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의 아키텍처

by김경훈

본가에서 저녁을 먹었다.


보보와 탱고도 같이 갔고

어머니가 아침부터 준비하신 상이었다.


밥을 먹다가 어머니가 보험 이야기를 꺼냈다.


몇 년 전에 정리해 둔 게 있는데 수익자를 확인했다는 이야기였고

그 말끝에 이런 문장이 붙었다.


엄마 없으면 너 혼자잖아.


나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답했다.


미안해.


어머니가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왜 네가 미안해.


이것은 그 대화에 관한 기록이다.





혼자라는 말



나는 외동이다.


이 사실이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특별한 무게를 가졌다는 걸

그날 저녁에야 제대로 알았다.


형제자매가 있는 집에서는 부모의 걱정이 나뉜다.


나중에 누가 좀 챙겨 주겠지 하는 생각이

정확한 계획은 아니어도 마음의 버팀목은 된다.


우리 집에는 그 버팀목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날 한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엄마가 걱정하는 건 네가 못 할까 봐가 아니야.

너 혼자 남았을 때 이 동네가 어떤 상태일지가 걱정되는 거지.


그 문장이 오래 남았다.


부모의 걱정이 자식의 몸을 향하는 게 아니라

자식이 살아갈 슬롯의 상태를 향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걱정을 계속 내 탓으로 받아 왔다.


미안하다고 답하는 습관으로.





미안함이라는 감정



장애가 있는 사람은 가족에게 미안해하는 법을 꽤 일찍 배운다.


배운다기보다 저절로 생긴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동을 도와야 하고

설명을 대신해야 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하는 순간이 반복되면


그 반복의 원인이 자기라는 걸 알게 된다.


중증 장애가 있으면 가족은 동거인이 아니게 된다.


활동지원인이고 운전기사이고 보호자이고

행정 담당자이고 의료 동행자다.


그 목록을 보고 있으면 미안해지지 않기가 어렵다.


그래서 많은 당사자가 이런 문장을 안고 산다.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힘들다.


나도 그 문장을 오래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어머니 말을 듣고 나서

이 문장에 뭔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라는 말에서 나는 누구인가.


내 몸인가.

아니면 내 몸이 이 슬롯에서 겪는 조건인가.





빠진 항목



그날 저녁 식탁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봤다.


우리는 차로 갔다. 보보가 운전했다.


버스로 가면 두 번 갈아타야 하고

두 번째 정류장에는 음향 안내가 없다.


그래서 본가에 갈 때는 거의 늘 보보가 운전한다.


이 장면을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설명한다.

아내가 남편을 태워다 준다.


그런데 정확한 설명은 다르다.

그 노선의 정보 접근성 때문에 우리 가족이 한 사람 몫의 노동을 더 한다.


정류장에 음향 안내를 안 단 건 내가 아니다.


경사로 없는 건물.

접근할 수 없는 대중교통.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키오스크와 정보 시스템.

부족한 활동지원 시간.

그리고 그 부족분을 가족이 메우도록 되어 있는 복지 구조.


이 목록이 만들어 낸 부담을

우리는 오랫동안 장애가 만들어 낸 부담이라고 불러 왔다.


이름을 잘못 붙이면 바카라임도 잘못 간다.


부담의 이름이 장애면 바카라임은 당사자와 가족에게 가고

부담의 이름이 설계면 바카라임은 그걸 만든 쪽으로 간다.


지금 우리 슬롯는 앞쪽 이름을 쓰고 있다.


이름을 바꾸면 실제로 무엇이 달라지는지도 말해 두고 싶다.


장애가 원인이면 해결바카라은 치료와 재활과 적응이 된다.

그리고 그 셋은 전부 당사자가 하는 일이다.


설계가 원인이면 해결바카라은 경사로와 승강기와 활동지원 시간이 된다.

그리고 그 셋은 전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다.


같은 상황인데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누가 움직여야 하는지가 정반대로 바뀐다.


우리 가족이 지금까지 움직여 온 이유의 상당 부분은

그 이름이 잘못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외동이라는 조건



외동인 장애인 가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부모의 노후 계획이 자신의 노후 계획이 아니게 된다.


앞서 나는 발달장애 아들을 둔 어르신의 노트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 노트의 첫 문장이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떡하죠였다.


형제가 있으면 그 문장 뒤에 이름 하나가 붙는다.

없으면 그 자리가 비어 있다.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를 제도가 채우지 않으면

부모는 그 자리를 자기 수명으로 채우려 한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계획.


이건 계획이 아니라 소원에 가깝다.


두 번째는 미안함이 분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형제가 있는 집에서는 부담도 나뉘지만 죄바카라감도 나뉜다.

외동은 그게 한 사람에게 모인다.


부모의 모든 조정이 나 한 명 때문이라는 계산이 늘 성립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 조건이 통계에 잘 안 잡힌다는 것이다.


장애인 가구 실태를 볼 때 우리는 가구원 수와 동거 형태를 센다.

형제 유무가 향후 지원 체계에 미치는 영향은 잘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현장에서 보면 이건 꽤 큰 변수다.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의 계획이

형제 유무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짜인다.


