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에르메상스 오스망뜨 윈난

by김경훈

냄새가 먼저 왔다.


저녁 산바카라길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끼고 도는 길목에서 바람이 한 번 방향을 바꿨는데 그때 무언가가 코에 닿았다. 달았다. 살구를 반으로 갈랐을 때처럼 달고 그 아래에 차를 우린 물 같은 쌉싸름함이 있었다. 바람이 멎자 사라졌고 다시 불자 돌아왔다.


탱고가 먼저 멈췄다.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코를 들었다. 나보다 먼저 방향을 잡은 것이다.


보보가 주변을 둘러보다 화단 쪽에서 작은 주황색 꽃이 다닥다닥 붙은 나무를 찾아냈다. 금목서였다.


보보는 2주쯤 지나면 옆에 흰 꽃이 필 거라고 했다. 은목서다. 금목서가 먼저 피고 은목서가 뒤를 잇는다. 은목서 쪽이 향이 더 맑고 옅어서 보보는 그쪽을 더 좋아한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짙은 쪽이 먼저 오고 옅은 쪽이 나중에 오는 순서가 가을이라는 계절과 닮았다는 생각만 했다.


나무보다 향이 먼저 도착하는 꽃이 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 나무를 만리향이라고도 불렀다. 향이 만 리를 간다는 뜻이다. 과장이지만 틀린 과장은 아니다. 가지 하나를 꺾어 좁은 방에 두면 2분 만에 방을 채우고 5분이 넘으면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꽃은 오래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남부지방에서는 9월 중순에서 말 사이에 피기 시작해 중부로 올라가며 10월 초에 절정을 맞는다. 한 그루의 개화 기간은 1주에서 2주 남짓이다. 여름 더위를 겪고 나서 서늘한 기온에 일정 기간 노출되어야 꽃눈이 트는데 그 조건이 맞는 날이 1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


추위에 약해서 예전에는 남쪽에서나 볼 수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조경수로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했고 기후가 바뀌면서 심을 수 있는 지역이 점점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대구 화단에 금목서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온의 기록이다.


그러니 지금 이 향을 맡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초가을에만 열리는 문이다.



이 나무에는 이름 문제가 있다.


중국에서 목서는 계(桂)라고 부른다. 금목서는 금계 은목서는 은계다. 계림이라는 지명도 이 나무에서 왔다. 그런데 같은 글자가 계피를 얻는 육계나무도 가리킨다. 그리고 한국에는 계수나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나무가 있다. 셋 다 계라는 글자를 달고 있는데 셋 다 다른 식물이다.


달나라 계수나무 이야기도 여기서 꼬인다.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 그 달 속의 나무 말이다. 연구자들은 그 원형이 목서라고 본다. 가을에 향기로 존재를 드러내는 나무이니 가을 달과 짝지어졌을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목서를 직접 본 적이 없으면서도 상서로운 나무로 여겼다. 실물 없이 이름만 건너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의 계수나무도 가을에 단내를 풍긴다는 점이다. 10월에 잎이 노랗게 물들면 떨어진 잎에서 솜사탕 같은 냄새가 난다. 잎이 바스러지면서 당 성분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한 글자 아래 세 나무가 있고 그중 둘이 가을에 달콤한 냄새를 낸다. 표제어를 정리하는 사람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이다. 같은 이름이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것을 동음이의라고 하고 같은 대상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이명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는 둘이 뒤엉켜 있다. 게다가 전설이 끼어들어 가장 유명한 나무가 실재하는지조차 흐릿하다.


"저는 이름보다 냄새로 찾으시는 편이 빠릅니다."


맞는 말이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이름이 아니라 코로 그 나무를 찾았다. 표제어가 엉켜 있을 때 가장 확실한 식별자는 결국 실물이다. 목록에서 헤매는 대신 서가로 가서 바카라을 직접 꺼내 보는 것과 같다. 다만 이 나무는 1년에 2주만 서가에 꽂혀 있다.



오스망뜨 윈난은 이 꽃을 주인공으로 세운 향수다. 2005년에 에르메스의 에르메상스 컬렉션으로 나왔고 조향사는 장 클로드 엘레나다. 중국을 여행하던 중에 만난 오스만투스의 향을 테마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윈난은 중국 남서부의 지명이고 차의 산지로 유명하다.


