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안다는 것에 대하여
채소를 언제 심고 언제 거두는지 적어둔 목록이 있다.
아스파라거스는 3월에 심고 5월에 거둔다. 가지는 3월에 심고 9월에 거둔다. 순무는 3월에 심고 10월에, 당근은 3월에 심고 7월에 거둔다. 오이는 4월에 심고 9월에, 감자는 4월에 심고 7월에, 토마토는 3월에 심고 9월에 거둔다.
여기까지는 예상대로다. 봄에 심고 여름이나 가을에 거둔다. 땅이 풀리면 씨를 넣고 해가 뜨거워지면 열매를 딴다.
그런데 목록 끝에 이상한 두 줄이 있다.
양파는 9월에 심고 5월에 거둔다. 파는 9월에 심고 6월에 거둔다.
다들 봄에 시작하는데 이 둘만 가을에 시작한다. 그리고 겨울을 통째로 건너서 이듬해에야 거둔다.
이 목록을 처음 읽으면 양파와 파만 혼자 늦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정확한 때에 심은 것이다. 다른 채소들과 때가 다를 뿐이다.
목록 앞에 붙은 문장이 이렇다.
무슨 일이든 때를 잘 맞춰야 한다. 때가 설익거나 물크러지면 일의 보람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설익는다는 것은 너무 이르다는 뜻이다. 물크러진다는 것은 너무 늦어서 무르고 상했다는 뜻이다. 둘 다 오래된 우리말인데 요즘은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단어만큼 때를 놓친 상태를 정확하게 그리는 말도 드물다. 하나는 단단해서 먹을 수 없고 하나는 물러서 먹을 수 없다. 그러니까 때를 맞춘다는 것은 이 두 실패 사이의 좁은 자리를 찾는 일이다.
채소에서는 이것이 아주 구체적이다. 서리가 끝나기 전에 토마토 모종을 내놓으면 하룻밤 새 얼어 죽는다. 반대로 너무 늦게 심으면 열매가 익기 전에 가을이 온다. 일찍 심어서 망하는 것과 늦게 심어서 망하는 것은 결과가 비슷하다. 거둘 것이 없다.
수확도 마찬가지다. 덜 여문 감자는 껍질이 얇아 금방 상하고 너무 오래 땅속에 둔 감자는 다시 싹을 틔운다. 오이는 하루 이틀만 늦게 따도 금세 커져서 씨가 굵어진다.
때를 놓친다는 것은 생각보다 문자 그대로의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실패가 사람에게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늦어서 망치면 아쉽다. 조금만 서둘렀으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서두르게 된다.
일러서 망치면 그것이 실패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먼저 시작했는데 결과가 나쁘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른 것이 문제였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늦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이른 것에는 관대하다. 빨리 시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런데 밭은 그 미덕을 봐주지 않는다. 서리 내리는 밤에 내놓은 모종은 부지런함과 상관없이 얼어 죽는다.
그런데 이 목록을 그대로 우리 텃밭에 가져오면 꽤 곤란한 일이 생긴다.
이 목록은 유럽의 어느 지역 기후를 기준으로 쓰인 것이다. 3월에 가지를 심으라는 말을 따라 한국에서 3월에 가지를 밭에 내놓으면 거의 틀림없이 얼어 죽는다. 가지는 추위에 약해서 이곳에서는 늦은 봄, 서리 걱정이 사라진 뒤에야 밭으로 옮긴다.
양파도 마찬가지다. 가을에 심는다는 것은 같지만 실제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다. 남쪽과 북쪽이 다르고 해마다 날씨에 따라 조금씩 앞뒤로 움직인다.
여기서 하나를 알 수 있다. 때는 달력에 적힌 날짜가 아니다.
3월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3월에 그 땅이 어떤 상태인가가 중요하다. 흙의 온도가 몇 도인지, 마지막 서리가 지났는지, 해가 얼마나 길어졌는지. 날짜는 그 조건을 대신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이다. 그리고 표지판은 장소가 바뀌면 다른 곳을 가리킨다.
그래서 오래 농사지은 사람들은 날짜보다 신호를 본다. 땅을 손으로 쥐어보고 어떤 꽃이 피었는지를 살피고 아침 공기의 냄새를 맡는다. 달력은 참고만 한다.
이 차이는 정보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다.
목록은 편리하다. 누가 정리해둔 것을 그대로 따르면 된다. 판단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목록에는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와 조건이 적혀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목록도 그렇다. 어느 지역 기준인지 아무 말이 없다.
