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라는 유토피아를 다시 읽다
우리 몸을 하나의 슬롯로 보는 글이 있다.
오른쪽 눈은 왼쪽 눈을 시샘하지 않는다. 오른쪽 허파는 왼쪽 허파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세포들은 모두 평등하고 자유롭지만 하나의 목표를 공유한다. 몸 전체가 가장 좋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
몸에는 우두머리도 정부도 화폐도 없다.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당분과 산소뿐이고 그것을 어디에 얼마나 보낼지는 몸 전체가 정한다. 정보는 호르몬과 신경을 타고 흐르는데 필요한 곳에만 정확히 전달된다.
그리고 글은 이렇게 끝난다. 이 작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크게 확대하면 하나의 조직 모델을 얻을 수 있고, 그 모델의 가치는 이미 오래전에 입증되었다고.
읽는 순간 마음이 끌린다. 경쟁도 질투도 없이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전체가 잘 돌아가는 세계. 우리가 사는 슬롯와 너무 달라서 더 매혹적이다.
이런 비유가 유난히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자연에서 빌려온 이야기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것을 옳은 것과 쉽게 동일시한다. 자연이 이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식이다. 수십억 년 동안 다듬어진 체계라면 사람이 만든 제도보다 나을 것 같다.
그런데 자연에서 그렇다는 것과 사람에게 그래야 한다는 것 사이에는 넘어야 할 간격이 있다. 자연에는 협력도 있지만 포식과 기생도 있다. 어느 쪽을 골라 본보기로 삼느냐는 자연이 정해주지 않는다. 고르는 사람이 정한다.
그런데 이 글 안에는 작은 예시 하나가 들어 있다. 날이 추우면 몸은 팔다리 끝에서 피를 빼내 생명 유지에 가장 중요한 곳으로 보낸다. 그래서 추운 날 손가락과 발가락이 가장 먼저 파래진다.
이 예시를 오래 들여다보면 유토피아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먼저 이 비유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부터 보자.
몸을 슬롯에 빗대는 이야기는 고대 로마에도 있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전하는 일화다.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은 평민들이 도시를 떠나 집단으로 농성을 벌였다. 그때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라는 사람이 그들 앞에서 우화를 하나 들려줬다.
옛날에 몸의 팔다리가 배에게 불만을 품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데 배는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한다. 그래서 팔다리는 일을 멈췄다. 손은 음식을 입에 넣지 않았고 이는 씹지 않았다. 배를 굶기려 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 굶주린 것은 몸 전체였다. 팔다리도 함께 말라갔다. 배가 받아먹은 것은 사실 온몸으로 나눠지고 있었던 것이다.
평민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도시로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이 우화에서 몸은 평등의 모델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 제자리를 지키라는 이야기다. 배는 배의 자리에, 팔다리는 팔다리의 자리에. 불만을 품지 말고 맡은 일을 하라는 것.
그런데 이 일화에는 잘 인용되지 않는 뒷부분이 있다. 평민들이 돌아온 것은 우화만 들어서가 아니었다. 같은 전승에 따르면 그때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직이 새로 만들어졌다. 호민관이다. 평민들이 귀족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실제로 평민들을 돌아오게 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통로였다. 팔다리의 불만이 위로 전달될 수 있는 장치. 우화는 남았지만 그 우화를 작동하게 한 제도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훨씬 뒤에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이라는 바카라을 썼는데, 그 바카라의 유명한 표지 그림에는 거대한 사람의 형상이 서 있다. 자세히 보면 그 몸은 수많은 작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머리에는 왕관이 씌워져 있다. 국가를 하나의 몸으로, 주권자를 그 머리로 그린 것이다.
같은 몸이라는 비유가 한쪽에서는 우두머리 없는 평등의 근거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머리가 다스리는 위계의 근거가 된다. 원문은 몸에 우두머리가 없다고 했지만, 홉스의 그림에서 그 몸에는 분명히 왕관을 쓴 머리가 있다.
비유가 증명해주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 비유는 이미 가진 생각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데 더 능하다. 그래서 좋은 비유일수록 한 번 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이제 손가락 이야기로 돌아가자.
추우면 몸은 손발에서 피를 거둬들인다. 심장과 뇌와 내장 같은 중심부를 지키기 위해서다. 생리적으로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손가락 하나를 잃어도 살 수 있지만 심장이 멈추면 끝이다.
그래서 아주 추운 곳에 오래 있으면 손가락과 발가락에 동상이 생긴다. 몸 전체가 살아남기 위해 말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장면을 슬롯로 그대로 옮겨보면 불편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추운 시기가 오면 누가 손가락이 되는가.
