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줄 왼쪽 끝

by김경훈

[진행 노트]


일 · 웨딩 슬롯

경력 · 9년

진행 · 1500쌍 조금 넘음

주말 · 하루 서너 탕

나 · 서른여덟 남자 미혼

쓰는 이유 · 다음 달이 제 차례라서



이 일


결혼식 슬롯를 봅니다.


친구 결혼식 슬롯 한번 봐준 게 시작이었어요. 그날 하객 중에 웨딩홀 실장님이 계셨는데 끝나고 명함을 주셨습니다.


그게 9년 전입니다.


지금은 주말에 서너 탕 뜁니다. 탕이라는 말은 업계 용어예요. 목욕탕 아닙니다.


제 멘트는 정해져 있어요.


지금부터 신랑 누구 군과 신부 누구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거 1500번 넘게 했습니다.


1500번 하면 이 문장이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뼈에서 나옵니다.


제 장점은 목소리가 좋다는 거고 단점도 목소리가 좋다는 겁니다. 하객 중에 이모님들이 끝나고 번호를 물어보세요.


저는 드리지 않습니다. 명함을 드립니다.


명함에는 번호가 있으니까 결국 드리는 거긴 한데 형식이 중요합니다.


이 업계는 형식으로 먹고삽니다.



하객석


슬롯자 자리에서는 하객석이 다 보입니다.


단상 옆에 서니까 조금 높아요. 앞줄부터 뒷줄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9년 하면 하객석을 읽을 줄 알게 됩니다.


앞줄 오른쪽은 신부 부모님 쪽이고 왼쪽은 신랑 쪽이에요. 둘째 줄부터 친척이고 뒤로 갈수록 친구하고 온라인 게임 동료입니다.


맨 뒷줄은 밥 먹으러 온 분들이에요.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업계 정설입니다.


저는 식 시작 전에 하객석을 한 번 훑습니다.


누가 울 것 같은지 보고 누가 핸드폰만 볼 것 같은지 봅니다. 그래야 멘트 강약을 조절해요.


이게 제 영업 비밀인데 여기 적었으니 이제 비밀이 아니네요.


비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제일 무서운 건 신부 입장 전 30초예요.


음악은 나오는데 문이 안 열립니다.


그 30초 동안 하객 이백 명이 다 문을 봐요.


아무도 말을 안 합니다.


9년 동안 저는 그 30초를 제일 좋아했어요.



셋째 줄


작년 봄에 그분을 처음 봤습니다.


셋째 줄 왼쪽 끝에 앉아 계셨어요.


신랑 쪽 친척 자리입니다.


남자분이고 정장을 입으셨어요. 나이는 가늠이 안 됐습니다. 마흔 같기도 하고 예순 같기도 했어요.


특별할 게 없는 하객이었습니다.


그 식이 끝나고 다음 탕을 뛰었어요. 다른 웨딩홀이었습니다.


셋째 줄 왼쪽 끝에 그분이 계셨어요.


저는 그때 좀 웃었습니다.


아 이분 오늘 결혼식 두 탕 뛰시네 했어요. 주말에 결혼식 두 개 가시는 분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 옆자리가 비어 있더라고요.


두 식 다요.


결혼식장에서 옆자리가 비는 건 드물어요. 하객들이 빈자리를 채워 앉거든요. 늦게 온 사람이 거기 앉아요.


그분 옆만 안 채워졌습니다.



그다음 주


그다음 주에도 계셨습니다.


토요일 세 탕 중에 두 탕에 계셨어요.


셋째 줄 왼쪽 끝이요.


이쯤 되면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저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 혹시 웨딩홀 직원인가.


그런 직원이 있어요. 하객이 너무 적으면 자리 채우라고 앉혀두는 알바요. 하객 대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식 끝나고 웨딩홀 실장님한테 여쭤봤어요.


셋째 줄 왼쪽 끝 그분 우리 쪽 알바예요.


실장님이 하객석을 보시더니 이러셨습니다.


어디요.


그분이 아직 앉아 계셨어요. 식이 끝나고 다들 사진 찍으러 나가는데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제가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실장님이 그쪽을 한참 보시더니 이러셨습니다.


아무도 없는데요.



단체사진


결혼식 끝나면 단체사진을 찍습니다.


슬롯자도 가끔 찍혀요. 신랑이 친구면 같이 찍자고 부르거든요.


