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머가 백 살에 남긴 대답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102세까지 살았다.
100세 생일 무렵 여러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 질문은 대개 같았다. 교수님, 백 살까지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기대한 답은 아마 식습관이나 운동이나 규칙적인 생활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매번 같은 말을 했다.
평생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려 했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고.
이 대답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그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화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대화 상대는 자기와 다른 세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장수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몸이 아니라 대화를 답으로 내놓은 사람. 기자들은 아마 조금 당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평생 작업을 알고 나면 이 대답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쉽다. 말이 잘 통하고 부딪칠 일이 적다. 내 생각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내 농담에 웃어준다.
반대로 의견이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피곤하다. 설명해야 할 것이 많고 오해가 생기고 가끔은 기분이 상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앞쪽으로 기운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누구나 편한 쪽을 원한다.
원문은 여기서 날카로운 질문을 하나 던진다. 아프지 않고 언제나 편한 삶이 잘 사는 삶이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대부분 그런 삶을 향해 조금씩 움직인다. 불편한 자리는 피하고 편한 자리는 찾아간다. 하나하나의 선택은 합리적이다. 굳이 불편할 이유가 없으니까.
문제는 그 선택들이 쌓였을 때다. 몇 년 뒤에 돌아보면 주변에 비슷한 사람들만 남아 있다. 누구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요즘은 이 기울기가 전보다 훨씬 가팔라졌다.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방송을 봤다. 싫어도 섞여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내가 무엇을 읽을지 누구의 말을 들을지 대부분 고를 수 있다. 그리고 고르지 않아도 알고리즘이 대신 골라준다. 내가 좋아했던 것과 비슷한 것, 내가 동의했던 것과 비슷한 것.
그 결과 한 사람이 하루에 만나는 생각의 폭이 오히려 좁아지는 일이 벌어진다. 정보는 넘치는데 그 정보가 전부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정보에 접근하는 것과 다양한 관점에 접근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앞의 것은 기술이 해결해줬지만 뒤의 것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이 상태의 위험은 불편하지 않다는 데 있다.
비슷한 생각만 만나면 내 생각이 계속 확인받는다. 내가 옳다는 증거가 매일 쌓인다. 그러니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그런데 그 확신이 틀렸을 때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반대 증거가 애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틀린 채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싫든 좋든 반대 의견과 부딪혔다. 그 부딪힘이 불쾌했지만 적어도 내 생각을 한 번씩 흔들어줬다. 지금은 그 흔들림을 의도적으로 찾아가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오지 않는다.
가다머가 이 시대를 봤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 백 살 인터뷰의 대답이 더 급한 조언이 됐을 것이다.
가다머가 평생 붙든 질문은 이해란 무엇인가였다.
그가 세운 철학을 해석학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성서나 법조문 같은 오래된 텍스트를 해석하는 기술이었는데 가다머는 그것을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방식 전체로 넓혔다.
그의 주장 중 가장 도발적인 것은 선입견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보통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으로 배운다. 편견 없이 보라고, 백지상태에서 판단하라고.
가다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누구도 백지상태로 무언가를 이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가진 생각과 경험과 언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그것 없이는 아예 이해가 시작되지 않는다.
선입견은 이해의 장애물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다만 문제는 그 선입견이 시험받지 않을 때다. 내가 가진 틀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할 기회가 없으면 선입견은 그대로 굳는다. 그리고 그 기회는 대개 나와 다른 틀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 생긴다.
그러니까 대화는 내 선입견을 시험대에 올리는 일이다.
오래된 바카라을 읽는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수백 년 전에 쓰인 글을 읽으면 처음엔 이상한 대목들이 눈에 걸린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생각했지. 이런 주장이 어떻게 당연했지. 그리고 그 이상함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반대 방향의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 지금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뭘까.
그 질문이 생기는 순간이 선입견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원래 선입견은 보이지 않는다. 너무 당연해서 선입견인 줄도 모른다. 나와 다른 전제를 가진 무언가와 부딪혀야 비로소 그것이 전제였다는 것이 보인다.
