은 입주민들이 공동체 질서를 지키고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또 많은 입주민들이 질서를 무시하고 남에게 피해 주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아침 여덟 시만 되면 쿵작쿵작 피아노를 쳐 이웃들로 하여금 피아노 소리를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소리로 만들기도 하고, 밤 열 시에 쿵쿵쿵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러닝머신에서 달려 이웃들의 심장도 쿵쿵쿵 함께 뛰게 만들기도 한다. 복도에서 연기 가득 담배 피워 이웃들에게 강제 화생방 훈련을 시키고 게다가 담배꽁초를 구석에 버리거나 밖으로 내던지기도 하고, 음쓰에서 흐르는 진국을 엘리베이터 바닥에 흘려 이웃의 코를 감싸 쥐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이는 비닐봉지에 담긴 음쓰를 분리수거함 위에 그대로 올려놓고 도망가기도 한다. 한술 더 떠 자기 집 폐기물을 남의 집 현관 앞에 몰래 버리고 가는 정말 나쁜 사람도 있다.


1세대 1 주차공간은 입주자의 당연한 권리라며 경차 자리가 많이 비어있음에도 기필코 일반차 주차공간에만 주차하는 경차 차주도 있고, 밤늦은 시간 주차공간이 없어 곡각지 또는 층간 오르막 통로에 주차하는 것까지는 이해되는데 다음날 11시가 넘도록 그대로 방치해 놓는 차주도 있다. 심지어는 관리사무소에서 차 옮겨 달라고 전화해서 잠 깨웠다며, 한번 더 전화하면 관리사무소로 쳐들어가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차주도 있다.


관리비가 몇 달 치 밀려 관리사무소에서 독촉장을 보내니, 그다음부터 사사건건 트집 잡고 민원을 넣어 관리사무소 직원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입주민도 있다. 그런 사람이 최근 외제차 한 대를 더 구입했다고 한다. 돈 없어서 관리비를 못 내는 게 아니라 그냥 안내는 것이다.


빌런들의 행각을 관리사무소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뉴스에 가끔 나오는 칼부림 사건이 우리 아파트라고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다만 입주민 스스로의 자중과 배려를 호소하지만 해결은 요원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는 철저히 주장하면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는 소홀하다. 그러고서는 불평불만은 많다. 아파트 익명 게시판을 보면 각종 민원과 불평불만이 가득하다. 관리사무소나 입대의에 대한 불만도 많은데, 입대의 회의를 거쳐 무슨 일을 진행하면 마치 업자와 짬짜미라도 있는 양 근거 없는 트집을 잡아대기도 한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자신이 입대의에 들어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일처리를 하면 될 터인데, 그럴 생각은 애당초 없다. 그냥 남이 하는 일에 흠집을 내고 싶을 뿐이다.


지난달, 전임 동대표들의 임기가 끝나고 아파트 입대의를 새로 구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대표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 1차, 2차를 거쳐 3차까지 모집공고가 떴다. 익명 게시판에 단골로 글 올리는 입주민 중 어느 누구도 지원하지 않았다.


아파트 입대의는 의결기구, 관리사무소는 집행기관이다. 입대의가 구성되지 않으면 엄청난 비효율이 발생한다. 일상업무는 관리사무소에서 진행하지만, 결정이 필요한 사안은 그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관리사무소에서 임의로 집행할 수 없다. 일일이 입주민 투표를 거쳐 결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미뤄지거나 생략되고, 시급한 일이 시기를 놓쳐 낭패를 보기도 한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입주민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아파트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권리만 주장할 게 아니라 의무도 이행하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동대표도 돌아가면서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원자가 없을 경우엔 더욱더 그러하다. 한 가지 아이디어는 아파트에 주민등록 상 입주순으로 하는 것이다. 그만큼 오래 살며 권리를 누렸으면 그 정도 봉사는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동대표를 해보면 입주민으로 살 때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비아저씨나 청소하는 여사님들이 최저임금 받으며 얼마나 고생하는지,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박봉에도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입대의에서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얼마나 심사숙고하는지 알게 된다. 물론 양념으로 입주민의 빌런 같은 행각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것도 보게 된다.


우리가 누리는 아파트 공동체에서의 평온한 일상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율과 통제 사이 그리고 권리와 의무 사이에서 입주민 모두의 노력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기복 심한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 판단과 행동으로 슬기로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이웃들이 늘어나길 바랄 뿐이다.


여러분이 사는 아파트는 어떠신가요?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즐거운 아파트. 신나는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모성애의 모범적인 성공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