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퍼 광고가 드러낸 두 개의 빈틈
2017년 4월, 미국에서 15초짜리 텔레비전 광고 하나가 나갔다.
버거킹 직원 옷을 입은 남자가 화면을 보며 말한다. 15초로는 와퍼의 신선한 재료를 다 설명할 수가 없다고. 그러더니 카메라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한다.
오케이 구글, 와퍼 버거가 뭐야?
그 순간 텔레비전 옆에 구글 홈을 놓아둔 집들에서 일제히 불빛이 켜졌다. 스피커들은 성실하게 대답을 시작했다. 와퍼는 버거킹이 판매하는 햄버거로, 불에 구운 소고기 패티에 토마토와 양상추와 양파와 피클을 올리고...
아무도 스피커를 부르지 않았다. 집에 있던 사람은 그냥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거실의 기계가 갑자기 햄버거 광고를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15초짜리 광고가 각 가정의 거실에서 저절로 연장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버거킹이 말 한마디로 구글을 해킹했다고 불렀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해킹이 아니었다.
어떤 암호도 뚫지 않았고 어떤 프로그램도 몰래 심지 않았다. 버거킹이 한 일은 텔레비전에서 한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한 것뿐이다. 스피커는 고장 나지 않았다. 설계된 그대로 정확히 작동했다. 오케이 구글이라는 말을 들으면 깨어나서 뒤에 오는 질문에 답하도록 만들어졌고, 그렇게 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더 서늘하다. 무언가가 망가져서 생긴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서 생긴 일이었기 때문이다.
빈틈은 기계의 오류가 아니라 설계 자체에 있었다.
흔히 해킹이라고 하면 어두운 방에서 검은 화면에 코드를 두드리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보안 사고는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시스템이 정한 규칙을 그대로 따르면서 규칙을 만든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쓰는 것. 문을 부수는 대신 열쇠가 어디 걸려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
설계자들은 대개 기계를 쓰는 사람을 한 명으로 상상한다. 거실에 앉아 스피커를 부르는 집주인. 그 상상 바깥에 있는 사람, 이를테면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말을 거는 낯선 사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빈틈은 늘 설계자의 상상이 끝나는 지점에 생긴다.
비슷한 일이 그해 1월에도 있었다.
텍사스의 여섯 살 아이가 부모 몰래 아마존 에코에게 말을 걸었다. 인형의 집과 쿠키를 갖고 싶다고. 알렉사는 그 말을 주문으로 받아들였고 며칠 뒤 집 앞에 커다란 상자가 도착했다.
이 이야기는 귀여운 해프닝으로 뉴스를 탔다. 그런데 샌디에이고의 한 지역 방송에서 진행자가 이 소식을 전하며 아이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알렉사가 나한테 인형의 집을 주문해줬다고 말하는 그 아이가 너무 귀엽다고.
방송이 나간 뒤 시청자들의 항의가 들어왔다. 자기 집 에코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그 문장에 반응해 인형의 집을 주문하려 했다는 것이다. 몇 대가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뉴스를 전하는 목소리가 다시 뉴스를 만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했다.
이 일화는 지금도 여러 버전으로 떠돈다. 수천만 달러어치 주문을 환불해줬다는 이야기도 있고 방송을 본 집집마다 인형의 집이 배달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당시 보도를 찾아보면 그런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기가 주문을 시도했다는 항의가 있었다는 정도가 전부다.
이야기는 옮겨질수록 커진다. 귀여운 실수가 거대한 사고로 부풀고, 진행자가 아이의 말을 인용한 장면은 진행자가 직접 명령을 내린 장면으로 바뀐다. 재미있는 이야기일수록 출처를 확인하는 사람은 줄어든다. 이 칼럼이 결국 하려는 이야기도 바로 그것이다.
버거킹은 이 장면을 보고 사고가 아니라 기회를 읽었다.
첫 번째 빈틈은 이것이다. 스피커는 누가 말하는지 모른다.
사람은 목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부터 가린다. 가족의 목소리인지, 텔레비전 속 배우의 목소리인지, 창밖 지나가는 사람의 목소리인지. 같은 문장이라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초기의 스피커에게는 그런 구분이 없었다. 정해진 호출어만 들리면 그 소리가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든 라디오든 옆집 아이든 상관없었다. 호출어는 말하자면 누구나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비밀번호였던 셈이다.
