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토요일 저녁 내 휴대폰에 남은 통화 기록을 따라간다.
기록은 기록대로 두고 그 사이에 그날 밤 내가 생각한 것들을 끼워 넣었다.
오후 6시 41분
수신
문영철 어르신
통화 시간 12분 07초
문영철 어르신은 일흔둘이다.
쉰 살 넘어 시력을 잃으셨고 서구의 오래된 아파트에 혼자 사신다.
몇 해 전 복지관 보이스오버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어르신은 내가 가르치는 걸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 니는 이거를 몇 년 만에 익혔노.
나는 10년쯤 걸렸다고 했고 어르신은 그럼 나는 20년 걸리겠다며 웃으셨다.
그 어르신이 토요일 저녁에 전화를 하셨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어제부로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그만두셨다고 했다.
멀리 이사를 가게 되어 갑자기 정리가 됐다고.
새 사람은 기관에서 알아봐 준다고 했는데 주말이라 연락이 없다고.
그리고 오늘 낮에 욕실에서 미끄러지셨다고 했다.
오른쪽 손목을 짚었는데 부어올라서 숟가락을 쥐기가 힘들다고.
내가 물었다.
어디 전화해 보셨어요.
어르신이 대답했다.
바우처 카드 뒤에 있는 번호로 했다.
기계가 받더라.
무슨 일이냐 캐서 활동지원사가 그만뒀다 캤더니
다시 말씀해 주세요 카더라.
또 캤더니 또 다시 말씀해 주세요.
세 번째 하니까 뚝 끊기대.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내가 어디다 전화를 해야 되는지를 모르겠다.
그래서 니한테 했다.
통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옆에 엎드려 있던 탱고가 고개를 들었다.
내 손이 멈춰 있으면 녀석은 꼭 그걸 알아챈다.
번호 목록
내 휴대폰 연락처에는 번호들이라는 이름의 그룹이 있다.
107.
110.
112.
119.
129.
1644로 시작하는 장애인 학대 신고 번호.
구청 장애인복지 담당 부서.
활동지원기관.
장애인 콜택시.
몇 해에 걸쳐 하나씩 모은 목록이다.
그룹을 열면 보이스오버가 위에서부터 하나씩 읽는다.
일 공 칠.
일 일 공.
일 일 이.
손가락을 아래로 쓸어내릴 때마다 번호가 하나씩 넘어간다.
그날 저녁 나는 그 목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들었다.
어느 번호도 어르신의 상황 이름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정보를 찾는 일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도 이 목록을 다 외우지는 못한다.
이 목록은 친절해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조건을 깔고 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먼저 자기 문제를 분류해야 한다는 것.
이건 의사소통 문제인가 복지 문제인가 행정 문제인가 응급 상황인가.
학대인가 돌봄 공백인가 그냥 사고인가.
의사소통 중계는 107이고 복지 상담은 129이고 행정 민원은 110이고 긴급 신고는 119다.
번호는 기관의 구조를 따라 나뉘어 있다.
사람의 상황을 따라 나뉘어 있지 않다.
그날 어르신의 상황은 셋이 한꺼번에 겹쳐 있었다.
돌봄이 끊겼고 몸을 다쳤고 그걸 말할 곳을 못 찾았다.
어느 한 번호에 깔끔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밤에 어르신에게 필요했던 건 번호 하나가 아니었다.
분류를 대신해 줄 사람 하나였다.
오후 6시 55분
발신
활동지원기관
통화 시간 0분 48초
주말에는 상담이 어렵다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라고.
급한 일은 메시지를 남기라고 했다.
나는 메시지를 남겼다.
월요일에 누가 들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오후 7시 03분
발신
129
통화 시간 21분 32초
안내 음성 메뉴를 몇 번 지나 상담원과 연결됐다.
상담원 선생님은 친절했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끊지 않고 들었고
중간중간 짧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어르신이 혼자 계시고
식사 준비가 어렵고
손목은 부어 있고
활동지원은 어제부로 끊긴 상태라는 거죠.
그 정리를 들으면서 나는 조금 놀랐다.
내가 두서없이 늘어놓은 이야기가 네 줄로 정리되어 돌아왔다.
다만 그다음부터는 번호가 다시 늘어났다.
손목은 119에 연락하시는 게 맞겠다고 했다.
활동지원 공백은 구청이나 기관과 평일에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긴급지원이 필요한 상황인지는 지역에서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상담원 선생님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그분은 그분이 맡은 칸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그런데 통화를 끊고 보니
나는 21분 전보다 번호를 두 개 더 갖고 있었다.
분류하는 사람
문헌정보학에는 참고면담이라는 개념이 있다.
도서관에 온 사람은 자기가 찾는 것을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서는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그 사람의 진짜 필요를 함께 찾아 간다.
뭘 찾으세요가 아니라 그걸 찾아서 뭘 하시려고요를 묻는 일이다.
좋은 참고면담에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정보를 찾는 사람이 자기 질문을 처음부터 정확히 분류할 수 있다면
애초에 사서가 필요 없다는 것.
질문을 정확히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반쯤 답을 찾은 사람이다.
