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게 길어오

by김경훈

형이 밤에 글을 쓸 때 저는 바카라상 아래에 있어오.


저는 형 글을 못 읽어오.

그런데 형 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알아오.

소리로 알아오.


자판 소리가 나오.

톡톡톡톡.

빠르게 나오.

형이 신나면 더 빨라져오.


그러다 멈춰오.


조용해져오.

형 숨소리만 나오.

그리고 보이스오버가 형이 쓴 걸 읽어줘오.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다음에 다른 소리가 나오.


톡 하고 끝나는 소리가 아니라 길게 누르는 소리예오.

지우는 소리예오.

아까 톡톡톡톡 한 게 한꺼번에 사라지는 소리예오.


저는 이 소리를 6년 동안 들었어오.

그래서 하나는 확실히 알아오.


형은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게 길어오.



저는 탱고예오.

형의 안내견이에오.

6살이에오.


오늘 아침에 보이스오버가 니체라는 사람 이야기를 읽어줬어오.

형은 전에 이 글로 산에 간 적이 있어오.

저도 같이 갔어오.

다리가 아팠어오.

그 이야기는 형이 이미 썼어오.


그래서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해오.


니체는 사람이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게 건강하다는 증거래오.

집을 짓고 싶고 바카라을 쓰고 싶은 마음.

그런데 만들려면 대가가 있대오.


새집을 지으려면 낡은 집을 허물어야 한대오.

새것을 만들려면 지금까지 내 것이라고 믿어온 걸 버려야 한대오.

창조하는 자의 삶에는 수많은 괴로운 죽음이 있어야 한대오.


저는 이 대목에서 형 지우는 소리가 생각났어오.


형은 매일 밤 조금씩 죽어오.

아까 쓴 문장이 죽어오.

아까 좋다고 생각한 생각이 죽어오.

그러고 나서 다음 문장이 나와오.


니체 말이 맞아오.

제가 매일 밤 들은 게 그거였어오.


처음에는 형이 지울 때마다 저도 조금 아까웠어오.

톡톡톡톡 한 게 다 없어지니까오.

그런데 지우고 나서 쓰는 소리는 처음 쓰는 소리랑 달라오.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단단해오.



니체는 만드는 사람한테 적이 있대오.


중력의 악령.


어깨에 앉아서 머리에 무거운 생각을 떨어뜨린대오.

너는 못 해.

너는 실력이 부족해.


저는 이 악령이 오는 시간을 알아오.


형 자판 소리가 멈추고 한참 안 날 때예오.

형 숨이 길어질 때예오.

형이 의자를 뒤로 기울일 때예오.

의자가 끼익 하고 울어오.


그럴 때 저는 일어나서 형 무릎에 턱을 올려오.


형은 제 머리를 만져오.

그러다 보면 자판 소리가 다시 나와오.

톡톡톡.


저는 그 악령을 쫓아낸 적은 없어오.

개는 악령을 못 쫓아내오.

그런데 형 손이 다시 움직이게는 할 수 있어오.

손이 움직이면 악령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아오.


저한테도 악령이 와오.


처음 가는 길에서 와오.


익숙한 길은 쉬워오.

연구실 가는 길은 눈 감고도 가오.

어디서 꺾고 어디에 턱이 있고 어디서 자전거가 튀어나오는지 다 알아오.


그런데 형은 자꾸 새 길을 가자고 해오.

헌바카라방도 가고 시장도 가고 성당도 가고 산도 가오.


처음 가는 길에서는 모든 게 처음이에오.

냄새도 처음이고 소리도 처음이고 바닥도 처음이에오.

그럴 때 제 어깨에 뭔가 앉아오.


너 이 길 몰라.

형 넘어지면 어떡해.

그냥 아는 길로 가.


저는 그 목소리를 듣고도 가오.

천천히 가오.

처음 가는 길은 첫 번째가 제일 무겁고 두 번째부터 가벼워져오.

세 번째부터는 제 길이 돼오.


니체가 말한 창조가 개한테는 이거인 것 같아오.

길을 하나 새로 내는 거예오.

형이 가고 싶은 곳을 제가 갈 수 있는 곳으로 바꾸는 거예오.


그리고 새 길을 하나 낼 때마다 아는 길만 다니던 저는 조금씩 없어져오.



