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의 아키텍처

by김경훈

탱고가 오기 전의 겨울이 하나 있다.


그 겨울에 나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학교는 온라인이었고 회의도 화면으로 했고

장은 배달로 봤고 병원은 미뤘다.


그때 나는 그게 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원래 집이 좋은 사람이라고.

혼자 있는 게 편한 성격이라고.


누가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집에서 잘 지낸다고 답했고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런데 봄이 오고 사람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대로 있었다.


모두가 안 나가던 시절이 끝났는데 나만 계속 안 나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그 겨울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자발적이라는 말이 어떻게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모두가 같았던 시절



그 겨울이 특이했던 건

안 나가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화면으로 만났고 모두가 배달을 시켰다.


그 시기에 나는 처음으로 남들과 같은 조건에서 살았다.


회의는 전부 화상이었고 자료는 전부 파일로 왔다.

누구도 인쇄물을 나눠 주지 않았고 누구도 이거 보세요 하며 화면을 가리키지 않았다.


아니 가리키긴 했지만 그건 모두에게 같은 화면이었다.


이동이 없으니 이동의 장벽도 없었다.

창구가 닫혀 있으니 창구의 장벽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겨울 내 삶이 편했던 이유는

내가 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장벽이 일시적으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됐기 때문이었다.


그걸 그때는 몰랐다.


봄이 오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장벽도 돌아왔다.


다시 인쇄물이 나오고

다시 현장 회의가 잡히고

다시 버스를 타야 했다.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었지만

나에게는 원래 자리가 장벽이 있는 자리였다.


그래서 안 돌아간 것이다.





현관 앞에서



그 봄에 나는 현관 앞에서 자주 멈췄다.


나가려고 신발을 신고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로 잠깐 서 있는 시간.


문고리는 차가웠다.

겨울이라 복도 공기가 문틈으로 들어와서 손등에 닿았다.


그 몇 초 동안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았다.


오늘 가려는 곳까지 몇 번 갈아타야 하는지.

그 정류장에 음향 안내가 있는지.

도착해서 건물 입구를 찾을 수 있을지.

길을 잃으면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돌아올 때 해가 져 있을지.


그리고 그 계산의 결과가

나갈 만한 가치보다 크면 신발을 다시 벗었다.


한 번 한 번은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오늘은 처음 가는 동네니까.

오늘은 꼭 안 가도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그 판단이 쌓이자 다른 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계산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안 나가는 게 기본이 됐다.


그리고 기본이 되자 그게 성격처럼 느껴졌다.


나는 원래 집이 좋은 사람이라는 문장은

그 수백 번의 계산이 남긴 퇴적물이었다.


관계도 같은 방식으로 줄었다.


밥 먹자는 연락이 오면 장소부터 생각했다.

처음 가는 식당이면 입구를 찾는 게 걱정이었고

안내견 없이 사람 많은 곳을 지나는 게 걱정이었다.


그래서 다음에 하자고 답했다.


그 다음이 몇 번 반복되자 연락이 줄었다.


누구도 나를 밀어낸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가 바쁘거나 원하지 않는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이해는 틀리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다만 그 말 아래에 있던 건

원하지 않음이 아니라 계산의 결과였다.


관계는 한 번에 끊기지 않는다.

다음에 하자는 말이 조금씩 쌓여서 끊긴다.





자발적이라는 말



장애인이 밖에 잘 안 나오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쉽게 자발적 고립이라는 말을 쓴다.


관계를 줄이고 활동 반경을 좁히는 모습이

스스로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본인도 그렇게 말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지점이 이 말의 가장 교묘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발적이라는 말은 밖에서만 붙는 게 아니라

안에서도 자란다.


매번의 작은 포기가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그 합계도 합리적인 선택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당사자는 자기 고립을 자기 성격으로 설명하게 되고

주변은 그 설명을 듣고 안심한다.


본인이 원해서 그런 거구나.


그렇게 원인은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다.


고립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그런데 설계의 문제가 오래 지속되면

그 사람 안에서 의지의 문제로 번역된다.


이 번역 과정 때문에 고립은 잘 안 보인다.

당사자조차 자기가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고립은 개입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외로워 보이는 사람에게는 누군가 손을 내민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겨울의 나는 괜찮다고 말하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자발적이라는 말은 설명만 잘못하는 게 아니라

도움이 도착할 경로까지 닫는다.


본인이 원해서 그런 거라면 굳이 건드릴 이유가 없으니까.





숫자가 하는 말



보건복지부의 2023년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장애인의 35.2퍼센트는 지난 한 달 동안 외출할 때 교통수단 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이 숫자는 앞선 글에서 몇 번 인용했다.


이번에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다.


어려움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뉘어 있다.