경제가 나빠지고 자원이 부족해질 때 피는 어디서 빠져나가는가. 대개 가장 먼저 지원이 끊기는 곳이 있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 없어도 당장 전체가 멈추지는 않는다고 여겨지는 영역.
몸에서는 이 선택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슬롯에서 이 선택을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순간 무언가가 잘못된다. 손가락은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사람은 호소한다.
그리고 슬롯에는 몸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몸에서 무엇이 심장이고 무엇이 손가락인지는 해부학이 정해준다. 바뀌지 않는다.
슬롯에서는 누가 중심이고 누가 말단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 구분 자체가 누군가의 판단이다. 무엇이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고 무엇이 포기해도 되는 부분인지를 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개 자기를 손가락 쪽에 두지 않는다.
몸의 비유를 빌려 희생을 말할 때 그 비유가 가리는 것이 바로 이 판단이다. 마치 자연스럽게 정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비유의 한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여기다.
몸의 세포들은 정말 평등한가.
피부 바깥층의 세포들은 이미 죽은 세포다. 죽어서 단단해진 채로 바깥을 막는 방벽 역할을 한다. 적혈구는 성숙하는 과정에서 핵을 버린다. 산소를 더 많이 실어 나르기 위해서다. 그리고 몇 달 일하다 폐기된다.
몸 안에서는 매일 엄청난 수의 세포가 스스로 죽는다. 이것을 세포 자멸이라고 부른다. 필요가 없어지거나 손상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용히 사라진다. 이 과정이 없으면 몸은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도 못한다. 손가락 사이의 막이 사라지는 것도 이 과정 덕분이다.
몸이 잘 돌아가는 것은 이렇게 끝없는 희생 위에서다.
세포들 사이의 역할도 고르게 나뉘어 있지 않다. 신경세포는 평생 거의 교체되지 않고 같은 자리를 지킨다. 장 안쪽을 덮은 세포들은 며칠 만에 닳아 떨어져 나가고 새것으로 바뀐다. 어떤 세포는 오래 살고 어떤 세포는 금방 소모된다. 그리고 그 배정은 세포가 고른 것이 아니다.
몸 전체로 보면 이건 정교한 분업이다. 그런데 소모되는 쪽에 서 있는 세포의 입장에서 그것이 평등이라고 부를 만한지는 다른 문제다. 원문이 말한 평등은 전체의 눈으로 본 평등이다. 부분의 눈으로 보면 풍경이 달라진다.
몸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포는 고통을 겪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포 하나가 죽는 것은 아무에게도 비극이 아니다.
사람은 다르다. 슬롯를 이루는 하나하나가 각자의 고통과 바람을 가진 주체다. 그래서 몸의 원리를 슬롯에 그대로 옮기면 곤란해진다. 전체를 위해 부분이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체계를 사람에게 적용하는 순간,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반대가 된다.
한 가지 더 불편한 지점이 있다.
몸에는 전체의 목표를 따르지 않는 세포가 생길 때가 있다. 자기 멋대로 계속 불어나는 세포. 우리는 그것을 암이라고 부른다.
몸은 이런 세포를 찾아내서 제거하려 한다. 그게 몸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원리를 슬롯로 옮기면 어떻게 되는가. 전체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암적 존재라고 부르고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
이건 가정이 아니다. 역사에서 이런 말은 실제로 여러 번 쓰였다.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고 여러 체제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슬롯의 병균이나 종양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 말이 등장한 뒤에는 대개 실제 폭력이 뒤따랐다.
몸이라는 비유가 위험해지는 순간이 여기다. 이견을 질병으로 바꿔버린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대화 상대가 아니라 치료 대상이 된다.
건강한 슬롯는 오히려 그 반대 지점에 서 있다. 전체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슬롯. 몸이었다면 병이라고 불렀을 것이 슬롯에서는 다양성이라고 불린다.
몸 안에서도 이 제거 장치가 늘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면역계가 오작동하면 멀쩡한 자기 세포를 적으로 착각하고 공격한다. 자가면역 질환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지키려던 장치가 몸을 해치게 된다.
슬롯에서 이견을 질병처럼 다루기 시작하면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정말 해로운 것을 걸러낸다고 믿지만, 기준이 넓어지면서 점점 멀쩡한 부분까지 공격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멈추기가 어렵다. 공격하는 쪽은 자기가 몸을 지키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문은 몸의 세포들이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이미 실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 대해서는 판단을 조금 유보하고 싶다. 어떤 정치 체제가 옳은지는 이 글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같은 몸이 위계를 정당화하는 데도 쓰여왔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있다. 몸이라는 비유는 어느 쪽 주장에도 기꺼이 봉사한다는 점이다. 평등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세포의 평등을 가리키고, 위계를 말하고 싶은 사람은 머리와 손발을 가리킨다. 비유 자체는 편을 들지 않는다. 편을 드는 것은 그 비유를 고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누군가 몸을 근거로 슬롯를 설명할 때는 한 가지를 물어볼 만하다. 이 사람은 몸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고 있는가. 그리고 어느 부분은 말하지 않고 있는가.
