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하는 일

세네카가 바꿔놓은 질문

by김경훈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이제 거의 격언이 되었다.


진로 강연에서도 자기계발서에서도 면접 대비 요령에서도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그러면 평생 하루도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하는 일을 딱히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이 말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이 조언의 얼굴을 한 판정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뒤집으면 지금 일을 사랑하지 않는 당신은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미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격려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작은 죄바카라감이 된다. 같은 말이 누구에게 닿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일을 한다.


그러면 질문이 생긴다. 내가 하는 일을 꼭 사랑해야 하는가.


세네카라면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말했을 것이다.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표현부터 보자.


사랑은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로 결심해서 사랑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영어에서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다. 빠지는 것은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다. 발을 헛디뎌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일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는 요구다. 그리고 할 수 없는 요구를 받은 사람은 대개 둘 중 하나가 된다. 사랑하는 척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거나.


둘 다 좋은 결과가 아니다. 앞의 것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뒤의 것은 사람을 작게 만든다.



질문을 조금 바꿔볼 수도 있다.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좋으냐로.


그런데 이 질문에도 문제가 숨어 있다.


일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일이 사랑의 대상이 된다. 강아지나 이웃집 아이나 할머니의 텃밭처럼 내 바깥에 있는 무엇이 된다. 나는 여기 있고 일은 저기 있고 나는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그런데 일은 그렇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일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내 시간과 손과 판단이 들어간다. 일을 했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무언가를 표현했다는 뜻이다. 좋든 싫든 그 일에는 내가 묻어 있다.


그러니 일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나와 일이 분리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 전제가 흔들리면 질문도 흔들린다.


다만 이 질문이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어떤 자세로 일할 것인가를 묻는 일은 언제나 필요하다. 문제는 질문의 모양이다.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였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짧게 정리된다. 잘 산다는 것은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은 숲이나 강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본성도 포함한다.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그 현실에 맞게 사는 것이 자연을 따르는 삶이다.


이 생각을 일에 적용하면 세네카의 문장이 나온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은 무의미하다.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맞느냐. 질문이 바뀐 것이다.


자연을 따른다는 말에는 한계를 받아들인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 부분이 스토아 철학을 요즘의 자기계발 담론과 갈라놓는다.


요즘 흔히 듣는 말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력하면 한계는 없다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주어진 본성이 있고 그것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봤다.


이게 체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르게 보면 해방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되지 못한 것은 전부 내 탓이 된다.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면 그 안에서 무엇을 할지에 집중할 수 있다.



맞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네카의 관점을 풀어보면 몇 가지 기준이 나온다.


내가 가진 능력을 쓸 수 있는가. 능력을 한참 넘어서는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가.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자원이 주어지는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가.


이 기준들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감정에 대한 질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설렘이 있는가, 가슴이 뛰는가 같은 질문이 빠져 있다. 대신 구체적이고 확인 가능한 것들이 남는다. 능력, 자원, 조건.


사랑은 확인하기 어렵다. 오늘은 좋다가 내일은 싫어진다. 그런데 맞는지는 비교적 확인할 수 있다. 이 일을 할 때 내 능력이 쓰이는지 아닌지는 몇 달 해보면 안다.


그러니까 세네카는 흔들리는 기준을 덜 흔들리는 기준으로 바꿔놓은 셈이다.


이 기준에는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나를 탓하는 결론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면 문제가 내 마음에 있는 것처럼 들린다. 열정이 부족하거나 태도가 나쁘거나. 그런데 일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 문제는 관계에 있다. 나와 이 일 사이의 궁합이 좋지 않은 것이다.


옷에 비유하면 쉽다.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불편해하는 사람에게 옷을 더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치수가 안 맞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치수는 몸의 잘못이 아니다.


맞음은 또 고정된 것이 아니다. 처음엔 맞지 않던 일이 능력이 늘면서 맞게 되기도 하고, 잘 맞던 일이 조건이 바뀌면서 어긋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질문은 한 번 묻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끔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랑이 다시 돌아온다. 다만 다른 자리로.


세네카의 관점에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일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일이 사랑의 표현이냐.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방향이 정반대다.


일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에서 무언가를 받는 것이다. 즐거움이든 보람이든 설렘이든. 일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지가 기준이 된다.


일을 사랑으로 한다는 것은 일에 무언가를 주는 것이다. 주의와 성실함과 바카라임감을. 내가 일에 무엇을 넣는지가 기준이 된다.


앞의 것은 일이 좋아야 성립한다. 뒤의 것은 일이 특별히 좋지 않아도 성립한다.


그리고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앞의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일이 즐거울지 아닐지는 나 혼자 정하지 못한다. 뒤의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어떤 태도로 일할지는 적어도 상당 부분 내 몫이다.


스토아 철학의 또 다른 핵심이 여기에 걸려 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통제할 수 있는 쪽에 힘을 쓰라는 것.


이 전환을 일상의 장면에 대보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반복적인 서류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일에서 설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일을 사랑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이 사람은 늘 아니라고 답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으로 하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답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서류를 받을 사람이 헷갈리지 않도록 정리하는 일. 다음 사람이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메모를 남기는 일. 이런 것들은 일이 지루해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대개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서류를 받은 사람은 그것이 성의 있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일을 사랑하지 않아도 일을 통해 누군가를 배려하는 것은 가능하다.



세네카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일을 사랑으로 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말이 흥미롭다. 우리는 보통 일에 몰입하는 사람을 자기 일에 자부심이 큰 사람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세네카가 말한 몰입은 반대 방향에 가깝다. 일 자체에 집중하느라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뒤로 밀리는 상태.