가다머가 사람과의 대화를 텍스트와의 대화와 같은 구조로 본 이유가 여기 있다. 둘 다 내가 가진 틀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
가다머가 쓴 개념 중에 지평이라는 말이 있다.
지평선을 떠올리면 된다. 어떤 자리에 서 있으면 볼 수 있는 범위가 정해진다. 그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니 지평도 다르다.
자기 지평 안에서만 살면 그 안의 것들은 잘 보이지만 그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보이지 않으니까.
지평이라는 비유가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지평은 움직인다. 내가 자리를 옮기면 지평선도 따라 옮겨간다. 고정된 벽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경계다.
그러니 지평이 좁다는 것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자리에만 오래 서 있었다는 뜻이다. 자리를 옮기면 넓어질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쉽게 자리를 옮기는 방법은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거기서 무엇이 보이는지 묻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진짜 대화를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가다머는 이것을 지평의 융합이라고 불렀다.
내 지평과 상대의 지평이 만나면서 둘 다 조금씩 넓어진다. 내가 상대의 자리로 완전히 옮겨가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내 자리로 끌어오는 것도 아니다. 두 시야가 겹치면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볼 수 없던 것이 보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지평이 합쳐지지 않는다. 서로 자기 말만 하면 두 지평은 나란히 놓였다가 그대로 헤어진다.
융합이 일어나려면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가다머는 이것을 대화의 기본 조건으로 봤다.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는 대화에서 대답보다 질문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좋은 대화는 서로 준비한 주장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질문을 따라가는 것이다. 주장은 이미 끝난 생각이다. 질문은 아직 열려 있는 생각이다. 두 사람이 각자의 주장만 들고 만나면 부딪히고 끝나지만 하나의 질문을 들고 만나면 함께 어딘가로 간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렵다. 특히 나이가 들거나 전문가가 될수록 모른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가다머는 그 어려움을 넘어서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라고 봤다.
백 살의 철학자가 젊은 사람들과 대화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읽힌다. 가르치러 간 것이 아니라 물으러 갔을 것이다. 그들이 보는 세계는 어떤지, 자기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원문에는 불쾌함에 관한 흥미로운 문장이 있다.
불쾌하다는 느낌이 성장의 계기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일리가 있다. 누군가의 말이 유독 거슬릴 때 그 거슬림은 가끔 신호다. 내가 단단히 붙들고 있는 무언가를 그 말이 건드렸다는 신호.
아무 상관 없는 말에는 불쾌해지지 않는다. 불쾌하다는 것은 그 말이 어딘가에 닿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닿은 자리가 내가 한 번도 점검해보지 않은 믿음이라면 그 불쾌함은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러니 불쾌함을 느꼈을 때 곧바로 상대를 탓하기 전에 한 번쯤 물어볼 수 있다. 이 말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가. 틀려서인가, 아니면 맞을까 봐인가.
틀린 말은 대개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그냥 틀렸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오래 남아서 곱씹게 되는 말은 오히려 어딘가 일리가 있는 말인 경우가 많다.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이 잘 안 되는 말.
그런 말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중 하나를 한다. 그 말을 한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을 들여다보거나. 앞의 것이 훨씬 쉽다. 사람을 문제 삼으면 말은 다룰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뒤의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지평을 넓힌다. 가다머가 말한 성장은 아마 이 선택의 반복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을 하나 그어야 한다.
불쾌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라는 말은 모든 불쾌한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생각이 달라서 불편한 사람과 나를 존중하지 않아서 불편한 사람은 다르다. 앞의 사람과의 대화는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뒤의 사람과의 시간은 대개 나를 깎을 뿐이다.
가다머가 말한 대화에는 조건이 있었다.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양쪽이 모두 열어두는 것. 한쪽만 열어두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노출이다.
나를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사람 앞에서 계속 귀를 열어두는 것은 성장이 아니다. 그건 그냥 다치는 일이다. 그런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것은 좁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구분하면 좋겠다. 불편함이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가, 존중의 부재에서 오는가. 앞의 것은 머물러볼 만하고 뒤의 것은 떠나도 된다.
