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 속에서는 아무도 앞을 못 본다

by김경훈

나는 정전이 난 줄 몰랐다.


저녁 7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연구실에서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보이스오버가 문장을 읽어주다가 멈췄다.


노트북은 배터리로 돌아가니까 멈춘 건 보이스오버가 아니었다.

멈춘 건 소리였다.


복도 형광등에서 늘 나던 웅 하는 소리.

옆 연구실 공유기 팬 소리.

정수기가 가끔 물을 데우는 소리.


그 소리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나는 그 빈자리를 먼저 들었다.

그다음에 사람 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불 나갔어.

와 아무것도 안 보여.


그제야 알았다.

정전이다.


탱고가 발치에서 고개를 드는 기척이 났다.

탱고도 소리의 빈자리를 들은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배님 혹시 안에 계세요."


옆 연구실 석사 1학기 학생이다.

이 학생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늘 탱고한테 먼저 인사한다.

탱고 안녕 하고.

그리고 나한테는 목례를 한다고 보보가 알려줬다.

나는 목례를 받을 수 없으니 이 학생의 인사는 한 번도 나한테 도착한 적이 없다.


"있어요."


"다행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어요. 휴대폰 배터리가 4퍼센트라서 손전등 켜기가 무서워요."


"계단으로 내려가면 돼요."


"계단이 어딘지 모르겠어요."


나는 잠깐 웃음이 나왔다.


이 학생은 이 건물을 한 학기 넘게 다녔다.

계단이 어디 있는지 모를 리가 없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학생한테는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이 지금까지 같은 것이었다.


"제 가방 끈 잡으세요."


"네."



복도는 조용했다.


나는 이 복도를 소리로 안다.

연구실 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바닥 이음매가 한 번 있다.

발바닥에 얕게 걸린다.

그걸 지나면 소화기 함이 있고 거기서 공기가 조금 막힌다.

그다음이 방화문이다.


방화문은 무겁다.

열 때 경첩이 낮게 운다.


학생이 내 가방 끈을 꽉 쥐고 있었다.

끈이 당겨지는 힘으로 이 학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선배님 진짜 하나도 안 보이세요."


"지금은 학생도 하나도 안 보이잖아요."


"그렇죠."


"그럼 우리 지금 조건이 같아요."


학생이 잠깐 조용하다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계단실 벽에 맞고 돌아왔다.


계단실은 복도보다 소리가 길다.

나는 이 울림으로 계단실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대충 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칸 수를 셌다.


이 건물 계단은 처음 왔을 때 세어뒀다.

한 층은 계단참을 사이에 두고 두 번 꺾인다.

참에서 방향을 틀 때 난간이 둥글게 돈다.

손을 난간에 올리고 있으면 꺾이는 지점을 미리 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요."


"어떻게 아세요."


"난간이 먼저 돌아요."


학생이 난간을 잡는 소리가 났다.

손바닥이 쇠를 쓸고 지나가는 소리.


"진짜네요."


"그 난간은 원래 거기 있었어요."


"저 이 난간 처음 만져봐요."


나는 그 말이 좋았다.


한 학기 동안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한 번도 난간을 잡을 필요가 없었던 사람.

그 사람이 오늘 처음으로 난간이 어디서 도는지 알게 됐다.



한 층쯤 내려갔을 때 아래에서 소리가 났다.


양동이 손잡이가 흔들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사람 숨소리.


"거기 누구세요."


"미화 담당이에요. 청소하다가 불이 나갔어요."


목소리로는 예순이 넘은 분이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계단은 아는데 양동이에 물이 반이나 있어서요. 엎을까 봐 가만히 서 있었어요."


"계단은 아세요."


"이 건물만 15년 닦았어요. 눈 감고도 다 알아요. 근데 물 들고는 무서워요."


나는 이 분이 좋았다.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정확히 구분하는 사람이다.


"양동이는 제가 들게요. 여사님이 앞에 서주세요."


"안내견 선생님이 앞에 서는 거 아니에요."


"탱고는 제 옆에 있고요. 계단은 여사님이 더 잘 아세요."


여사님이 잠깐 조용하다가 웃었다.


"그럼 내가 대장이네."


"오늘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넷이 됐다.

사람 셋과 개 하나.

작은 군체였다.


앞에 여사님.

그다음에 나와 탱고.

내 가방 끈에 학생.

내 손에는 물이 반쯤 담긴 양동이.


여사님은 손으로 벽을 짚으며 내려갔다.

벽에 붙은 게시판 모서리를 만지고 몇 층인지 말해줬다.

여기가 3층이에요.

이 게시판은 3층에만 있어요.