그러면 목록을 읽는 사람은 그것이 어디에나 통하는 규칙이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그리고 자기 땅에서 실패한 뒤에야 그 목록이 다른 땅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좋은 정보에는 출처와 조건이 함께 붙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그것이 빠진 정보는 아무리 정확해도 엉뚱한 곳에 적용될 수 있다. 3월에 가지를 심으라는 문장은 틀린 문장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맞지 않는 문장이다.
우리 조상들이 쓴 이십사절기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절기를 흔히 음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절기는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정한다. 해가 하늘의 어디쯤 있는지에 따라 일 년을 스물넷으로 나눈 것이다.
이유가 있다. 달의 주기로 날짜를 세면 계절과 어긋난다. 같은 음력 날짜라도 해마다 계절이 조금씩 밀린다. 농사는 계절을 따라야 하는데 계절은 해가 만든다. 그러니 농사의 때를 알려면 해를 봐야 했다.
경칩에 개구리가 깨어나고 곡우에 봄비가 내려 곡식이 자란다는 식의 이름들은 그 시기의 땅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신호를 담고 있다. 날짜를 외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때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말하자면 절기는 신호를 읽는 법을 정리한 목록이다. 채소 목록보다 한 단계 깊은 곳을 가리킨다.
물론 절기도 완벽하지 않다. 중국 화북 지방의 기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반도와는 조금씩 어긋난다. 우리 조상들도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절기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각 지방의 경험을 덧붙여 썼다. 같은 절기라도 남쪽 마을과 북쪽 마을이 하는 일이 달랐다.
그리고 요즘은 절기와 실제 날씨가 점점 더 어긋난다. 봄이 일찍 오고 가을이 길어지고 서리가 내리는 날이 해마다 달라진다. 수백 년 동안 쌓인 경험이 몇십 년 사이에 덜 맞게 된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때를 읽는 기준 자체가 흔들리는 시대에는 더더욱 목록보다 땅을 봐야 한다.
다시 양파로 돌아가보자. 왜 양파는 가을에 심는가.
가을에 심은 양파는 겨울 전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조금 키운다. 그리고 추운 동안은 거의 자라지 않고 버틴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봄이 오고 해가 길어지면 상황이 바뀐다. 양파는 낮의 길이에 반응해서 알을 굵게 키우기 시작한다. 하루 중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을 신호로 삼는다.
그러니까 양파가 가을에 심어지는 이유는 봄에 그 신호를 받을 준비를 해두기 위해서다. 겨울을 건너는 동안 이미 뿌리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신호가 오는 순간 바로 알을 키울 수 있다. 봄에 처음 심으면 뿌리를 내리느라 그 시기를 놓친다.
마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늘은 겨울 추위를 겪어야 제대로 쪽이 나뉜다. 따뜻한 곳에서만 키우면 쪽이 갈라지지 않은 둥근 통마늘이 되기 쉽다. 추위가 방해물이 아니라 필요한 과정인 셈이다.
겨울은 양파와 마늘에게 멈춘 시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준비하는 시간이다.
밭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겨울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 땅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잎은 작고 몇 달째 그대로다. 정말 자라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은 이 시기에 실수를 한다. 너무 자주 들여다보거나 괜히 비료를 더 주거나 아예 갈아엎어버린다.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 뭔가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땅 위의 변화만으로 성장을 판단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 목록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거두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아스파라거스는 두 달 남짓, 당근과 감자는 서너 달, 토마토와 가지는 반년, 양파는 여덟 달이 걸린다.
사실 아스파라거스는 이 목록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처음 심은 해에는 거두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뿌리가 충분히 자리 잡을 때까지 두세 해를 기다린다. 그 대신 한번 자리를 잡으면 십 년 넘게 해마다 순을 올린다.
목록에 적힌 두 달은 그 긴 기다림을 지난 뒤의 이야기다. 숫자만 보면 가장 빠른 작물인데 실제로는 가장 느린 작물인 셈이다. 표에 적힌 기간이 전부를 말해주지 않는다.
양파를 키우는 사람이 7월에 당근 밭을 보면서 조바심을 낼 이유는 없다. 저쪽은 벌써 거뒀는데 나는 아직이라고 초조해할 일도 없다. 처음부터 다른 시간표를 가진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오면 이 당연한 사실이 자주 잊힌다.
우리는 대개 하나의 시간표를 놓고 서로를 비교한다. 몇 살에는 학교를 마쳐야 하고 몇 살에는 일을 시작해야 하고 몇 살에는 무엇을 이뤄야 한다. 그 시간표에서 앞서 있으면 안심하고 뒤처지면 불안해한다.