그리고 머무를 여력이 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쳐 있을 때, 이미 여러 곳에서 부딪히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불편한 대화를 감당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대화에는 에너지가 든다. 그 에너지가 없는 날에는 편한 사람 곁에서 쉬는 것이 맞다.
가다머의 조언은 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만 머물지 말라는 것에 가깝다. 쉼터가 있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밖으로 나가봐야 쉼터의 소중함도 안다.
원문에서 한 대목 더 조정할 부분이 있다.
가다머는 말년 강연에서 유럽 문화가 번성한 비결이 이방인에게 열려 있던 태도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문은 여기에 중세 이슬람과의 전쟁도 유럽의 정체성을 키운 계기였다는 설명을 붙인다.
이 문장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전쟁을 누군가의 성장 계기로 말하는 것은 대개 그 전쟁에서 살아남고 이긴 쪽의 시선이다. 상대편에게 그 전쟁은 성장의 계기가 아니었다.
다른 문화와의 만남이 풍부함을 만든다는 가다머의 통찰은 유효하다. 다만 그것이 적대의 형태여도 괜찮았다는 식으로 확장되면 안 된다. 폭력을 거친 만남과 대화를 거친 만남은 같은 것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원문은 다문화 슬롯에서 섬뜩하게 느껴지는 사람과도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쓴다. 이 표현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낯섦은 상대의 속성이 아니다. 나와 상대 사이의 거리에서 생기는 감각이다. 이웃으로 사는 이주민이 섬뜩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알게 되면 대개 그 감각은 사라진다.
가다머가 말한 대화의 핵심도 결국 그 거리를 좁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낯설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주어는 사실 나다. 내가 아직 그를 모른다는 고백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상대에 대한 묘사처럼 말한다. 저 사람은 낯설다, 이상하다, 섬뜩하다.
이 문법의 전환은 작아 보이지만 결과가 크다. 낯섦이 상대의 속성이 되면 그것은 상대가 바뀌어야 해결되는 문제가 된다. 낯섦이 거리의 문제라면 내가 다가가도 해결된다.
가다머의 이력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몇 가지 있다.
그는 하이데거의 제자였다. 앞서 이 연재에서 다룬 그 하이데거다. 스승과 제자가 걸어간 길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은 1960년에 나왔다. 1900년생이니 예순 살에 낸 바카라이다. 대부분의 철학자가 이미 주요 작업을 끝낼 나이에 그는 자기 사상의 중심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뒤로도 사십 년을 더 살며 대화를 계속했다. 강연을 다니고 젊은 학자들과 토론하고 다른 전통의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그 논쟁 상대 중에는 그와 생각이 크게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하버마스와는 전통과 비판의 관계를 두고 오래 논쟁했고, 데리다와는 이해가 과연 가능한지를 두고 부딪혔다. 가다머는 이해를 믿었고 상대들은 그 믿음을 의심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논쟁들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기 이론을 가장 날카롭게 공격하는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마주 앉았다. 자기가 말한 대로 산 셈이다.
백 살의 비결이 대화였다는 그의 말을 다시 읽어보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오래 살아서 대화를 많이 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멈추지 않아서 그 시간이 살아 있었던 것 아닐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시간을 써야 하는가.
가다머의 답을 빌리면 그렇다. 다만 조건이 붙는다.
그 사람이 나와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불편하다면 그 시간은 쓸 만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을 그 사람은 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화에서 목표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상대의 지평에 비춰보면 내 지평의 경계가 보인다.
설득을 목표로 하면 대화는 경기가 된다. 이기면 끝나고 지면 상처가 남는다. 어느 쪽이든 새로 보이는 것은 없다.
알아차림을 목표로 하면 결과와 상관없이 무언가가 남는다. 상대가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아도, 나도 생각을 바꾸지 않아도, 적어도 내 생각이 어디에 기대고 있었는지는 알게 된다. 그건 혼자서는 얻기 어려운 정보다.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편하다. 그런데 거기서는 내 지평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모두가 같은 곳까지만 보고 있으니까.
지평의 끝은 나와 다른 곳을 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보인다. 그리고 끝이 보여야 그 너머로 걸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