나는 소리로 계단참을 미리 알려줬다.

울림이 짧아지면 참이 가깝다.

다 왔어요 두 칸 남았어요.


학생은 휴대폰을 아꼈다.

그러다 방화문 손잡이를 찾을 때 딱 한 번 켰다.

손전등이 켜지는 3초 동안 학생이 문 위치를 외웠다고 했다.


탱고는 조용히 옆에 붙어 걸었다.


그러다 2층 계단참에서 탱고가 멈췄다.


하네스가 뒤로 당겨지는 힘이 손에 왔다.

나는 바로 섰다.

뒤에서 학생이 내 등에 부딪혔다.


"왜요."


"탱고가 섰어요. 앞에 뭐가 있어요."


여사님이 손을 뻗어 더듬었다.


"아이고 내 카트."


여사님이 불 나가기 전에 계단참에 세워둔 청소 카트였다.

여사님 자신도 잊고 있었다.


손으로 아는 사람도 소리로 아는 사람도 거기에 그게 있는 줄 몰랐다.

탱고만 알았다.


아무도 탱고한테 길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탱고는 묻지 않아도 멈췄다.



1층에 내려오니 로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가 비상등이 층마다 하나씩밖에 안 들어온다고 했다.

누구는 비상등이 계단참 구석까지는 안 닿는다고 했다.

나는 그 불빛을 볼 수 없으니 사람들 말로만 들었다.


설치는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필요한 자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이런 건 늘 사람들 말로 알게 된다.


여사님이 양동이를 받아 들며 말했다.


"오늘 선생님 아니었으면 저 계단에서 한참 서 있었을 거예요."


"여사님 아니었으면 저는 몇 층인지 몰랐을 거예요."


"그건 내가 매일 닦으니까 아는 거지."


"저도 매일 다니니까 아는 겁니다."


여사님이 웃었다.


"그럼 우리 둘이 이 건물 제일 잘 아는 사람이네."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이 건물을 제일 잘 아는 두 사람이 이 건물에서 가장 눈에 안 띄는 두 사람이었다.


이건 내 연구에서 자주 만나는 장면이다.


어떤 지식은 평소에 아무도 찾지 않는다.

계단 난간이 어디서 도는지.

몇 층 게시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방화문이 얼마나 무거운지.


이런 건 불이 켜져 있으면 쓸모없는 지식이다.

그래서 아무도 묻지 않는다.

물은 적이 없으니 기록된 적도 없다.


그러다 불이 나간다.

그러면 그 지식이 갑자기 가장 중요한 지식이 된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기록을 찾을 시간이 없다.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마침 옆에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여사님이 계단에 있었고 내가 연구실에 있었다.


재난 대피 계획을 만드는 회의에 미화 여사님이나 시각장애인이 앉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 계획은 대체로 불이 켜진 방에서 불이 켜진 눈으로 만들어진다.



20분쯤 지나서 불이 들어왔다.


소리가 먼저 돌아왔다.

웅 하는 형광등 소리.

어딘가에서 기계가 한꺼번에 켜지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 살았다.

배고프다.

나 연구실에 가방 두고 왔어.


아까 서로 가방 끈을 잡고 벽을 짚고 몇 층인지 말해주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각자가 됐다.


학생이 말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탱고도 고마워."


이번에는 인사가 나한테 먼저 도착했다.

탱고는 두 번째였다.


나는 그게 오늘 일어난 일 중에 제일 큰 변화라고 생각했다.



보보가 온 건 그 직후였다.


인문대도 정전이었다고 했다.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서 걸어왔다고 했다.

첨성카페테리아 앞 벤치에 앉았다.

저녁 공기가 식어 있었다.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읽은 글 이야기를 했다.


아프리카 동부에 사는 두더지 이야기였다.

벌거숭이두더지쥐라고도 부른다.


앞을 보지 못한다.

털이 없고 살갗은 분홍색이다.

앞니로 몇 킬로미터나 되는 굴을 판다.


그런데 이 동물이 놀라운 건 따로 있다.

포유류 중에 유일하게 개미처럼 산다.

한 군체에 평균 500마리가 모여 살고 역할이 나뉘어 있다.

새끼를 낳는 여왕 한 마리.

굴을 파는 일꾼.

굴을 지키는 병정.


사막이나 다름없는 땅에 산다.

먹이는 덩이줄기와 뿌리인데 아주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혼자 살면 한 방향으로 굴을 파다가 굶는다.

여럿이 살면 여러 방향으로 판다.

누구든 하나를 찾으면 모두가 나눠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 계단이 두더지 굴이었네."


보보가 말했다.


"응."