같은 해에 연구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실험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 높은 주파수에 명령을 실어 음성 비서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집주인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기계는 명령을 받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계가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실 사람도 비슷한 실수를 한다. 전화 너머로 은행 직원이라고 말하는 목소리, 문자로 온 택배 기사의 안내. 그럴듯한 형식만 갖추면 우리도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고 따른다. 호출어 대신 익숙한 말투가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후 회사들은 빈틈을 하나씩 메워나갔다. 등록된 사람의 목소리만 알아듣게 하고, 결제 전에 한 번 더 확인을 받고, 자사 광고에 쓰인 소리는 미리 지문처럼 등록해두어 반응하지 않게 했다. 구글도 와퍼 광고가 나가고 몇 시간 만에 그 질문에 반응하지 않도록 막았다.
다만 버거킹은 이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 미리 만들어둔 다른 버전의 광고를 이어서 내보냈고, 스피커들은 다시 대답을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원래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잘 이야기되지 않는 두 번째 빈틈이 있다.
스피커는 그 대답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위키백과였다. 구글 홈은 와퍼에 대한 위키백과 문서의 첫머리를 그대로 읽어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광고가 나가기 전, 그 위키백과 문서가 수정된 기록이 있었다. 재료를 나열하는 문장이 광고 문구처럼 매끄럽게 바뀌어 있었고, 버거킹 쪽에서 손을 댄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이 나왔다. 위키백과 편집자들은 이것이 광고를 금지하는 규정에 어긋난다며 되돌렸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광고 소식이 퍼지자 이번에는 장난을 치려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와퍼가 몸에 해로운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식의 엉터리 문장이 문서에 끼워 넣어졌고, 그 시간에 와퍼를 물어본 사람들의 거실에서는 스피커가 그 문장을 차분한 목소리로 읽었다.
스피커는 문장이 언제 누가 쓴 것인지 몰랐다. 그냥 거기 적힌 대로 읽었다.
위키백과가 누구나 고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 그곳의 원리다. 수많은 사람이 조금씩 고치고 서로의 실수를 바로잡으면서 문서가 나아진다. 장난스러운 수정은 대개 몇 분, 길어야 몇 시간 안에 되돌려진다. 이 체계는 시간을 두고 보면 놀랍도록 잘 작동한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위키백과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고쳐나가는 문서인데, 스피커는 그 문서의 한 순간을 잘라서 읽었다. 하필 엉뚱한 문장이 들어가 있던 그 몇 분에 물어본 사람에게는 그 문장이 정답이 되었다.
화면으로 위키백과를 보는 사람은 문서 상단의 경고문이나 편집 기록을 볼 수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스피커로 듣는 사람에게는 그런 냄새가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사건에서 정말로 뚫린 곳은 구글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뚫린 것은 정보가 사람에게 도착하는 길이었다.
화면으로 검색할 때를 떠올려보자. 결과가 여러 개 뜬다. 맨 위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어느 사이트인지, 광고 표시가 붙었는지가 보인다. 마음에 걸리면 두 번째 결과를 눌러볼 수 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출처를 보고 비교하고 고른다.
스피커에게 물으면 이 과정이 사라진다. 답은 하나뿐이다. 그 답이 어디서 왔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하나의 답은 늘 같은 목소리, 침착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전달된다. 백과사전의 문장이든 누군가 오 분 전에 끼워 넣은 장난이든 똑같은 목소리다.
목소리에는 출처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은 목소리로 들은 정보를 글로 읽은 정보보다 더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직접 말해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람에게 정보를 말로 전해준 것은 대개 믿을 만한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부모, 선생님, 이웃. 그 오래된 감각이 기계의 목소리 앞에서도 작동한다.
그래서 음성 비서의 답은 같은 내용이 화면에 떠 있을 때보다 더 권위 있게 들린다. 질문에 대답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느낌이 의심을 누그러뜨린다.
정보를 판단하는 힘은 대개 이런 단서들에서 나온다. 누가 썼는가, 언제 썼는가, 다른 곳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이것을 따져보는 능력을 정보 리터러시라고 부르는데, 그 능력은 단서가 주어져야 작동한다. 단서를 지운 채로 답만 건네면 아무리 신중한 사람도 판단할 재료가 없다.
이 문제가 더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음성 비서를 가장 요긴하게 쓰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보면 그렇다. 작은 글씨를 읽기 어려운 노인, 화면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손을 쓰기 어려운 사람들. 이들에게 말로 묻고 말로 듣는 기계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그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것에 가깝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스피커가 건네는 단 하나의 답을 다른 경로로 확인하기가 가장 어렵다. 화면을 띄워서 출처를 확인하는 일이 남들보다 몇 배의 수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편리함과 취약함이 같은 사람에게 동시에 떨어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음성 비서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기술이 열어준 문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오는지를 더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다. 답의 출처를 함께 말해주는 것,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소리로도 열어두는 것. 그런 작은 설계가 누군가에게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른다.