엘레나는 식물을 분류하는 방식이 독특한 사람이다. 그가 쓴 바카라 『향수가 된 식물들』은 향을 냄새의 성격이나 꽃의 색으로 나누지 않는다. 껍질과 잎과 열매와 꽃과 씨앗과 뿌리로 나눈다. 식물의 어느 부위에서 향이 오는가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분류 체계를 다루는 사람 입장에서 이 선택이 흥미롭다. 향을 향으로 분류하면 주관이 개입한다. 누군가에게 달콤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느끼하다. 반면 부위로 분류하면 누가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뿌리는 뿌리다. 감각이 아니라 출처로 정리하는 방식이다. 도서관이 바카라을 내용의 인상이 아니라 주제와 형식으로 분류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첫 향은 차다. 녹차와 백차 사이 어딘가에 있는 맑은 찻물이다. 여기에 오렌지 껍질의 쌉싸름함이 얹힌다. 달콤한 과육이 아니라 껍질이다. 입구부터 절제되어 있다.


"처음부터 달면 끝까지 버티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오스만투스가 온다. 오늘 저녁 화단에서 맡은 그 냄새다. 살구 같은 단내가 있고 그 아래에 아주 옅은 가죽 기운이 깔려 있다. 오스만투스라는 꽃이 원래 그런 결을 갖고 있다. 과일과 가죽이 한 꽃 안에 있다.


엘레나는 이 가죽 기운을 조금 거들었다. 어느 시향자는 이것이 밀크티 같은 인상을 준다고 썼고 다른 이는 오스만투스의 단내가 쉽게 질리는 것을 가죽으로 조절했다고 분석했다. 이 연재 14호와 15호에서 가죽을 두 번 다뤘는데 거기서는 가죽이 주인공이었다. 여기서는 설탕을 덜어내는 도구로 쓰였다. 같은 재료가 이렇게 다른 일을 한다.


프리지아가 옆에서 맑게 받쳐 주고 베이스에서 살구가 조금 더 짙어진다. 그리고 그 뒤로는 향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꽃으로 단맛을 낸 차 한 잔의 인상이 끝까지 간다.


이 인상은 상상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목서꽃을 먹고 마셨다. 갓 딴 꽃에서 줄기와 불순물을 골라내고 소금물로 씻어 말린 다음 설탕이나 꿀에 재워 발효시킨다. 그렇게 만든 잼 같은 것을 떡과 과자에 넣고 찻잎에 섞어 향을 입힌다. 꽃을 차에 띄우는 일은 그곳에서는 부엌의 기술이었다.


엘레나가 한 일은 그 부엌의 기술을 병으로 옮긴 것이다. 새로운 조합을 발명한 게 아니라 수백 년 된 조합을 받아 적었다. 향수가 늘 새것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런 경우는 기록에 가깝다.



확산은 작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맡지 못한다. 손목에 코를 대야 비로소 있다. 어느 시향자는 이 향수가 지속력이 곧 품질이라는 요즘의 흐름을 다행히 거부한다고 썼다. 일기를 쓰거나 시를 읽을 때 뿌리기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 리를 간다는 꽃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향수는 한 뼘도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모순이 이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그게 맞다. 금목서 나무 옆에서 금목서 향수를 뿌릴 이유가 없다. 이 향수는 나무가 없는 계절과 없는 장소를 위한 것이다. 1년에 2주 열리는 문을 나머지 50주 동안 손목에 붙잡아 두는 방법이다.



집에 돌아와 손목을 맡으며 창을 조금 열었다. 바람이 방향을 맞추면 아까 그 나무 냄새가 여기까지 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오지 않았다. 만 리는 과장이었던 모양이다.


대신 손목에서 찻물과 살구가 조용히 남아 있었다. 원본은 저 화단에 있고 여기에는 사본이 있다. 원본은 2주 뒤에 사라지고 사본은 병이 비워질 때까지 남는다.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적었듯이 기록은 원본이 사라진 뒤에야 제 역할을 시작한다.


탱고가 발치에서 한숨처럼 숨을 내쉬고 몸을 눕혔다. 저녁 산바카라이 끝났다는 걸 아는 소리였다. 내일도 그 길목을 지나자고 하면 이 녀석은 아마 오늘 멈췄던 자리에서 또 멈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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