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속 개구리가 알려주는 것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 남자가 병원에 왔다. 운두가 높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 모자를 벗자 의사는 깜짝 놀랐다. 남자의 머리 위에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개구리는 그냥 올라앉은 것이 아니라 살갗에 완전히 붙어 있었다.
의사가 물었다. 이게 붙어 있은 지 오래됐습니까.
그러자 남자가 아니라 개구리가 대답했다.
참 희한한 일이지요, 선생님. 처음엔 제 발밑에 난 작은 종기였는데 이렇게나 커졌습니다.
이 농담이 웃긴 순간은 정확히 한 군데다. 개구리가 입을 여는 순간.
그 직전까지 우리는 이야기를 한 방향으로만 읽고 있었다. 환자는 남자고 문제는 개구리다. 남자가 병원에 왔고 남자가 모자를 벗었고 남자의 머리에 이상한 것이 붙어 있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개구리의 한 문장이 이 구도를 통째로 뒤집는다. 환자는 개구리였다. 그리고 남자는 개구리 발밑에 생긴 종기였다.
같은 장면인데 주어가 바뀌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붙어 있는 것과 붙어 있음을 당한 것이 자리를 바꾼다.
우리가 웃는 것은 그 뒤집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 때문이기도 하다.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전제를 들킨 순간의 머쓱함.
생각해보면 농담은 우리를 속인 적이 없다. 남자가 주인공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개구리가 문제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저 남자가 병원에 왔다고 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우리가 채웠다.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말을 하는 쪽, 움직이는 쪽, 사람인 쪽을 중심에 둔다. 이건 게으름이 아니라 효율이다. 매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들으면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다.
다만 효율에는 대가가 있다. 한번 정한 중심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 뒤에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그 중심을 기준으로 정리된다. 개구리가 입을 열기 전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이유다.
이 농담에는 숨은 장치가 하나 더 있다. 의사의 질문이다.
이게 붙어 있은 지 오래됐습니까.
이 질문은 중립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이미 답의 틀을 정해두고 있다. 이것, 즉 개구리가 붙은 것이고 질문을 받는 사람, 즉 남자가 붙임을 당한 쪽이라는 전제.
개구리는 그 틀을 그대로 받아서 거꾸로 돌려줬다. 질문의 문장 구조는 그대로 두고 지시 대상만 바꿨다. 그래서 대답이 더 웃기다. 의사의 질문에 정확히 답하면서도 의사가 상상한 세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에도 대개 이런 전제가 숨어 있다. 무엇을 문제로 볼지, 누구를 주체로 볼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지. 질문이 나오는 순간 이미 관점 하나가 선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선택이었다는 것이 잊힌다.
일상에서도 이런 질문은 흔하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이 질문은 이미 문제가 듣는 사람에게 있다고 정해두고 있다. 같은 상황을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내 말이 왜 그렇게 아프게 들렸을까. 이 질문은 문제를 말한 쪽과 들은 쪽 사이에 놓는다.
설문조사를 설계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안다. 같은 내용을 묻더라도 문항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응답이 달라진다. 어떤 단어를 쓰는지, 어느 쪽을 먼저 제시하는지, 무엇을 당연한 것으로 깔고 묻는지. 질문이 대답을 상당 부분 만들어낸다.
그래서 좋은 조사는 질문 자체를 의심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문항은 무엇을 이미 가정하고 있는가. 그 가정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의사가 이 훈련을 받았다면 아마 질문을 이렇게 바꿨을 것이다. 두 분 중 어느 쪽이 불편하신가요.
역사에서 가장 큰 개구리의 대답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근거도 분명했다.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고 저녁이면 서쪽으로 진다. 땅은 움직이지 않는다.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질문의 주어를 바꿔봤다. 해가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는 것이라면.
처음에 이 생각은 터무니없게 들렸다. 발밑이 단단한데 우리가 돌고 있다니. 머리 위의 개구리가 사실은 주인이고 나는 종기라는 말만큼이나 이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관점에서 보니 설명되지 않던 것들이 설명되기 시작했다. 행성들이 가끔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계절이 바뀌는 이유. 주어를 바꾸자 복잡하던 그림이 단순해졌다.
