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 하나를 열었다.
이 카지노 게임에 올린 글들을 모아 둔 폴더다.
화면 낭독기가 파일 이름을 위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
도형의 아키텍처.
안전의 아키텍처.
돌봄의 아키텍처.
어린이의 아키텍처.
빈집의 아키텍처.
계속 읽었다.
접속과 메뉴와 권리와 품과 버튼.
기록과 경보와 테이프와 이음새와 발언대.
공용어와 기본값과 말뭉치와 촉지도와 요약.
보폭과 장부와 선호와 본인과 몫.
수명과 오랫동안과 문항과 불복종과 사용시간.
검증과 전력과 대표와 표본과 속도.
창구와 권한과 미안함과 손잡이와 현관.
마흔 개쯤 됐다.
낭독기는 파일 이름 사이사이에 날짜를 붙여 읽었다.
1월과 3월과 4월과 5월을 지나 9월과 10월까지.
그 날짜들을 듣는 동안
각 편을 쓰던 날의 소리가 하나씩 떠올랐다.
암장의 매트에 떨어지는 소리.
새벽 3시 40분의 화재경보.
본가 식탁에서 숟가락 놓는 소리.
사거리의 바퀴 소리.
현관 문고리의 차가운 감촉.
낭독기가 마지막 파일 이름을 읽고 조용해졌을 때
나는 이상한 생각을 하나 했다.
이거 전부 같은 문장이다.
이것은 그 문장에 관한 기록이다.
같은 문장
처음에는 내가 게을렀나 싶었다.
마흔 번을 썼는데 같은 말만 했다면
그건 소재가 아니라 작가의 한계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 편씩 다시 떠올려 봤다.
키오스크 이야기에서 나는
조사가 측정한 건 선호가 아니라 현재 선택지의 순위였다고 썼다.
촉지도 이야기에서는
설치는 되어 있는데 아무도 읽지 않았다고 썼다.
손잡이 이야기에서는
지급은 했는데 맞추지는 않았다고 썼다.
현관 이야기에서는
나갈 수는 있는데 계산이 매번 나가지 말라고 했다고 썼다.
소재는 다 달랐다.
그런데 문장의 뼈대는 하나였다.
문이 열려 있다는 것과
그 문 앞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마흔 편이 결국 이 한 문장의 변주였다.
그걸 알고 나니까 좀 덜 부끄러웠다.
같은 말을 마흔 번 해야 했다는 건
그 말이 마흔 군데에서 아직 안 통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물론 반복에는 대가가 있다.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면 듣는 사람이 지친다.
또 그 얘기냐는 반응이 나온다.
장애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들을 때마다 비슷하게 들리니까.
그런데 비슷하게 들리는 이유는
같은 구조가 장소만 바꿔서 계속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류장에서 겪은 일과 은행 앱에서 겪은 일과 투표소 가는 길에서 겪은 일이
겉으로는 다르지만 뼈대는 같다.
그러니까 반복은 말하는 사람의 습관이 아니라
세상이 아직 그 모양이라는 증거다.
지겨워해야 할 건 이야기가 아니라 그 구조다.
열려 있다는 말
살면서 자주 들은 말이 있다.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
겉으로 들으면 공정하다.
누구에게나 문이 있고 길이 있으니
이제 남은 건 개인의 노력뿐이라는 뜻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조금 불편했다.
그 불편이 정확히 뭔지를 오래 설명하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에는 거리가 빠져 있다.
문이 열려 있다는 건 문의 상태를 말한다.
그 문까지 가는 길이 어떤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길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은
열려 있다는 말 안에서 조용히 지워진다.
어떤 사람은 이미 운동장 안에서 뛰고 있고
어떤 사람은 경기장 입구 계단 앞에서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둘에게 같은 규칙으로 뛰라고 한다.
규칙은 공정하다.
출발선까지의 거리만 다를 뿐이다.
이걸 평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오랫동안 평등이라는 단어를 쉽게 믿지 못했다.
그 단어가 대체로 이 거리를 빼고 쓰였기 때문이다.
조건의 평등
그래서 나는 다른 말을 쓰고 싶다.
조건의 평등.
모두에게 같은 문장을 선언하는 게 아니라
그 문장이 실제로 닿을 수 있게 조건을 다시 짜는 일.
누구는 손으로 열고 누구는 버튼으로 열고 누구는 음성으로 열 수 있게
문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
모두에게 같은 시험지를 주는 게 아니라
그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감각과 이동과 소통의 조건을 함께 보장하는 일.
이건 결과의 평등과 다르다.
모두가 같은 점수를 받게 하자는 게 아니다.
모두가 같은 시험장에 들어올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기회의 평등과도 다르다.
기회의 평등은 문을 열어 두는 데서 끝난다.
조건의 평등은 문 앞까지의 길을 같이 본다.
그 길이 마흔 편의 소재였다.
그리고 그 길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전부 작다.
정류장 하나에 음향 안내 하나.
촉지도 옆에 스티커 한 줄.