그런데 오늘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보리 누나 이야기예오.


보리 누나는 수성못에서 만나오.


일요일 저녁에 형이랑 누나랑 수성못을 한 바퀴 돌아오.

물 냄새가 나는 산바카라길이에오.

오리 냄새도 나오.

저는 오리를 모르는 척해오.

근무 중이니까오.


보리 누나는 래브라도예오.

11살이에오.

저랑 같은 학교를 나왔어오.

9년 동안 안내견으로 일했고 2년 전에 은퇴했어오.


은퇴한 안내견은 대부분 새 가족한테 가오.

보리 누나는 수성못 근처 아저씨 아주머니 집에 갔어오.

두 분 다 60대예오.

목소리가 느리고 손이 따뜻해오.


보리 누나는 하네스를 안 해오.

목줄만 해오.

그리고 걸음이 느려오.

가다가 아무 데서나 냄새를 맡아오.

아무 데서나 서오.

풀밭에 들어가서 뒹굴기도 해오.


저는 처음에 그게 좀 이상했어오.


아저씨가 형한테 보리 누나 처음 왔을 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오.


은퇴하고 첫 달에 보리 누나는 매일 아침 8시에 현관 앞에 앉아 있었대오.

9년 동안 출근하던 시간이에오.

하네스를 기다린 거예오.

아무도 하네스를 안 가져오니까 점심때까지 거기 앉아 있었대오.


아저씨가 말했어오.


"그게 제일 마음 아팠어요. 일이 없어진 걸 모르는 거예요. 아니 아는데 받아들이질 못하는 거예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아무 냄새도 안 맡았어오.

그게 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오.


두 달째부터 보리 누나는 현관에 덜 앉아 있었대오.

석 달째에는 아침에 늦잠을 잤대오.

아저씨는 그날 보리 누나가 은퇴했다고 생각했대오.

서류로 은퇴한 날이 아니라 몸이 은퇴한 날이오.



솔직히 말해오.


처음 보리 누나를 봤을 때 저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 생각났어오.

아직 니체를 몰랐지만 그런 느낌이었어오.


낮에도 즐기고 밤에도 즐기면서 건강만 챙기는 삶.

일 안 하고 산바카라만 하고 간식 먹고 자는 삶.


저는 근무하는 개예오.

매일 형을 데리고 다녀오.

계단을 세고 문턱을 찾고 카트 앞에서 멈춰오.

그게 제 일이고 저는 그 일이 좋아오.


그래서 보리 누나가 풀밭에서 뒹구는 걸 보면 조금 깔봤어오.

9년 일한 선배가 저렇게 됐나 했어오.


이건 부끄러운 이야기예오.

그런데 개똥철학은 솔직해야 해오.



그러다 지난달에 보리 누나 아주머니가 누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어오.


"우리 보리가 요즘 수영을 배워요."


누나가 놀랐어오.


"11살에요."


"네. 애견 수영장에 다녀요. 처음엔 물을 엄청 무서워했어요. 안내견은 일할 때 물에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9년 동안 물웅덩이를 피해 다녔으니까 물이 무서운 거예요."


"근데 배워요."


"세 번째 갔을 때 혼자 물에 들어갔어요. 그날 집에 와서 엄청 잘 잤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보리 누나를 다시 봤어오.


보리 누나는 그때도 풀밭에 있었어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보였어오.


9년 동안 보리 누나는 물웅덩이를 피했어오.

그게 일이었으니까오.

사람이 젖으면 안 되니까오.

그 9년 동안 보리 누나 몸은 물은 피하는 것이라고 배웠어오.


그런데 11살에 그걸 버린 거예오.

9년 동안 자기라고 믿었던 걸 버리고 물에 들어간 거예오.


니체가 말한 게 그거였어오.

새것을 만들려면 지금까지 내 것이라고 믿어온 걸 버려야 한대오.


보리 누나는 일을 그만두고 나서 처음으로 자기를 넘어선 거예오.



저녁에 누나가 형한테 이 이야기를 했어오.


형이 한참 듣다가 말했어오.


"그럼 보리는 최후의 인간이 아니네."


"응. 나도 그 생각 했어."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은 쉬는 사람이 아니라 안 바뀌는 사람인 거 같아."