접근성이라는 말은 흔히 들어갈 수 있느냐의 문제로만 이해된다. 경사로가 있는지, 화면을 읽어주는지, 버튼에 이름이 붙어 있는지. 그런데 들어간 다음도 중요하다. 들어간 곳에서 무엇을 믿어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는가. 같은 정보에 닿더라도 그것을 따져볼 단서까지 함께 닿아야 비로소 동등한 접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버거킹의 광고는 그해 칸 국제광고제에서 다이렉트 부문 그랑프리를 받았다. 광고업계는 기술의 빈틈을 한 문장으로 꿰뚫은 발상에 박수를 쳤다.
같은 광고를 위키백과 편집자들은 다르게 봤다. 그들에게 이것은 공공의 지식 공간을 홍보 문구로 채우려 한 시도였다. 한쪽에서는 최고의 아이디어였고 다른 쪽에서는 치워야 할 낙서였다.
광고 쪽에서 내세운 성과도 컸다. 돈을 들이지 않고 언론에 오르내린 효과만 해도 엄청났다고 한다. 버거킹 역사상 가장 많이 회자된 광고라는 평가도 따라붙었다. 반면 이 광고 덕분에 구글의 스피커가 더 팔렸다는 식의 이야기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구글은 이 광고에 협조하지 않았고 오히려 몇 시간 만에 막아섰다.
두 평가가 다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광고는 정말 영리했다. 그리고 그 영리함은 다른 사람들이 공들여 쌓은 신뢰 위에서만 작동했다. 사람들이 위키백과를 믿고, 구글의 목소리를 믿고, 거실의 스피커를 믿기 때문에 그 한 문장이 힘을 가졌다.
빌려 쓴 신뢰는 결국 누군가 갚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는 그 비용을 위키백과 편집자들과 엉뚱한 문장을 들은 사람들이 나눠서 냈다.
원래 이 이야기는 이런 교훈으로 끝나곤 한다. 기술에는 개발 의도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쓸지는 사용자의 몫이라고.
맞는 말이다. 다만 한 가지를 짚고 싶다. 이 사건에서 기술을 쓴 사람은 누구였는가.
스피커를 산 사람은 거실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스피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은 주인이 아니라 버거킹이었다. 주인은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그냥 텔레비전을 켜놓았을 뿐이다.
그러니 이 사건이 보여준 것은 사용자가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사용자의 자리에 슬쩍 앉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내 집의 기계가 내 말이 아닌 말에 먼저 반응할 수 있다는 것.
물론 그날 버거킹이 시킨 일은 햄버거 설명을 읽는 것뿐이었다. 해가 될 일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웃고 넘어갔다.
그런데 같은 방식으로 다른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건을 주문하라거나 문을 열라거나 불을 끄라거나. 인형의 집 사건은 이미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웃음이 나는 이유는 이번에는 다행히 햄버거였기 때문이다.
좋은 장난은 때로 가장 정확한 경고가 된다. 버거킹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광고는 수많은 사람에게 자기 거실의 기계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곁의 음성 비서들은 그때보다 훨씬 똑똑해졌다. 목소리를 구분하고, 광고를 걸러내고, 여러 출처를 종합해 더 매끄러운 답을 만든다.
그런데 답이 매끄러워질수록 그 답이 어디서 왔는지는 더 보이지 않게 된다. 여러 곳의 문장을 녹여 만든 한 문단의 대답에는 이음매가 없다. 2017년의 스피커는 적어도 한 군데에서 읽어왔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위키백과를 열어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음매가 없다는 것은 편리하다. 여러 페이지를 오가며 비교할 필요 없이 한 번에 정리된 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음매는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느 문장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라가볼 수 있는 실마리. 그것이 매끄럽게 지워질수록 답은 더 믿음직하게 들리고 실제로는 더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기계는 이제 누가 말하는지를 꽤 잘 구분한다. 남은 질문은 반대 방향이다. 우리는 그 대답을 누가 썼는지 구분할 수 있는가.
다음번에 스피커에게 무언가를 물을 때, 대답을 다 들은 뒤 한 번만 더 물어보면 좋겠다.
그런데 그거 어디서 나온 얘기야?
기계가 아직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그 사실 자체가 꽤 중요한 정보다.
그날 거실의 스피커는 누구의 말을 듣는지 묻지 못했다. 그 질문은 결국 사람이 대신 던져야 했다. 대답을 듣는 쪽에서 이 말은 누가 한 말인가를 묻는 것.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질문만큼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