레버 두 칸.
스크롤 이벤트 하나.
조사표에 칸 하나.
이것들을 고치는 데 큰 예산이 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도 안 고쳐진 이유를 마흔 편에 걸쳐 찾아보면
대체로 비슷한 답이 나왔다.
그 길을 걸어 본 사람이 설계 자리에 없었다.
고칠 바카라임이 어느 부서에도 없었다.
고치지 않아도 지표상 문제가 없어 보였다.
작아서 안 고쳐진 게 아니라
작아서 아무도 자기 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정류장의 음향 안내와
건물 입구의 촉지도와
키오스크의 물리 버튼과
약관 화면의 스크롤과
롤레이터의 손잡이 높이와
점자 공보물의 면수와
보행 신호의 초와
조사표의 칸.
전부 출발선까지의 길에 놓인 것들이다.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시선
장애 당사자로 살면서 자주 느낀 시선이 하나 있다.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시선.
경사로를 요구하면 특별대우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고
자막과 수어 통역을 요구하면 비용을 늘리는 사람처럼 여겨지고
보조기기 지원을 말하면 개인의 불편을 슬롯에 떠넘기는 사람처럼 읽힌다.
이 시선이 왜 생기는지는 이해한다.
요구는 언제나 지금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달라는 형태로 보이니까.
그런데 내 경험은 반대였다.
내가 요구한 건 늘 더 많은 몫이 아니라
비로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나도 갖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보조기기는 사치가 아니었다.
내 몸의 결핍을 채우는 물건이 아니라 내 삶의 범위를 넓히는 권리였다.
접근성은 편의가 아니었다.
참여의 전제였고 시민권의 형태였다.
그러니까 요구처럼 보이는 것의 상당수는
사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의 목록이다.
계단은 요구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이미 주어졌다.
나는 경사로를 요구했을 뿐이다.
계단을 놓을 때 아무도 그걸 특혜라고 부르지 않았다.
걷는 사람에게 계단은 그냥 건물의 일부였다.
경사로는 처음부터 건물의 일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붙이는 것이 되었고
나중에 붙이는 것은 늘 추가 요구처럼 보인다.
순서만 바꿨어도 같은 물건이 다르게 불렸을 것이다.
설계 속의 장애
마흔 편을 쓰면서 점점 더 분명해진 게 하나 있다.
내 삶을 어렵게 하는 건 내 손상 그 자체만이 아니라는 것.
더 큰 부분은 손상을 기준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슬롯의 구조다.
높은 계단과 작은 글씨와 빠르게 지나가는 안내.
닫기 어려운 광고와 음성으로만 나오는 정보.
문자로만 짜인 행정과 표준 몸과 표준 속도를 기준으로 설계된 서비스.
이것들이 하나씩 쌓여서 사람을 바깥으로 민다.
장애는 내 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슬롯의 설계 안에도 있다.
그러니까 조건의 평등은
개인을 보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슬롯를 재설계하는 문제다.
이 문장은 장애학에서 오래전부터 해 온 말이고
나는 그걸 마흔 개의 구체적인 장면으로 다시 확인한 것뿐이다.
대체수단이라는 말
디지털 접근성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반복해서 듣는 말이 있다.
사용이 불편하면 다른 방법을 찾으세요.
앱이 안 되면 전화로.
전화가 안 되면 창구로.
창구가 멀면 대리인을 통해서.
이 말에는 늘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대체수단을 찾는 바카라임은 장애인에게 있다는 것.
왜 그럴까.
기술은 발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을 품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는 방향으로 자주 간다.
그리고 뒤에 남은 사람에게
알아서 다른 길을 찾으라고 한다.
나는 이걸 기술의 문제이자 복지의 문제로 같이 본다.
기술이 공공재가 되지 못하면 그건 강한 사람에게 유리한 시장재로 남는다.
의료가 시장에만 맡겨질 때 가난한 사람이 더 아프듯
접근성이 시장에만 맡겨질 때 장애인은 더 밀려난다.
보조기기와 보완대체의사소통과 정보 접근과 이동 지원은
개인의 능력이나 구매력으로 풀 문제가 아니다.
슬롯가 같이 바카라임져야 할 기반이다.
어떤 사람에게 계단 하나는 그냥 구조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날 하루 전체를 막는 벽이다.
그 벽을 없애는 일은 친절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다.
친절과 정의의 차이를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친절은 주는 사람이 정한다.
오늘 기분이 좋으면 주고 바쁘면 안 줄 수 있다.
정의는 받는 사람의 자격에서 출발한다.
주는 사람의 기분과 무관하게 거기 있어야 한다.
마흔 편 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친절했다.
레버를 알려 주지 않은 지급 담당자도
촉지도를 갱신하지 않은 건물 관리자도
음성봇 뒤의 상담원도
그 자체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람들의 친절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나는 매번 멈췄다.
친절은 사람에게 붙어 있어서 그 사람이 없으면 사라지고
정의는 구조에 붙어 있어서 사람이 바뀌어도 남는다.