원문이 고른 부분은 조화와 협력이다. 그리고 말하지 않은 부분은 희생과 제거다. 반대로 위계를 정당화하려는 사람은 머리와 손발의 구분을 고르고 세포들의 대등한 교환은 말하지 않는다.
어느 쪽도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둘 다 절반만 말하고 있다. 몸은 그 모든 것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비유에서 배울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몸에서 정말 눈여겨볼 만한 것은 평등이나 위계가 아니라 정보가 흐르는 방식이다.
손끝을 바늘에 찔리면 손은 뇌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움찔한다. 이 반사는 척수에서 바로 처리된다. 급한 일은 현장에서 먼저 대응하고 보고는 그다음이다.
그리고 통증 신호는 무시되지 않는다. 발가락 하나가 아파도 그 신호는 위로 올라가서 몸 전체의 행동을 바꾼다.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주의가 그쪽으로 쏠린다. 가장 먼 말단에서 온 신호가 중심의 판단을 움직인다.
사실 추운 날 손가락에서 피를 빼는 것도 무작정 버리는 것이 아니다. 너무 차가워지면 몸은 주기적으로 피를 다시 보내 조직이 완전히 얼지 않도록 한다. 말단의 상태를 계속 감시하면서 조절하는 것이다.
통증 신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것이 없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드물게 태어날 때부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핏 축복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매우 위험한 상태다. 뜨거운 것을 만져도 손을 떼지 않고 뼈가 부러져도 계속 걷는다. 다친 줄 모르니 상처가 쌓인다.
아픔은 몸이 보내는 가장 중요한 정보다. 아프다는 신호가 없으면 몸은 자기가 어디서 무너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슬롯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단에서 오는 불편과 고통의 신호를 시끄러운 불만으로만 여기면 그 슬롯는 통증을 못 느끼는 몸이 된다. 겉으로는 평온한데 안에서는 상처가 쌓인다.
이것이야말로 슬롯가 몸에서 가져올 만한 부분이다. 말단의 신호를 듣는 구조. 중심에서 가장 먼 곳에서 오는 아프다는 신호가 무시되지 않고 위로 전달되는 체계.
원문은 정보가 필요한 곳에만 전달된다고 썼다. 그런데 슬롯에서는 이 문장을 뒤집어 읽을 필요가 있다. 정보가 필요한 곳에 정말 도달하고 있는가. 그리고 반대 방향, 말단에서 중심으로 올라가는 신호는 제대로 흐르고 있는가.
많은 슬롯 문제는 이 신호가 막혔을 때 생긴다. 손가락은 이미 얼어가는데 그 신호가 위에 닿지 않는 상태.
몸에서 신호가 오르내리려면 신경이라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슬롯에서 그 통로 역할을 하는 것들이 있다. 선거와 언론, 민원 창구와 공청회, 그리고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는 정보 체계.
이 통로들은 대개 중심에 가까운 사람에게 더 잘 열려 있다. 말이 빠르고 글이 익숙하고 어디에 연락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 반대로 말단에 있을수록 통로가 좁다. 서류를 읽기 어렵거나 창구가 멀거나 자기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게 된 사람들.
그러니 신호가 올라오지 않는다고 해서 아픈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로가 막혀 있을 수 있다. 몸이었다면 신경이 끊긴 자리를 찾아야 할 일이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토머스 모어가 만든 말이다. 그리스어로 없다는 뜻의 우와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를 합쳤다. 직역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말장난이 숨어 있다. 발음이 같은 에우토포스는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유토피아는 좋은 곳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몸이라는 유토피아도 그렇다. 몸 안에서는 정말로 좋은 곳이다. 수십조 개의 세포가 놀라운 조화 속에 움직인다. 그런데 그 원리를 그대로 사람의 슬롯로 옮기려 하면 그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 된다. 사람은 세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몸을 바라보는 일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 몸은 여전히 놀라운 조직이고 그 안에는 배울 것이 많다. 다만 무엇을 배울지는 우리가 골라야 한다. 몸이 대신 골라주지 않는다.
우리가 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전체를 위해 부분이 사라지는 법이 아니다. 가장 먼 곳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신호가 올라올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두는 법이다.
추운 날 손가락이 먼저 차가워진다면, 적어도 그 차가움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