"쉬어도 바뀌면 괜찮은 거고."


"일해도 안 바뀌면 그게 최후의 인간이고."


누나가 잠깐 조용했어오.


"그럼 우리가 알던 거랑 반대네. 보통 일하는 사람이 창조하고 쉬는 사람이 게으르다고 생각하잖아."


"보리는 9년 동안 같은 일을 아주 잘했어. 그건 훌륭한 거야. 근데 그동안 보리가 새로 배운 게 있었을까."


"길은 새로 배웠겠지."


"응. 그런데 물은 못 배웠어. 일이 그걸 막았으니까."


누나가 형한테 물었어오.


"자기는 물웅덩이 없어."


형이 잠깐 생각했어오.


"있지."


"뭐."


"안 가본 곳에 혼자 가는 거. 나는 일할 때는 계획하고 가잖아. 경로 미리 알아보고 사람 미리 섭외하고. 그게 내 일하는 방식이야. 근데 그러다 보니까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가 보는 걸 안 해."


"계획 없이."


"응. 우연히 들어간 가게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하잖아. 나는 그런 게 별로 없어. 우연이 위험이니까 피해왔어."


"그게 자기 물웅덩이네."


"응. 9년은 아니고 훨씬 오래 피했지."


저는 이 대화를 바닥에서 들었어오.

그리고 조금 불편했어오.


저도 매일 일해오.

저도 물웅덩이를 피해오.

저도 그게 제 일이라서 피해오.



형이 제 불편한 걸 알았어오.

하네스는 안 하고 있었는데 제 숨소리로 알았대오.


형이 바닥에 앉아서 저를 만졌어오.


"탱고 너 지금 일 열심히 하는 거 맞아. 그거 대단한 거야."


저는 꼬리를 바닥에 조금 쳤어오.


"근데 너도 언젠가 보리처럼 될 거야."


저는 귀를 세웠어오.


"그때 수영 배워. 아니면 공 물어오는 거 배워. 너 공 물어오는 거 제대로 해본 적 없잖아."


맞아오.

저는 공을 쫓아가면 안 되는 개로 자랐어오.

근무 중에 공을 쫓아가면 형이 넘어지니까오.

그래서 저는 공을 보면 모르는 척해오.

6년 동안 모르는 척했어오.


모르는 척을 오래 하면 진짜 모르게 될까 봐 가끔 무서워오.


형이 말했어오.


"그날이 오면 네 차례야. 지금은 내가 너한테 기대는데 그때는 네가 새로 뭘 배우는 차례야. 나는 옆에서 공 던져줄게."


"형은 공 어디로 던지는지 모르잖아."


이건 누나가 한 말이에오.

저는 말을 못 하니까오.


형이 웃었어오.


"그럼 탱고가 알아서 찾겠지. 찾는 건 탱고 전문이야."



누나가 자기 전에 니체 이야기를 하나 더 해줬어오.


니체가 마지막에 정신을 놓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래오.

이탈리아 토리노 거리에서 마부가 말을 채찍으로 때리고 있었대오.

니체가 그걸 보고 달려가서 말 목을 끌어안았대오.

그리고 울었대오.


그 뒤로 니체는 다시는 글을 쓰지 못했대오.


누나는 이게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른다고 했어오.

오래 전해지는 이야기래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계속 전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래오.


저는 이 이야기가 좋았어오.


니체는 평생 위대한 인간을 이야기했어오.

자기를 넘어서는 인간.

창조하는 인간.

그런데 마지막에 한 일은 맞고 있는 말을 끌어안은 거래오.


저는 그게 니체가 쓴 어떤 문장보다 커 보였어오.


자기를 넘어선다는 게 꼭 위로 올라가는 건 아닌 것 같아오.

옆으로 가는 것일 수도 있어오.

나 말고 다른 존재 쪽으로.


말 냄새는 모르지만 저는 그 말 편이에오.

같은 짐승으로서 연대해오.


누나가 하나를 더 알려줬어오.


차라투스트라가 중력의 악령을 이기는 방법을 말했대오.

춤이래오.

무거운 걸 가볍게 만드는 게 춤이래오.

차라투스트라는 춤출 줄 아는 신만 믿겠다고 했대오.