중심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항이 컸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감각이었다. 눈으로 보면 해가 움직이고 발로 느끼면 땅이 멈춰 있다. 새 관점은 감각을 거슬렀다.
다른 하나는 위안이었다. 우주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는 그림은 편안했다.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돌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은 사실을 수정하는 일인 동시에 자기 위치를 수정하는 일이었다.
관점을 바꾸기 어려운 이유는 대개 이 두 가지가 겹치기 때문이다. 지금의 관점이 감각에 맞고 동시에 나를 편하게 해준다면 그것을 내려놓기는 몹시 어렵다.
비슷한 구조의 질문을 요즘에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인류가 밀을 길들였는가, 밀이 인류를 길들였는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대중적으로 알린 도발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농업을 인간이 식물을 통제하게 된 사건으로 배운다. 그런데 밀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동의 작은 풀이던 밀은 불과 몇천 년 만에 지구 곳곳으로 퍼졌다. 인간은 밀을 위해 땅을 갈고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누가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개구리가 대답한다면 아마 밀 쪽일 것이다.
이 해석이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같은 사건을 다른 쪽에서 보면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사이의 오래된 농담도 같은 구조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스스로를 집사라고 부른다. 밥을 차리고 화장실을 치우고 기분을 살핀다. 누가 주인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 농담이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 관점이 뒤집혔을 때 오히려 관계의 실상이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이라는 말로는 담기지 않던 수고와 정성이 집사라는 말로는 담긴다.
관점 전환이 늘 심각한 깨달음일 필요는 없다. 이렇게 웃으면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웃으면서 일어난 전환이 오히려 오래 남는다. 머쓱함보다 즐거움이 먼저 오기 때문이다.
이 질문이 농담에서 끝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장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오랫동안 장애는 몸에 붙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 눈이 보이지 않는 것, 귀가 들리지 않는 것. 문제는 그 사람의 몸에 있고 그래서 해결도 그 사람을 고치는 쪽에서 찾았다. 이것을 흔히 의료적 관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있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건물 앞에 서 있다. 입구에는 계단만 있다. 이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서인가, 경사로가 없어서인가.
같은 장면에서 문제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가 바뀐다. 다리에 붙어 있는가, 계단에 붙어 있는가.
이 두 번째 관점을 슬롯적 관점이라고 부른다. 장애가 개인의 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을 고려하지 않고 만든 환경에서 생긴다는 시각이다. 경사로가 있으면 그 건물 앞에서 장애는 사라진다. 몸은 그대로인데.
물론 이 관점이 몸의 고통이나 치료의 필요를 지우자는 것은 아니다. 두 관점은 각자 보이는 것이 있다. 다만 오랫동안 첫 번째 관점만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 당연함이 많은 것을 가리고 있었다.
문제를 사람에게서 찾는 한 해결도 사람을 바꾸는 쪽으로만 간다. 문제를 환경에서 찾기 시작하면 바꿀 수 있는 것의 목록이 갑자기 길어진다.
이 구조는 물리적인 건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웹사이트에서 필요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고 하자.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정보를 찾기 어려워한다. 그런데 주어를 바꾸면 이렇게 된다. 그 웹사이트는 화면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 읽을 수 없게 만들어져 있다. 그림에 설명이 붙어 있지 않고 버튼에 이름이 없다.
앞의 문장에서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뒤의 문장에서는 웹사이트를 고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둘 다 필요할 수 있지만 오랫동안 첫 번째 결론만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정보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말은 대개 사람을 주어로 쓰인다. 그런데 정보가 그 사람에게 닿지 못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쓸 수도 있다. 같은 사실을 두고 어느 쪽 문장을 쓰느냐가 무엇을 바꿀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관점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문장의 주어를 바꿔보는 것이다.
학생이 수업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문장을 수업이 학생에게 닿지 못한다로 바꿔본다. 손님이 메뉴를 고르지 못한다를 메뉴가 손님에게 읽히지 않는다로 바꿔본다. 신입이 적응하지 못한다를 조직이 신입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로 바꿔본다.
내용은 같은데 바카라임이 놓이는 자리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따라 떠오르는 해결바카라이 달라진다.
이 연습이 늘 새로운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원래 문장이 더 정확하다. 다만 한 번 뒤집어보면 원래 문장이 정말 정확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뒤집어보지 않으면 그것을 확인할 기회조차 없다.