버스와 택시의 물리적 접근과 탑승의 어려움이 53.2퍼센트.

버스와 택시 이용 시 정보 접근의 어려움이 17.9퍼센트.

장애인 전용 교통수단의 부족이 15.5퍼센트.


두 번째 항목이 내 겨울의 이유였다.


타는 것 자체는 할 수 있다.

다만 지금 온 버스가 몇 번인지 모르고

지금 어디쯤 왔는지 모르고

내릴 곳을 놓칠까 봐 계속 긴장해야 한다.


17.9퍼센트라는 숫자는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건 매 외출의 조건이다.


또 하나 눈에 걸리는 숫자가 있다.


전혀 외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된 이유를 물었더니

장애로 인해 몸이 불편해서가 66.8퍼센트였다.

외출을 도와줄 도우미가 없어서가 8.5퍼센트였다.


나는 첫 번째 선택지의 문장 구조를 오래 봤다.


장애로 인해 몸이 불편해서.


원인이 몸에 있다.


그 겨울의 나에게 이 질문을 했다면

나도 아마 이 칸을 골랐을 것이다.


다른 칸이 딱히 맞지 않았으니까.


정류장에 음향 안내가 없어서라는 칸은 없었다.

처음 가는 건물 입구를 찾을 수 없어서라는 칸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 66.8퍼센트는

몸 때문에 못 나간 사람의 비율이기도 하지만

원인을 몸에 적을 수밖에 없는 문항 구조의 결과이기도 하다.


앞서 나는 조사표에 적을 칸이 없는 정보는

수집 단계에서 사라진다고 쓴 적이 있다.


여기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문장은 조사표 바깥에서 다시 사람 안으로 들어간다.

몸이 불편해서 못 나간다는 설명이

당사자의 자기 이해가 된다.


같은 조사에서 장애인의 80.1퍼센트는

우리 슬롯에 장애인 차별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열 명 중 여덟 명이 차별이 있다고 보는데

외출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 자기 몸이라고 답한다.


이 두 숫자가 함께 있다는 게 흥미롭다.


슬롯 전체에 대한 질문에는 구조를 보고

자기 일상에 대한 질문에는 몸을 본다.


구조는 추상적으로는 보이는데

내 현관 앞에서는 잘 안 보인다.


현관 앞에서 느끼는 건 구조가 아니라

오늘 좀 힘들 것 같다는 몸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혼자 풀 수 없는 것



고립에는 경제적 조건도 붙어 있다.


같은 조사에서 장애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305만 8천 원으로

전체 가구 평균 483만 4천 원의 63.3퍼센트였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답한 35.3퍼센트 중

주된 지원자가 가족인 경우가 82.1퍼센트였다.


이 숫자들을 겹쳐 보면

외출 한 번의 비용이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보인다.


택시비는 소득에서 나오고

동행은 가족의 시간에서 나온다.


둘 다 부족하면 외출이 멈춘다.


그리고 외출이 멈추면 일이 멀어진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장애인의 고용률은 2014년 기준 25퍼센트로

회원국 평균 42퍼센트보다 크게 낮았다.


보고서는 한국의 장애 관련 빈곤 격차가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고 평가하면서

이게 단순한 노동시장 문제가 아니라

주요한 경제적 슬롯적 도전이라고 지적한다.


일터에서 밀려난 사람은 거리에서도 밀려나기 쉽고

거리에서 밀려난 사람은 다시 일터로 가기 어렵다.


노동의 배제와 공간의 배제는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겨울 내가 운이 좋았던 건

내 일이 그때 마침 화면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뿐이다.


일터가 현장이었다면 그 겨울은 실직으로 끝났을 것이다.





모두의 문제



교통약자라는 말의 정의를 한 번 보면 좋겠다.


국토교통부는 교통약자를

장애인과 고령자와 임산부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과 어린이 등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으로 본다.


이 목록을 다 합치면 소수가 아니다.


유모차를 끄는 부모도 저상버스가 필요하고

무릎이 약한 노인도 필요하고

발목을 다친 사람도 몇 주는 필요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의 2025년 보고서도 같은 방향이다.


고령화가 빠른 도시일수록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한 대중교통과 연령포용적 설계가 필요하고

그게 복지만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디지털 포용과 기후 회복력에도 이익이 된다고 설명한다.


다른 보고서에서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이익이 모든 사람과 관련된다고 적는다.


나는 이 논리를 쓸 때 늘 조심한다.


모두에게 이롭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건 안 해도 된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립 문제에서는 이 논리가 조금 다르게 작동한다.


고립은 소수의 문제로 분류될 때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조건으로 분류될 때 비로소 정바카라의 대상이 된다.


그 겨울에 모두가 집에 있었을 때

화면 회의와 파일 자료와 배달이 순식간에 기본값이 됐다.