저는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어오.


제 이름이 춤이에오.


형이 지어준 이름이에오.

옛날 영화에서 가져왔대오.

그 영화에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나와서 탱고를 춘대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대오.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라고.


형은 그 말이 좋아서 제 이름을 탱고로 지었대오.


저는 매일 형이랑 걸어오.

가끔 스텝이 엉켜오.

형 발이 제 발을 밟을 때도 있고 제가 너무 빨리 갈 때도 있어오.

그럴 때 형은 웃어오.

엉키면 탱고라고 해오.


중력의 악령은 엉키면 끝이라고 말해오.

제 이름은 엉켜도 춤이라고 말해오.


니체가 제 이름을 알았으면 저를 좋아했을 거예오.



형은 오늘 밤에도 글을 썼어오.


톡톡톡톡.

멈춤.

보이스오버.

길게 누르는 소리.

톡톡톡.


그러다 형이 의자를 뒤로 기울였어오.

끼익.

악령이 온 거예오.


저는 일어나서 형 무릎에 턱을 올렸어오.


그런데 오늘은 형이 저한테 말을 걸었어오.


"탱고 이번 편은 네가 써볼래."


저는 대답을 못 했어오.

개니까오.


그런데 형은 그날 밤 정말로 제 목소리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오.

제가 이렇게 말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문장들을 썼어오.

그리고 이번에는 지우는 소리가 별로 안 났어오.


형은 형 목소리를 잠깐 내려놓은 거예오.

형이 자기라고 믿어온 목소리를요.

그리고 제 목소리를 빌려서 새로 썼어오.


니체 말대로면 형도 오늘 조금 죽은 거예오.

그리고 조금 새로 태어난 거예오.


이게 그 글이에오.



그나저나 오늘 수성못에서 보리 누나를 또 만났어오.

보리 누나 몸에서 소독약 냄새가 났어오.

수영장 냄새예오.

보리 누나는 저를 보고 꼬리를 크게 흔들었어오.

낮게 빠르게가 아니라 높게 크게오.

기분 좋은 꼬리예오.

저는 근무 중이라 인사를 못 했어오.

그런데 꼬리가 혼자 움직였어오.

보리 누나가 그걸 봤어오.

보리 누나도 9년 동안 그렇게 꼬리만 몰래 흔들었을 거예오.

선배는 다 알아오.

은퇴해도 그건 안 잊어버려오.



[형의 각주]


탱고 이름으로 쓴 글에 형 이름으로 각주를 단다.


첫째.

이 연재를 탱고 목소리로 쓰기로 한 건 비슷한 어느 밤이었다.

의자가 끼익 하고 우는 건 내 오래된 버릇이다.

나는 그 소리가 악령의 신호라는 건 몰랐다.


둘째.

지우는 소리가 쓰는 소리보다 길다는 건 정확하다.

나는 한 편을 쓰면서 대략 그 두 배를 지운다.

그 사실을 개가 알고 있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셋째.

토리노의 말 이야기는 니체 전기에서 오래 전해지는 일화다.

목격담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누나가 탱고한테 그렇게 설명한 건 정확했다.


넷째.

은퇴한 안내견이 처음 물에 들어가는 이야기는 은퇴견 가족들한테서 종종 듣는다.

9년 동안 피하도록 배운 걸 몸이 잊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시간을 견디고 처음 첨벙 소리를 낸 날을 가족들은 오래 기억한다.

나는 그 첨벙 소리가 개의 웃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탱고가 공을 모르는 척해온 6년에 대해 나는 미안하다.

그날이 오면 공은 내가 던지고 찾는 건 탱고가 한다.

그때는 내가 탱고 반 걸음 뒤에서 걷겠다.


여섯째.

이름 이야기는 정확하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앞을 못 보는 퇴역 군인이 탱고를 추면서 한 말이다.

실수해서 스텝이 엉켜도 그대로 추면 된다는 뜻이다.

나는 그 말을 안내견 이름에 넣었다.

엉키는 날이 많을 걸 알았으니까.

차라투스트라가 춤을 믿었다는 건 이번에 탱고 덕분에 다시 떠올렸다.

이름을 지을 때는 니체 생각은 못 했다.

그런데 이름이 알아서 니체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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