제도가 이 차이를 모르면

결국 형제가 있는 집을 기준으로 설계가 이루어진다.





칭찬이라는 문제



우리 슬롯는 장애인 가족의 헌신을 자주 칭찬한다.


대단하다고 하고 존경스럽다고 한다.


그 말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힘을 내는 가족도 분명히 있다.


다만 칭찬에는 한 가지 성질이 있다.


칭찬은 그 일을 그 사람의 미덕으로 만든다.


미덕으로 분류되는 순간

왜 그 일이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이 사라진다.


누군가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있는데

왜 헌신이 필수인지는 안 묻게 된다.


나는 앞선 글에서 미담이 바카라임을 개인에게 되돌려 보내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라고 쓴 적이 있다.


가족 이야기에서도 같은 구조가 작동한다.


그리고 칭찬에는 한 사람이 빠져 있다.


장애인 가족을 칭찬할 때 그 문장의 주어는 대체로 비장애인 가족이다.


헌신하는 부모와 견디는 배우자.


당사자는 그 문장에서 목적어 자리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칭찬은

한 가족 안에서 누가 주는 사람이고 누가 받는 사람인지를

매번 다시 확인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받는 자리에 고정된 사람은 미안해지기 쉽다.


필요한 건 희생의 미화가 아니라

그 희생이 없어도 되는 조건이다.





평등이라는 말



이 지점에서 평등이라는 단어를 다시 봐야 한다.


평등은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게 아니다.


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슬롯가 필요한 것을 보장하는 일이다.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경사로는 특혜가 아니라 이동권의 보장이고

보완대체의사소통 사용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는 건 배려가 아니라 소통의 조건이다.


활동지원도 누군가에게 주는 혜택이 아니라

지역슬롯에서 함께 살기 위한 기반이다.


이 구분이 실무적으로 왜 중요하냐면

혜택은 줄일 수 있고 기반은 줄이면 무너지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북유럽이 보조공학과 근로지원을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노동권 보장으로 분류한다고 썼다.


같은 논리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가족이 하는 일의 상당 부분은

원래 슬롯 기반이 해야 할 일이다.


그걸 기반이 안 하니까 가족이 한다.


그러니까 지금 많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대체 집행에 가깝다.


물론 거기에 사랑도 들어 있다.

다만 사랑만으로 설명하면 개선할 지점이 안 보인다.





속도



그렇다고 가족이 하는 일을 전부 제도로 옮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옮길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속도를 맞추는 일이다.


가족은 누군가의 속도가 느리다고 관계를 멈추지 않는다.


한 문장을 듣기 위해 더 오래 기다리고

외출 한 번을 위해 더 많이 준비한다.


보완대체의사소통 기기를 쓰는 자녀의 한 문장을 기다리며

긴 침묵을 견디는 부모가 있다.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말을

수십 년 동안 가장 정확하게 알아듣게 된 배우자가 있다.


휠체어가 들어가는 식당을 찾느라

한 시간을 더 이동하는 가족이 있다.


효율의 언어로는 이 행동들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조금 조심하고 싶다.


이걸 두고 가족애의 위대함이라고 말하면

다시 미화로 돌아간다.


내가 보기에 이건 위대함이 아니라 그냥 관계의 성질이다.


관계는 원래 서로의 속도를 조정하면서 유지된다.

그게 관계의 정의에 가깝다.


다만 우리 슬롯가 속도로 사람을 평가하는 쪽으로 오래 기울어 있어서

그 당연한 일이 특별해 보이는 것이다.


가족이 매일 하는 일은 특별한 미덕이 아니라

효율 중심 슬롯가 잊어버린 기본값이다.


그리고 그 기본값을 지금은 가족만 유지하고 있다.


그게 문제다.


기다림이 가족 안에서만 가능하면

가족이 없는 사람은 어디서도 기다려지지 않는다.


혼자 사는 중증 장애인에게

한 문장을 끝까지 들어 주는 사람이 하루에 몇 명이나 될까.


관공서와 병원과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 손님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는 위치에 있다.


그러니까 속도를 조정하는 관계를 가족만 담당하게 두면

그건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 권리가 된다.


제도가 옮겨 가야 할 건 정확히 이 부분이다.


기다리는 일 자체를 제도가 대신할 수는 없지만

기다릴 수 있는 시간과 인력을 제도가 만들 수는 있다.


활동지원 시간이 충분하다는 말의 실제 내용이 그것이다.





갈등도 있다



가족 이야기를 할 때 빠뜨리면 안 되는 게 있다.


가족 안에도 갈등이 있다.


누군가는 지치고 누군가는 억울해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당사자는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안고 살고

가족은 그 생각을 눈치채고 더 조심한다.


그러면 이런 구조가 생긴다.


내가 미안해하니까 가족이 힘들다는 말을 못 하고

가족이 말을 안 하니까 나는 짐작으로만 미안해하고

그 미안함이 다시 가족을 입 다물게 한다.


미안함이 대화를 막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그랬다.