129의 상담원 선생님이 그날 한 일이 정확히 참고면담이었다.
흩어진 상황을 네 줄로 정리해 주었다.
그런데 그 사서는 서가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필요를 정확히 짚어 주고 나서
그 필요를 채울 곳은 다른 건물에 있다고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전화 상담 체계에서 분류는 결국 전화를 건 사람의 몫으로 돌아온다.
위기에 놓인 사람이 자기 상황의 분류기 노릇을 해야 한다.
그날 밤 그 분류기는 나였다.
나에게 전화할 사람이 없는 어르신은 어떻게 했을까.
그 질문이 지금도 잘 안 내려간다.
오후 7시 31분
발신
문영철 어르신
통화 시간 6분 14초
119를 부르자고 말씀드렸다.
어르신은 한참 대답이 없으셨다.
손목 좀 삔 걸로 구급차를 우째 부르노.
남 보기 부끄럽다.
나는 우리가 지금 가겠다고 했다.
보보가 벌써 겉옷을 입고 있었다.
탱고는 하네스 소리가 나자마자 현관 앞으로 갔다.
세 번
택시 안에서 나는 어르신이 말한 그 기계를 생각했다.
다시 말씀해 주세요.
다시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끊김.
국제 웹 표준을 만드는 기구는 자연어 인터페이스와 자동응답 시스템과 챗봇이 장애인에게 접근 가능하려면 여러 입력 방식과 출력 방식을 함께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음성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문자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키보드나 스위치로 입력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음성 대신 점자로 결과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말이 비정형적인 사람의 말도 시스템이 충분히 알아들어야 하며
언제든 입력 방식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기구는 음성 입력이 생각보다 인지적으로 부담이 큰 일이라고도 설명한다.
특히 학습장애나 인지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단계를 나눠 안내하고 쉬운 말을 쓰고 대답할 시간을 넉넉히 주는 게 중요하다고.
어르신의 말을 떠올렸다.
천천히 말씀하시고 문장 끝이 아래로 내려가는 대구 말이다.
무슨 일이냐는 기계의 질문에 어르신은 아마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셨을 것이다.
어제 선생님이 그만뒀는데 그게 이사를 가서 그렇고 그래서 오늘 내가 욕실에서.
기계가 기다린 건 아마 활동지원 해지 같은 짧은 낱말이었을 것이다.
어르신이 준 건 이야기였다.
기계는 이야기를 받을 칸이 없었다.
챗봇이 세 번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 상담의 연락처를 주라는 권고도 있다.
어르신이 만난 기계도 세 번을 셌다.
다만 세 번째에 사람을 건네준 게 아니라 전화를 끊었다.
같은 숫자를 세면서 정반대의 일을 한 셈이다.
나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얼마 전 한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했을 때
보이스봇이 화면으로 보시려면 1번을 누르라고 했다.
1번을 누르자 문자로 링크가 왔다.
링크를 여니 보이스오버가 버튼 버튼 버튼이라고 읽었다.
음성으로 안 되는 사람을 위해 화면을 주고
화면으로 안 되는 사람은 다시 기다리게 한다.
그 통신사의 보이스봇은 365일 24시간 받지만
상담사 연결은 평일 9시부터 18시까지였다.
자동화는 늘 먼저 받는다.
사람은 늘 나중에 온다.
그 순서가 누구에게는 편의이고 누구에게는 문턱이다.
오후 8시 22분
발신
119
통화 시간 3분 51초
어르신 댁 복도에서는 오래된 아파트 특유의 시멘트 냄새가 났다.
현관문을 열자 안쪽에서 라디오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혼자 계실 때 늘 켜 두신다고 했다.
사람 목소리가 없으면 집이 너무 조용해서라고.
보보가 어르신 손목을 살짝 만져 봤다.
열감이 있었고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어르신이 숨을 들이켰다.
보보가 낮은 목소리로 이건 그냥 두면 안 되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어르신도 말리지 않으셨다.
119 상담원은 짧고 정확했다.
주소와 나이와 다친 경위와 지금 상태.
누가 옆에 있냐고 물었고 내가 있다고 하자
그럼 기다리시라고 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하기까지 어르신은 냉장고 얘기를 하셨다.
반찬통이 몇 개 있는데 어느 게 어제 것인지 모르겠다고.
보보가 하나씩 열어 냄새를 맡아 보고 정리했다.
나는 그 장면을 소리로 기억한다.
뚜껑이 딸깍 열리고 보보가 이건 괜찮아요 하고
어르신이 그래 그래 하던 소리.
구급대원 한 분이 나에게 물었다.
보호자 되세요.
아니요 그냥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 병원에 같이 가실 분은요.
잠깐 조용해졌다.
보보가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나는 탱고와 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왔고
밤 11시가 넘어 보보의 전화를 기다리며 거실에 앉아 있었다.
보호자라는 칸도 결국 분류의 문제였다.
가족이 아닌 사람이 그 칸에 들어가려면 매번 설명이 필요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위기는 그 칸이 비어 있는 데서 한 번 더 길어진다.
119는 손목을 데려갔다.
반찬통은 데려가지 않았다.