주어를 아예 지워버리는 문장도 조심할 만하다. 실수가 있었습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착오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문장에는 누가 무엇을 했는지가 빠져 있다. 사건은 있는데 행위자가 없다.
이런 문장은 대개 의도적으로 쓰인다. 주어를 밝히면 바카라임이 어디로 가는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어를 지우면 문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붙이지 않았는데 개구리가 붙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 문장을 읽을 때 주어가 비어 있으면 한 번쯤 물어볼 만하다. 여기 누가 빠져 있는가.
현장에서 사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오래 다듬어온 태도도 이와 닮았다. 바깥에서 붙인 이름으로 그 사람들을 설명하기 전에, 그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어떤 말로 부르는지를 먼저 듣는 것. 연구자가 보기에 문제인 것이 당사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의사라면 당사자는 개구리다. 질문을 던지기 전에 대답할 기회를 먼저 줘야 한다.
실제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바깥에서 보기에 불편하고 힘들어 보이는 삶이 당사자에게는 나름의 리듬과 질서를 가진 일상인 경우가 있다. 반대로 바깥에서 보기에 사소한 것이 당사자에게는 하루를 좌우하는 문제인 경우도 있다.
바깥의 관점으로만 보면 첫 번째는 과장하고 두 번째는 놓친다. 그 사람의 자리에서 들어봐야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가 드러난다.
다만 이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가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다.
모든 관점이 똑같이 옳다는 결론이다.
개구리에게는 개구리의 관점이 있고 남자에게는 남자의 관점이 있으니 누가 옳은지 따질 수 없다는 식의 태도. 이건 관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각을 멈추는 방법이다.
관점을 바꿔보는 목적은 아무 관점이나 같다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한쪽에서만 보던 것을 양쪽에서 보는 데 있다. 그리고 양쪽에서 본 뒤에 무엇이 더 잘 설명되는지를 따지는 데 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은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관점을 바꿔본 덕분에 발견한 사실이다. 주어를 바꾸는 것은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그러니 관점의 전환은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판단을 더 정확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반대 방향의 함정도 있다. 관점을 한 번 뒤집고 나서 뒤집힌 쪽을 새로운 정답으로 삼는 것. 개구리가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제부터는 무조건 개구리 쪽에서만 보겠다고 하는 것.
그러면 결국 또 하나의 고정된 관점이 생길 뿐이다. 이번에는 처음 것보다 더 단단하다. 스스로 깨달았다는 자부심까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관점 전환에서 남겨야 할 것은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관점이 바뀔 수 있다는 감각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하나의 자리에서 본 것이라는 자각.
다시 진료실로 돌아가보자.
의사가 개구리의 대답을 듣고 무엇을 했을지는 농담에 나오지 않는다. 아마 한동안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하다. 의사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처음 질문을 꺼낸다면, 이번에는 질문이 달라졌을 것이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부터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에게도 따로 물어봤을지 모른다. 당신은 이 상황을 어떻게 느끼시나요. 개구리의 말만 듣고 끝내면 그건 관점을 바꾼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옮겨간 것뿐이니까.
이 농담이 결국 말하는 것은 그것이다. 우리는 늘 어떤 모자를 쓰고 세상을 본다. 그 모자 아래에 무엇이 붙어 있는지, 아니 무엇에 내가 붙어 있는지는 모자를 벗어봐야 안다.
그리고 대개 모자는 남이 대신 벗겨준다. 생각이 다른 사람, 다른 자리에 선 사람, 예상하지 못한 쪽에서 대답하는 누군가가.
혼자서 자기 모자를 벗기는 어렵다.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쓴 모자는 머리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리킬 때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른다. 모자라니, 이건 그냥 내 머리인데.
그러니 누군가 예상하지 못한 쪽에서 말을 걸어올 때 그것을 반가워할 이유가 있다. 그 사람은 지금 내 모자의 챙을 살짝 들어 올려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순간의 머쓱함이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머쓱함은 웃음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 있다. 개구리의 대답에 웃었던 것처럼, 내 전제가 뒤집힌 순간에도 웃을 수 있다면.
그때는 세상이 조금 더 넓게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