저는 대개 안 찍힙니다. 그 시간에 다음 탕으로 이동해야 하니까요.


작년 여름에 친구 결혼식 슬롯를 봤습니다.


돈 안 받고 봤어요. 대학 동기라서요.


그 친구가 나중에 사진을 보내줬습니다. 단체사진이요.


셋째 줄 자리에서 일어나서 찍으니까 줄은 다르게 섰는데 왼쪽 끝에 그분이 계셨어요.


정장을 입고 계셨습니다.


다른 하객들은 다 웃고 있는데 그분만 입을 다물고 계셨어요.


카메라를 보고 계셨습니다.


친구한테 물어봤어요.


이 왼쪽 끝 분 누구야.


친구가 이랬습니다.


우리 쪽 친척 아니야.


부모님께 여쭤보라고 했어요.


다음 날 연락이 왔습니다.


부모님도 모르신대.


그러면 신부 쪽이냐고 물었어요.


신부 쪽도 모른대.


친구가 마지막에 이렇게 보냈습니다.


근데 방명록에 이름 있더라.



방명록


방명록을 보여달라고 했어요.


친구가 사진 찍어서 보내줬습니다.


이름이 있었어요.


한자로 쓰여 있었습니다. 요즘 방명록에 한자로 쓰는 사람 거의 없어요.


붓펜으로 쓴 것 같았습니다.


그 이름을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 뒤로 제가 슬롯 본 결혼식마다 방명록을 봤어요.


식 끝나고 축의대에 가서 슬쩍 봅니다. 슬롯자니까 아무도 뭐라고 안 해요.


그분 이름이 있었습니다.


매번 있었어요.


같은 한자 같은 붓펜 같은 글씨요.


한자를 찾아봤습니다.


옥편 앱에 넣으면 뜻이 나와요.


첫 글자는 흔한 성이었습니다.


둘째 글자하고 셋째 글자는 뜻이 이상했어요.


둘째가 자리 석이었고 셋째가 빌 공이었습니다.


빈자리요.


이름이 빈자리입니다.


이게 이름이냐고 제가 혼잣말을 했는데 옆에 있던 축의대 알바생이 이랬어요.


이름 예쁘네요.



축의금


축의금 봉투도 봤습니다.


이건 좀 선을 넘은 건데 한 번만 넘었어요.


축의대 담당하시는 분한테 그 이름 봉투 있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찾아주셨어요.


있었습니다.


흰 봉투였어요. 요즘은 봉투에 예쁜 무늬가 있는데 그건 아무것도 없는 흰 봉투였습니다.


두께가 얇았어요.


그분이 열어보셨습니다.


지폐가 한 장 있었어요.


만 원짜리였는데 요즘 만 원짜리가 아니었습니다.


색이 달랐어요. 크기도 좀 컸습니다.


축의대 분이 이러셨어요.


이거 옛날 돈이네요.


그분이 좀 웃으시면서 이러셨어요.


이거 요즘도 은행에서 바꿔주나.


저는 그때 안 웃었습니다.



사진 작가


웨딩 사진 찍는 형님이 있습니다.


같이 다니는 날이 많아요. 업계가 좁아서 같은 식에 자주 걸립니다.


그 형님은 15년 했어요. 카메라 두 대를 목에 걸고 다니는데 그게 형님 몸의 일부입니다.


작년 여름에 식 끝나고 담배 피우면서 물어봤어요.


형님 요즘 사진에 이상한 거 안 찍혀요.


형님이 담배를 입에서 떼더니 이랬습니다.


셋째 줄.


저는 그때 등이 좀 서늘했어요.


형님도 봤냐고 물었습니다.


형님이 이랬어요.


눈으로는 못 봤어. 찍으면 나와.


언제부터냐고 물었습니다.


작년 봄.


형님이 담배를 비비면서 이렇게 덧붙였어요.


근데 너 있는 식에만 나와.


저 없는 식은요 했습니다.


형님이 이랬어요.


안 나와. 나 그거 세어봤어.


형님은 그 뒤로 제가 슬롯 보는 식은 셋째 줄 왼쪽을 안 찍습니다.


프레임에서 뺀대요.


단체사진은 어쩔 수 없어서 찍고 나중에 지운대요.


포토샵으로 지우는데 지운 자리가 자꾸 뭉개진대요.


사람 모양으로요.