월요일까지의 끼니도 데려가지 않았다.
그건 119의 일이 아니니까.
다른 번호들
돌아오는 길에 보보가 물었다.
청소년은 1388이 있잖아.
여성 폭력 피해는 1366이 있고.
장애인은 왜 하나가 없어.
좋은 질문이었다.
청소년상담 1388은 전화와 문자와 채팅으로 365일 24시간 상담을 받는다.
여성긴급전화 1366은 전국 통일번호로 365일 24시간 위기 상담과 긴급 피난과 지역 기관 연계를 맡는다.
누가 어떤 위기에서 어디로 전화해야 하는지가 제도로 정해져 있다.
분류의 부담이 전화를 거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번호 쪽에 있다.
다른 나라들은 장애인의 전화 접근을 따로 설계한다.
호주에는 장애인과 가족과 돌봄 제공자를 위한 별도 전화 창구가 있고
통역 서비스와 중계 서비스를 함께 연결해 준다.
장애인 학대와 방임을 신고하는 전국 핫라인도 따로 있다.
영국은 장애 급여 상담에 일반 전화와 문자 중계와 수어 영상 중계를 함께 둔다.
응급 상황에는 수어 사용자가 앱이나 웹으로 통역사와 연결된 뒤 응급 운영자에게 닿는 경로가 있다.
캐나다는 장애 급여 문의에 문자 전화 번호와 영상 중계를 따로 둔다.
미국은 988 위기상담망에 수어 직접 영상통화를 도입했다.
우리에게도 장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손말이음센터는 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을 위해 수어 영상 중계와 문자 중계를 365일 24시간 제공한다.
2025년 4월부터는 청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이 119에 영상통화로 직접 전화하면 중계사가 3자 연결로 통역하는 체계도 운영된다.
중요한 장치다.
다만 그건 하나의 장애 유형을 위한 하나의 통로다.
그날 밤 어르신 같은 사람을 위한 통로는 아니었다.
263만 1356명
2024년 말 기준 등록장애인은 263만 1356명이다.
전체 인구의 5.1%이고 그 가운데 65세 이상이 55.3%다.
장애와 나이와 질병과 돌봄 의존이 한 사람 안에 겹쳐 있는 시민이 이미 아주 많다는 뜻이다.
문영철 어르신은 그 숫자 안의 한 사람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3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해 정보통신망과 정보통신기기에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도구와 서비스를 마련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접근성을 정보통신기술과 응급서비스까지 포함하는 국가의 의무로 보고
위험 상황에서의 안전과 폭력과 학대로부터의 보호와
수어와 점자와 보완대체의사소통을 포함한 여러 의사소통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그렇다면 장애 관련 통합 상담전화는 복지의 추가 옵션이 아니다.
접근권과 안전권을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국가의 바카라임이다.
그날 밤 내가 바랐던 것을 적어 보면 이렇다.
전국 어디서나 하나의 번호.
음성과 문자와 수어 영상과 보완대체의사소통과 쉬운 정보를 한 번호 안에서.
청소년 장애인과 여성 장애인처럼 겹친 취약성을 아는 전문 경로.
학대와 폭력과 돌봄 공백과 주거 위기와 급여 중단과 정신건강과 응급 상황을 분류해 바로 이어 주는 일.
기계가 먼저 받더라도 언제든 사람에게 바로 넘어가는 구조를 기본값으로.
새로운 기관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손말이음과 129와 110과 112와 119와 지자체 사례관리와 권익옹호기관을
전화를 거는 사람 쪽에서 하나로 묶자는 이야기다.
분류는 번호가 하고
사람은 그냥 전화를 걸면 되도록.
제목: 번호의 아키텍처 혹은 분류기가 되는 밤.
그날 밤 통화 기록은 다섯 줄이다.
통화 시간을 다 더하면 44분 32초다.
그 44분 동안 어르신의 문제는 손목 하나만 해결됐다.
나머지는 월요일로 넘어갔다.
전화 상담 체계가 번호를 고르고 방식을 고르고 기관을 고르고
같은 설명을 여러 번 되풀이하게 만든다면
그건 상담 체계라기보다 선별 체계에 가깝다.
결론: 복지는 가장 다급한 순간에 국가가 어떤 목소리로 받는가의 문제다.
장애인에게도 하나의 쉬운 번호와 하나의 접근 가능한 창구와 하나로 이어지는 응답이 있어야 한다.
자동화가 아무리 빨라져도
위기에 놓인 사람이 자기 문제의 분류기가 되어야 하는 구조라면
그건 연결의 기술이 아니라 바카라임을 미루는 형식이다.
그나저나 어르신 손목은 금이 간 게 아니라 심하게 삔 거였다.
월요일 오후에 기관에서 새 활동지원사를 찾는 데 2주쯤 걸린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셨다.
그 2주 동안 보보는 반찬을 두 번 더 날랐다.
어르신은 그때마다 고맙다는 말 대신 탱고 간식을 내놓으셨다.
탱고는 이제 어르신 댁 현관 앞에서 꼬리부터 흔든다.
어르신 휴대폰 단축번호 1번은 아직도 나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