테이프 이야기를 쓸 때 나는
좋은 사람이 떠나면 그가 알아낸 모든 것도 함께 떠난다고 적었다.
그게 친절에 기대는 접근성의 한계다.
바라는 것
이 개념을 붙잡게 된 건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오래 생각한 끝이기도 하다.
나는 비장애인과 똑같아지고 싶은 게 아니다.
내 몸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 몸 때문에 권리가 줄어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뒤처지도록 설계된 슬롯를 바꾸고 싶을 뿐이다.
나는 특별대우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기본적인 참여를 위해 추가로 필요한 조건들이
정당한 권리로 인정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세 문장을 쓰는 데 마흔 편이 걸렸다.
그리고 이 세 문장 모두 다만으로 이어진다.
이 다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 절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고 뒤 절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슬롯는 대체로 앞 절만 듣는다.
똑같아지고 싶다는 줄 알고 특별대우를 바라는 줄 안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원하는 뒤 절까지 가기 전에 대화가 끝난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으면 아마 아무도 안 들었을 것이다.
추상적인 말은 잘 안 들리니까.
그래서 대신 손잡이 레버 두 칸과
촉지도 옆에 붙은 점자 스티커 한 줄과
약관 화면에서 비활성 상태로 남은 버튼 하나를 썼다.
평등은 철학이 아니라 일상의 세부에서 판가름 난다.
버스를 탈 수 있는가.
병원에 갈 수 있는가.
방송을 이해할 수 있는가.
스마트폰을 쓸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가.
일할 수 있는가.
말이 닿지 않을 때 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가.
슬롯는 너무 큰 구호로 평등을 말하면서
이 사소해 보이는 조건들을 자주 놓친다.
그런데 장애인의 삶에서는 바로 그 사소한 것들이 존엄을 정한다.
손이 닿는 위치의 버튼 하나.
알아들을 수 있는 방송 하나.
읽을 수 있는 안내문 하나.
기다려 주는 속도 하나.
이것들이 사람을 슬롯 안에 남게도 하고 밖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해명하지 않는 상태
이제 나는 평등을 이렇게 이해한다.
결과 이전의 조건.
선언 이전의 설계.
동정 이전의 권리.
그리고 장애 당사자에게 조건의 평등이란
자기 삶을 남에게 해명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마흔 편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나온 장면이 사실 이거였다.
해명하는 장면.
저는 앞이 안 보여서요로 시작하는 3분짜리 서문.
조사원 앞에서 안 되는 날을 설명하는 일.
상담원에게 같은 문제를 세 번 다시 말하는 일.
운전자에게 이 구역이 왜 넓은지를 설명하는 일.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일.
전부 해명이었다.
도움을 청할 때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슬롯.
접근권을 요구할 때마다 예외로 취급받지 않는 슬롯.
내 몸과 속도와 언어가 틀린 게 아니라
슬롯가 아직 충분히 넓지 않을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슬롯.
그런 슬롯가 되어야 평등이 말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해명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도 말해 두고 싶다.
해명은 시간을 쓴다.
그리고 감정도 쓴다.
같은 이야기를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설명하는 사람이 되고
부탁하는 사람이 되고
가끔은 증명하는 사람이 된다.
그 역할들이 하루에 여러 번 반복되면
저녁에는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비장애인에게 하루는 일과 쉼으로 나뉜다.
나에게는 그 사이에 해명이 하나 더 끼어 있다.
조건의 평등이 이뤄진다는 건
그 세 번째 칸이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그 시간과 감정을
일에 쓰거나 쉬는 데 쓸 수 있다.
제목: 출발선의 아키텍처 혹은 문 앞까지의 거리.
내가 그동안 쓴 글들은 아마 전부 같은 문장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 것일 것이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출발선 앞에서의 격려가 아니라
출발선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조건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도록 바꿔 놓은 구조다.
결론: 기회가 열려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절반만 사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 열린 문까지의 거리이고
그 거리는 사람마다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조건의 평등은 그 거리를 재는 데서 시작한다.
정류장에서 입구까지.
현관에서 정류장까지.
화면에서 버튼까지.
신청서에서 내 하루까지.
그 거리들을 하나씩 재고 하나씩 줄이는 일이
이 카지노 게임이 해 온 일이고 앞으로도 할 일이다.
같은 문장을 몇 번 더 써야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문장이 필요 없어지는 날이 이 카지노 게임의 마지막 편이 되기를 바란다.
그나저나 낭독기가 폴더를 다 읽고 나서 보보에게 말했다.
나 사실 마흔 번 같은 말만 한 것 같아.
보보가 잠깐 생각하더니 칸트도 평생 같은 말만 했다고 했다.
위로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었다.
탱고는 낭독기가 파일 이름을 읽는 동안 내 발 위에 턱을 올리고 있었다.
마흔 편 중에 저 녀석이 안 나온 편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저 녀석은 이 카지노 게임의 유일한 고정 출연자다.
출연료는 간식으로 정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