입


작년 가을부터 그분이 제 멘트를 따라 합니다.


단상에서 보면 보여요.


제가 지금부터 하면 그분 입이 지금부터 합니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어요.


결혼식 멘트는 다 비슷하니까 하객 중에 따라 하는 분이 가끔 계세요. 결혼식 많이 다녀본 분들은 다음 멘트를 압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보다 먼저 합니다.


반 박자쯤 먼저요.


제가 신랑 입장 하기 전에 그분 입이 신랑 입장을 합니다.


한 번은 제가 일부러 멘트를 바꿨어요.


신랑 입장 대신에 오늘의 주인공 신랑이 입장합니다 했습니다.


그분 입이 먼저 그렇게 움직였어요.


제가 바꾼 걸 먼저 했습니다.


저는 그날 성혼선언문을 한 줄 건너뛰었어요.


9년 만에 처음 틀렸습니다.


아무도 몰랐어요.


그분만 알았습니다.


그분 입이 제가 건너뛴 줄을 하고 있었거든요.



대바카라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9년 동안 신랑 신부 울리고 웃긴 사람이 하객 한 명한테 질 수는 없잖아요.


첫 번째 대바카라은 셋째 줄 왼쪽 끝에 사람을 앉히는 거였어요.


식 시작 전에 신랑 쪽 친척한테 부탁했습니다. 저기 좀 앉아주시겠어요 하고요.


앉으셨어요.


식이 시작되고 단상에서 보니까 그분이 그 옆에 계셨습니다.


끝이 한 칸 밀린 겁니다.


그리고 친척분이 식 중간에 일어나서 나가셨어요.


화장실 가시는 줄 알았는데 안 돌아오셨습니다.


식 끝나고 여쭤봤더니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나가셨다고 했어요.


어디가 안 좋으셨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이러셨어요.


옆이 너무 추워서.


두 번째 대바카라은 셋째 줄 왼쪽 끝 의자를 빼는 거였습니다.


웨딩홀 직원한테 부탁해서 그 자리 의자를 뺐어요.


식이 시작됐습니다.


그분이 서 계셨어요.


의자 없는 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그날 제가 멘트를 하는데 목소리가 좀 떨렸어요.


신부 어머니가 끝나고 저한테 이러셨습니다.


슬롯자님 오늘 감동하셨나 봐요.


저는 네 하고 웃었어요.


세 번째 대바카라은 없습니다.


생각이 안 났어요.



신랑 신부


그분이 계셨던 결혼식이 몇 쌍인지 세어봤어요.


작년 봄부터 지금까지 제가 본 게 이백 쌍쯤 되는데 그중에 서른 쌍 정도입니다.


그 서른 쌍을 찾아봤어요.


요즘은 다 인스타가 있잖아요. 신랑 신부 이름으로 검색하면 나옵니다.


이건 제가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그때는 멈출 수가 없었어요.


다 잘 삽니다.


신혼여행 사진 있고 집들이 사진 있고 1주년 사진 있어요.


그런데요.


집들이 사진 배경에 그분이 계셨습니다.


한 쌍이 아니에요.


제가 찾은 서른 쌍 중에 스물몇 쌍 사진에요.


거실 구석이나 부엌 문간이나 베란다 쪽에 서 계세요.


정장을 입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웃는데 입을 다물고 카메라를 보고 계세요.


돌잔치 사진에도 계셨습니다.


아기 뒤에요.


사진 올린 사람들은 아무도 그분 얘기를 안 해요.


댓글에도 없습니다.


안 보이는 거예요.



다음 달


제가 결혼합니다.


다음 달이에요.


9년 동안 남의 결혼식만 봤는데 제 차례가 왔습니다.


예비 신부는 좋은 사람이에요. 제 멘트를 한 번도 안 웃어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혼합니다.


슬롯는 제가 안 봅니다. 자기 결혼식 슬롯를 자기가 보면 좀 그렇잖아요.


후배한테 맡겼어요. 제가 키운 애예요. 목소리는 저보다 못한데 멘트는 저보다 낫습니다.


웨딩홀도 제가 제일 많이 간 데로 안 했어요. 일부러 처음 가는 데로 했습니다.


그분이 모르는 데로요.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지만 그래도 했어요.


예비 신부한테는 이 얘기를 안 했습니다.


말하면 결혼을 미루자고 할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논리적이라서 이상한 얘기를 들으면 일단 멈춥니다.