그 시간표가 누가 만든 것인지는 잘 묻지 않는다. 대개는 다수가 그렇게 해왔다는 것 외에 근거가 없다. 그런데 다수의 경로가 곧 모두의 적기는 아니다. 밭에 토마토가 많이 심어져 있다고 해서 양파가 토마토의 시간표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시간표는 모든 사람이 3월에 심어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실제로는 가을에 심어진 사람도 있고 늦은 봄에야 밭에 나온 사람도 있다. 겨울을 오래 건너야 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기준으로 재면 늦어 보이지만 그 사람의 시간표로 보면 정확히 제때일 수 있다.
만사에는 때가 있다는 말은 그래서 위로가 된다. 지금 거두지 못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아직 때가 아닌 것일 수 있다고.
다만 이 말에는 두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하나는 이 말이 미룸의 핑계가 되는 경우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정작 해야 할 준비를 하지 않는 것. 양파가 겨울을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기다림은 그냥 멈춤이 된다. 때가 왔을 때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신호가 와도 소용이 없다.
다른 하나는 더 조심해야 할 함정이다. 바깥의 조건 때문에 늦어진 일을 개인의 때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가지가 3월에 얼어 죽은 것은 가지의 때가 아니라 그 땅의 기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남들보다 늦게 무언가를 이뤘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시간표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놓인 땅이 더 추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회가 늦게 왔거나 길이 막혀 있었거나 남들보다 먼 길을 돌아와야 했을 수도 있다.
그때 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 추위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늦어진 이유가 땅에 있는데 씨앗에게 기다리라고만 하는 셈이다.
때를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이 어떤 땅에 심어져 있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그리고 땅이 추우면 씨앗에게 참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덮개를 씌워주는 것이 먼저다.
실제로 때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모든 것이 언젠가는 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씨를 뿌릴 시기를 놓치면 그해 농사는 그걸로 끝이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계절을 되돌릴 수는 없다.
다만 밭에는 다음 해가 있다. 계절은 돌아온다. 한 번 놓친 때가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온다.
그리고 한 작물의 때를 놓쳤다고 밭 전체의 때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봄 감자를 놓쳤으면 가을 감자가 있고, 오이 심을 시기가 지났으면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심을 수 있다. 밭에는 늘 지금 심기 좋은 무언가가 있다.
때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 때 물어볼 것은 그래서 두 가지다. 이것은 다음 해에 다시 오는가. 그리고 지금 이 땅에 맞는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흙을 고르고 거름을 넣고 지난해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적어두는 것. 다음 때가 왔을 때 더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눈을 기르는 것.
농사를 오래 지은 사람들이 때를 잘 아는 이유는 많이 놓쳐봤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심어서 얼려보고 너무 늦게 거둬서 썩혀보고. 그 실패들이 쌓여서 땅을 읽는 감각이 된다.
그리고 그 감각은 혼자 쌓은 것만이 아니다. 옆 밭 사람이 언제 심는지 보고, 지난해 서리가 언제 왔는지 이웃과 이야기하고, 어른들에게 물어본다. 때를 읽는 눈은 대개 여러 사람의 실패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그러니 처음 밭을 일구는 사람이 혼자 모든 때를 맞히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어볼 사람이 곁에 있느냐가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든다.
때를 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놓치면서 배우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10월 초, 한로를 하루 앞둔 날이다.
목록대로라면 양파와 파는 이미 심었을 시기다. 우리 땅에서는 조금 더 있다가, 가을이 깊어질 무렵 양파 모종을 낸다. 마늘도 이 무렵 땅에 들어간다.
다른 채소들이 거의 다 거둬지고 밭이 비어가는 계절에 이것들은 시작한다. 모두가 끝내는 시기에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겨울 동안 땅속에서 뿌리를 내린다.
빈 밭에 모종을 꽂는 일은 조금 쓸쓸하다. 주변에 함께 자라는 것이 없다. 다들 한 해를 마무리하는데 혼자 시작한다. 이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런데 그 쓸쓸함은 때가 틀렸다는 신호가 아니다. 그저 다른 작물들과 박자가 다르다는 것뿐이다. 양파는 원래 혼자 겨울을 건너도록 되어 있다.
어쩌면 남들과 다른 때에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다들 거둘 때 혼자 심고 있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이 실제로 잘못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내년 늦봄, 다른 밭들이 이제 막 모종을 내놓을 무렵에 양파는 굵은 알을 들고 땅 위로 올라온다.
남들이 거둘 때 심는다고 해서 늦은 것이 아니다. 남들이 심을 때 거둔다고 해서 유난히 빠른 것도 아니다.
그저 각자에게 맞는 때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때는 달력이 아니라 땅이 알려준다.
남은 일은 그 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손으로 흙을 쥐어보고, 바람의 온도를 느끼고, 옆 밭 사람에게 올해는 어떠냐고 물어보는 것. 때는 그렇게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