모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벽은 기술적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었다.

없앨 이유가 모두에게 생기기 전까지는 안 없앴을 뿐이다.





다른 곳은



외국은 접근성을 사후적 시혜가 아니라 사전적 기준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영국 정부의 포용적 교통 전략은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교통체계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2030년까지 동등한 접근을 목표로 잡았다.


일본은 유니버설 디자인 정바카라과 배리어프리 법제를 통해

공공교통과 건축 환경의 장벽을 단계적으로 없애 왔다.


미국은 장애인법을 통해

교통과 공공시설의 접근성을 차별금지와 동등한 접근권의 문제로 다룬다.


경사로 하나와 저상버스 한 대를 두고 복지냐 비용이냐를 따지는 단계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접근 가능한 구조를 표준으로 삼는 쪽으로 가고 있다.


우리도 방향은 안다.


제4차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은

2026년까지 시내버스 저상버스 비율을 62퍼센트로 올리겠다고 했다.


2023년 기준 그 비율은 38.9퍼센트였다.

2022년 34.0퍼센트보다는 올랐다.


특별교통수단 도입률은 2023년 101.4퍼센트로 집계됐지만

같은 지표 설명에 일부 시도는 여전히 법정대수에 못 미친다고 적혀 있다.


전국 평균이 기준을 채운 것처럼 보여도

어느 동네에 사느냐에 따라 체감은 다르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속도와 집행력이다.





탱고가 온 뒤



그 겨울이 끝난 건 탱고가 온 뒤였다.


하네스를 처음 잡고 나간 날

현관 앞에서 멈추는 시간이 짧아졌다.


계산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계산 결과가 달라졌다.


장애물은 탱고가 피하고 방향은 내가 정한다.

그 분업이 생기자 나갈 만한 가치보다 비용이 커지는 날이 줄었다.


그러니까 나는 고립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적고 싶지 않다.


내가 빠져나온 건 제도가 바뀌어서가 아니다.

안내견을 분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대기가 있고 조건이 있고

모두에게 해당하는 해법이 아니다.


정류장의 음향 안내는 여전히 없고

처음 가는 건물 입구는 여전히 찾기 어렵다.


바뀐 건 나의 조건이지 동네의 조건이 아니다.


지금도 탱고가 아플 때는 그 겨울로 돌아간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날이나 컨디션이 안 좋아 쉬게 해야 하는 날에는

현관 앞의 계산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다.


그러니까 내 외출은 지금

한 마리 개의 건강에 걸려 있다.


이건 탱고에게 너무 큰 짐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 겨울에서 내가 빠져나온 방식은

구조를 고친 게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다.


접근성이 운에 가까운 상태라는 말을

나는 내 몸으로 증명한 셈이다.





제목: 현관의 아키텍처 혹은 자발적이라는 말에 대하여.


고립은 한 번의 결정으로 오지 않는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다시 벗는 수백 번의 작은 판단이 쌓여서 온다.


그 판단 하나하나는 합리적이어서

쌓인 결과도 선택처럼 보인다.


밖에서 보기에도 그렇고 안에서 느끼기에도 그렇다.


그래서 자발적 고립이라는 말은 틀린 관찰이 아니라

원인을 지운 관찰이다.


결과는 정확히 봤는데 그 결과를 만든 계산의 조건을 안 봤다.


결론: 장애인을 고립으로 모는 건 장애 그 자체가 아니다.


문턱 높은 버스와 음향 안내 없는 정류장과

찾을 수 없는 입구와 부족한 지원이

매일 현관 앞에서 작은 계산을 요구한다.


그 계산이 쌓이면 사람은 자기가 집을 좋아한다고 믿게 된다.


정바카라이 할 일은 그 믿음을 고쳐 주는 게 아니다.

현관 앞의 계산이 다르게 나오도록 바깥을 고치는 것이다.


교통과 건축과 정보와 디지털 서비스와 돌봄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의 접근권 정바카라으로 묶고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이행을 점검하는 데 더 힘을 써야 한다.


그러면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고

집이 좋은 사람은 정말로 집에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자발적이라는 말이 정확해진다.


그나저나 그 겨울 이야기를 보보에게 처음 했을 때

보보가 그때 나를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때 만났으면 연애를 못 했을 거라고 답했다.

밖에 안 나갔으니까.

보보가 그러면 자기가 집으로 찾아갔을 거라고 했다.

그건 고립 해소가 아니라 방문 돌봄 아니냐고 했더니 웃었다.

탱고는 요즘 현관 앞에서 신발 신는 소리가 나면 먼저 일어난다.

저 녀석은 나보다 나갈 준비가 빠르다.

그 겨울에 저 녀석이 있었으면 아마 계산이 좀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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