목수가 의자를 만들 때를 생각해보자. 좋은 목수는 이 의자가 나를 얼마나 돋보이게 할지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의자가 앉는 사람에게 편할지를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목수의 실력이 드러나지만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원문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자기 일을 사랑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중심적이라고.


이 부분은 좀 가혹하다. 일을 정말 좋아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핵심은 알아들을 만하다. 일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과 일을 사랑으로 해내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 앞의 것은 말로 할 수 있고 뒤의 것은 결과물에서만 보인다.


요즘은 앞의 것이 유난히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자기소개서에는 열정을 써야 하고 면접에서는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일을 잘하는 것과 별개로 일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사랑을 연기하는 데 에너지가 들어간다. 정작 일에 쓸 주의가 그쪽으로 새어 나간다. 세네카가 경계한 것이 아마 이런 상태였을 것이다. 일보다 일을 대하는 내 모습이 더 중요해지는 상태.



그런데 세네카의 논리에는 조심해서 읽어야 할 대목이 있다.


내 일이 곧 나라는 말이다.


이 문장은 일에 진지하게 임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방향으로 읽힐 위험도 있다. 일과 나를 완전히 겹쳐버리는 쪽으로.


일과 내가 하나가 되면 일이 흔들릴 때 나도 흔들린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내가 실패한 것이 되고, 온라인 게임을 잃으면 나를 잃은 것이 된다. 평가가 나쁘면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깎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이것이 소진의 흔한 경로다. 일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일 말고는 나를 확인할 곳이 없어서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네카의 기준, 즉 자신과 맞는 일을 하라는 조건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맞는 일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후자에게 맞지 않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이 대목은 이렇게 고쳐 읽는 편이 낫다고 본다. 일에는 내가 묻어난다. 다만 내가 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여러 자리에 동시에 있다.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이고 이웃이다. 취미가 있고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즐겨 걷는 길이 있다. 이 자리들 각각에 조금씩 내가 나뉘어 있다.


한 자리가 흔들려도 다른 자리들이 버텨주면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일이 전부인 사람은 이 완충이 없다. 그래서 일이 흔들리는 순간 전체가 흔들린다.



흥미로운 것은 스토아 철학 자체가 이 위험에 대한 해독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구분,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일의 결과는 상당 부분 통제할 수 없다. 시장이 바뀌고 윗사람이 바뀌고 운이 작용한다. 그러니 결과로 나를 확인하려 하면 나는 계속 남의 손에 들린다.


반면 어떤 태도로 했는지는 내 것이다. 성실하게 했는지, 할 수 있는 만큼 주의를 기울였는지. 결과가 나빠도 이것은 남는다.


활쏘기에 비유하는 스토아식 설명이 있다. 궁수가 할 수 있는 것은 활을 잘 당기고 잘 겨누고 잘 놓는 것까지다. 화살이 날아가는 동안 바람이 불면 그것은 궁수의 몫이 아니다.


그러니 좋은 궁수를 판단하는 기준은 과녁에 맞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쐈느냐가 된다. 결과는 대체로 실력을 따라오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그 틈을 인정하는 것이 스토아적인 태도다.


그러니 일이 사랑의 표현이라는 세네카의 말은 역설적으로 일에서 나를 조금 떼어놓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과가 아니라 태도에 나를 두면, 결과가 무너져도 내가 함께 무너지지 않는다.


이게 아마 원문이 말한 충만함의 정체일 것이다. 좋은 결과를 얻어서 충만한 것이 아니라 결과와 무관하게 남는 것이 있어서 충만한 것.



세네카 본인의 삶은 이 가르침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는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였다. 에세이와 희곡과 편지로 절제와 덕을 가르쳤다. 그리고 동시에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검소함을 말하는 사람이 막대한 재산을 가졌다는 점은 당대에도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 비판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남기기도 했다. 현자가 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고, 중요한 것은 부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설득력이 있는 답인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할 것이다.


다만 이 모순은 그를 덜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더 인간적인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 자기가 쓴 것을 완벽하게 살아낸 철학자는 드물다.


그는 젊은 네로의 스승이었다. 로마 전체가 그의 말을 들었는데 정작 가장 가까이 있던 제자는 듣지 않았다. 네로는 결국 스승을 불편하게 여겨 죽음을 명령했고, 세네카는 그 명령에 따라 생을 마쳤다.


가르치는 일을 누구보다 잘했던 사람이 가장 중요한 학생 앞에서 실패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그가 말한 구분을 보여준다. 네로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세네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가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뿐이었다. 결과로만 보면 그의 가르침은 실패했다. 그런데 그의 글은 이천 년을 건너 여기까지 왔다.


결과가 전부였다면 세네카는 실패한 스승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하는 일을 꼭 사랑해야 하는가.


세네카의 답을 빌리면 이렇게 된다.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물어볼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 일이 나와 맞는가. 내 능력이 쓰이고 필요한 조건이 갖춰져 있는가. 이건 감정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이 일을 어떤 태도로 하고 있는가. 일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지가 아니라 내가 일에 무엇을 넣고 있는지.


첫 번째 질문의 답은 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질문의 답은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내가 정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좋은 답을 계속 내다 보면 첫 번째 질문의 답이 바뀌기도 한다. 성의 있게 하다 보니 잘하게 되고 잘하게 되니 맞는 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은 억지로 시작할 수 없지만 태도는 시작할 수 있고, 가끔은 태도가 먼저 가고 애정이 뒤따라온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성의를 다해도 끝내 맞지 않는 일도 있다. 그때는 그 일을 떠나는 것이 자연을 따르는 선택일 것이다. 세네카도 맞지 않는 일에 평생 머물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은 운이 따라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을 좋은 태도로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데 있을 수 있다. 지금 손에 쥔 일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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