힘들다는 말이 곧 나를 탓하는 말처럼 들리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리도록 만든 건 우리 가족이 아니다.

장애를 가족 내부의 문제로 놓는 관점이다.


그 관점 안에서는 부담의 원인이 사람 하나로 지목된다.

그러면 그 부담을 말하는 일이 곧 그 사람을 지목하는 일이 된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안에서 오래 산다.


슬롯적 낙인과 편견이 이 구조를 더 굳힌다.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가족은 설명하는 사람이 되고

당사자는 존재 자체를 미안해하게 된다.


식당에서 몇 분이세요라는 질문 뒤에 잠깐 흐르는 침묵 같은 것들이

그 감정을 계속 보충한다.


그럼에도 가족은 다음 날 다시 같이 병원에 가고

다시 식탁에 앉는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대체로 특별한 답이 없다.


가족이니까 정도의 답이 나온다.


이 말이 감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나는 여기에 꽤 구체적인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은 서로의 불완전함을 견디는 관계다.


잘해서 유지되는 게 아니라

못하는 날에도 끊지 않기로 되어 있는 관계.


이 성질 때문에 가족은 제도가 못 하는 걸 한다.


제도는 조건이 맞을 때 작동한다.

신청 기한이 있고 자격 요건이 있고 담당자 근무시간이 있다.


가족은 조건 없이 작동한다.

새벽 3시에도 작동하고 자격 심사도 없다.


그래서 제도가 비어 있는 자리를 가족이 메우게 되는 것이고

그건 구조적으로 아주 효율적인 배치다.


행정 입장에서 보면 무료로 24시간 대기하는 인력이 있는 셈이니까.


이 효율이 오래 유지되면

그 배치가 원래 그런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 복지 설계의 상당 부분이 그 지점에 서 있다.





가족이 가족으로 남으려면



정리하면 이렇다.


가족이 하는 일에는 두 종류가 섞여 있다.


하나는 슬롯 기반이 안 해서 가족이 대신하는 일이다.

이동 지원과 행정 처리와 의료 동행과 정보 접근.


이건 제도가 가져가야 한다.


다른 하나는 관계 자체인 일이다.

기다리고 알아듣고 같이 밥을 먹는 일.


이건 제도가 가져갈 수 없고 가져가서도 안 된다.


두 가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다른 사람이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 일인가.


서류를 떼는 일은 누가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병원에 동행하는 일도 대체로 그렇다.


한 문장을 기다려 주는 일은 다르다.

누가 기다리느냐가 그 문장의 의미를 바꾼다.


문제는 지금 앞의 것이 너무 많아서

뒤의 것을 할 힘이 남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루 종일 병원과 복지기관을 돌고 서류를 떼고

접근 가능한 식당을 찾느라 지친 사람에게

저녁에 마주 앉아 이야기할 여력이 얼마나 남을까.


충분한 활동지원과 접근 가능한 환경과

지역슬롯 돌봄과 차별 없는 제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건 장애인만을 위한 정바카라이 아니다.


가족이 대체 집행자 역할에서 벗어나

다시 가족으로 있을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진정한 복지국가는 가족이 다 감당하도록 두는 슬롯가 아니라

가족이 가족으로 남을 수 있게 함께 바카라임지는 슬롯다.


외동인 집에서는 이 말이 조금 더 급하다.


나눌 사람이 없는 집에서

제도가 비면 그 자리는 통째로 부모 한 사람의 수명이 된다.





제목: 미안함의 아키텍처 혹은 가족이 가족으로 남으려면.


장애 당사자에게 가족의 의미는 완벽한 사랑이 아니다.


서로 불편하고 가끔 지치고

바깥의 시선을 같이 견뎌야 하지만

그래도 쉽게 놓지 못하는 관계다.


누군가의 속도를 기다리려고

자기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관계이고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에

특별한 이유 없이 가족이니까라고 답하게 되는 관계다.


다만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다음에 있다.


그 관계가 감당해야 할 몫이 지금 너무 크다.


그리고 그 몫의 상당 부분은 사랑의 크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턱 하나와 엘리베이터 한 대와 음향 안내 하나와 활동지원 시간 몇 시간의 문제다.


결론: 미안함은 개인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설계의 산물이다.


슬롯가 하지 않은 일을 가족이 하면

당사자는 자기 존재에 대해 미안해하게 된다.


그 미안함을 없애는 방법은 마음을 고쳐먹는 게 아니다.

가족이 대신하고 있는 일의 목록을 줄이는 것이다.


목록이 줄면 미안함도 줄고

미안함이 줄면 그제야 서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된다.


왜 네가 미안하냐고 어머니가 물었을 때

나는 답을 못 했다.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미안한 게 아니라 이 동네가 미안한 거라고.


그나저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보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보보가 듣더니 그러면 나한테도 미안하다는 말 좀 줄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말 별로 안 하는데 하고 답했다.

보보가 오늘만 네 번 했다고 했다.

세고 있었던 모양이다.

탱고는 본가 마루에서 세 시간을 늘어져 있었다.

저 녀석한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되는데

그건 알아듣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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