저는 안 멈추고 싶었어요.


9년 동안 남의 결혼식에서 다들 행복하게 사세요 했습니다.


1500번 넘게 했어요.


한 번쯤은 저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이게 좀 한심한 소원인 거 압니다.


슬롯자가 자기 결혼식에서 제일 듣고 싶은 게 남이 하는 멘트라니요.


근데 진짜 그래요.


제 멘트 말고 남의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신랑 누구 군과 하고요.


그래서 후배한테 맡긴 거예요.


후배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요.



좌석 배치


어제 예비 신부가 좌석 배치표를 보내줬습니다.


요즘은 앞쪽 몇 줄은 지정석으로 해요. 가족하고 친척이요.


제가 확인해야 할 게 저희 쪽 친척 자리였어요.


셋째 줄을 봤습니다.


왼쪽 끝이요.


이름이 있었어요.


한자로요.


저는 그 자리에 앉아서 한 오 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러고 예비 신부한테 전화했어요.


셋째 줄 왼쪽 끝 이 사람 누구야.


예비 신부가 이랬습니다.


오빠 쪽 손님이잖아.


나 이 사람 모른다고 했어요.


예비 신부가 좀 조용하더니 이랬습니다.


오빠가 넣으라며.


언제 그랬냐고 물었어요.


지난주에 오빠가 불러줬잖아. 이 분은 꼭 셋째 줄 왼쪽 끝에 앉혀야 한다고.


저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예비 신부가 마지막에 이랬어요.


그리고 오빠 그분 옆자리는 비워두래서 비워놨어.



오늘


오늘도 두 탕 뛰었습니다.


두 탕 다 그분이 계셨어요.


셋째 줄 왼쪽 끝이요.


두 번째 식 끝나고 제가 처음으로 그분한테 걸어갔습니다.


단상에서 내려와서 하객석을 가로질러 갔어요.


사람들이 사진 찍으러 다 나가고 그분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그분 앞에 섰습니다.


뭐라고 할지 생각해뒀어요. 9년 동안 말로 먹고살았으니 한마디쯤은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입을 열었어요.


소리는 안 났습니다.


입모양만 있었어요.


제가 읽을 수 있었습니다.


9년 동안 하객 입모양은 다 읽었으니까요.


지금부터 신랑 누구 군과 신부 누구 양의.


신랑 이름 자리에 제 이름이 있었어요.


신부 이름 자리에 예비 신부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그분이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어요.


앉으라는 거였습니다.


저는 안 앉았어요.


뒤돌아서 나왔습니다.


나오면서 한 번 돌아봤어요.


그분이 여전히 옆자리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결혼식까지 3주 남았어요.


좌석 배치표는 아직 수정 가능합니다.


예비 신부한테 셋째 줄 왼쪽 끝을 빼달라고 할 생각이에요.


그런데 뺀다고 해서 그분이 안 앉으실까요.


작년 봄부터 그분 자리는 한 번도 배치표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늘 앉으셨어요.


배치표에 이름이 올라간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처음으로 초대받으신 겁니다.


제가 불렀다고 하니까요.


오늘 밤에 후배한테 전화할 생각입니다.


식순 한 번 맞춰보자고 할 거예요.


후배가 멘트를 해보면 제가 들어보려고요.


지금부터 신랑 누구 군과 신부 누구 양의.


후배 목소리로 그걸 들으면 좀 나을 것 같아요.


한 가지가 걸립니다.


어제 후배한테서 문자가 왔어요.


형 결혼식 슬롯 제가 보는 거 맞죠.


맞다고 했습니다.


후배가 이렇게 보냈어요.


근데 형 저 식순 받았는데 슬롯자 칸에 형 이름 있던데요.


제가 보낸 적 없다고 했습니다.


후배가 사진을 보내줬어요.


식순표였습니다. 웨딩홀 양식이에요.


슬롯자 칸에 제 이름이 있었습니다.


신랑 칸에도 제 이름이 있었어요.


저는 그 사진을 보면서 좀 웃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면 웃는 버릇이 있어요. 9년 동안 결혼식장에서 생긴 버릇입니다.


신랑이 슬롯를 보면 누가 입장합니까.


그러면 셋째 줄 왼쪽 끝 옆자리는 누구 자리일까요.


1500번 넘게 슬롯를 봤는데 이 질문에는 멘트가 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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