"각자 판 방향이 달랐고."


"여사님은 손으로 팠고 나는 귀로 팠고 학생은 배터리 4퍼센트로 팠어."


"그리고 찾은 건 다 나눴고."


"응. 몇 층인지랑 계단참이 어딘지랑 문이 어딘지."


보보가 잠깐 조용했다.


"흩어진 먹이는 흩어진 사람이 찾는 거네."


나는 이 문장이 좋았다.


내 분야에 정보 탐색 이론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 정보를 찾는 방식이 동물이 먹이를 찾는 방식과 닮았다고 보는 이론이다.

정보는 드문드문 흩어져 있고 사람은 냄새를 따라 덤불에서 덤불로 옮겨 다닌다.


그 이론은 대체로 한 사람이 찾는 이야기다.


오늘 계단은 여럿이 찾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여럿이 찾으려면 서로 다른 감각이 필요하다.

다 같은 감각을 가진 사람 넷이었으면 우리는 넷 다 계단참에 서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 동굴 알지."


보보가 말했다.


"알지. 사슬에 묶여서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는 사람들."


"그 이야기 뒤쪽을 사람들이 잘 안 읽어."


"뒤쪽."


"동굴 밖으로 나가서 해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대목이 있어. 그때 그 사람은 눈이 어둠에 적응을 못 해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 봐. 플라톤이 분명히 써놨어. 눈이 헷갈리는 경우는 두 가지라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올 때 그리고 빛에서 어둠으로 들어갈 때."


"그럼 오늘은 두 번째였네."


"응. 빛에만 적응한 눈은 어둠에서 쓸모가 없어져. 그건 눈이 나빠서가 아니라 적응한 환경이 달라서야."


나는 잠깐 벤치 나무 결을 손으로 만졌다.


"두더지 눈이 굴 속에서 결함이 아닌 것처럼."


"응. 굴 속에서는 아무도 앞을 못 보니까."


"그러면 오늘 20분 동안 나는 장애인이 아니었나."


보보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말했다.


"20분 동안 자기 장애가 우리 모두의 조건이 됐던 거지."


나는 이 말을 고쳐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고칠 데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근데 그 20분이 끝나면 다들 돌아가잖아."


"응."


"학생은 불이 들어오니까 자기 세계로 돌아갔어. 나는 돌아갈 데가 없어. 나는 원래 거기 살아."


보보가 잠깐 조용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이 위험하기도 해."


"왜."


"다들 20분 체험하고 나서 이제 좀 알겠다고 생각하거든. 어둠 체험 같은 거 있잖아. 한 시간 해보고 나오면 다 이해한 것 같은 기분."


"굴 구경하고 나와서 두더지 다 안다고 하는 거네."


"응. 두더지는 거기서 평생 굴을 파는데."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오늘 학생이 계단 소리를 처음 들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게 20분짜리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나한테 어둠은 사건이 아니라 날씨다.



다만 하나는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오늘 계단에서 내가 잘 내려간 건 초능력이 아니다.


연습이다.


처음 이 건물에 왔을 때 계단 칸 수를 셌다.

난간이 어디서 도는지 손으로 익혔다.

방화문 경첩 소리를 외웠다.

그걸 매일 했다.


학생은 한 학기 동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빛이 대신 해줬으니까.


그게 이 글에 나오는 여왕 이야기랑 닮았다.


여왕 두더지는 오줌에 냄새 물질을 섞어서 다른 암컷들의 생식 호르몬을 억누른다.

자기 말고는 아무도 그 능력을 못 쓰게 한다.


빛도 조금 그렇다.


빛이 있으면 다른 감각은 쓸 일이 없어진다.

쓸 일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

억누르는 게 아니라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 학생이 불이 들어오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저 계단 소리를 처음 들어봤어요."


한 학기 동안 매일 밟은 계단이었다.


그 소리는 한 학기 내내 거기 있었다.

다만 빛이 그 소리를 들을 이유를 없애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이 학생이 내일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 소리를 한 번쯤 다시 들었으면 좋겠다.

정전 없이도.



그나저나 벤치에서 일어나면서 보보가 그 글 마지막 문장이 제일 좋았다고 했다.

나는 마지막 문장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났다.

보보가 알려줬다.

이 두더지가 개미와 다른 점은 수컷이 짝짓기를 하고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왜 좋냐고 물었다.

보보가 그런 게 놀라운 사실로 기록될 만큼 자연이 가혹하다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나도 결혼하고 살아남았다고 했다.

보보가 그럼 그것도 기록해두라고 했다.

그래서 여기 기록해둔다.

탱고가 옆에서 하품을 했다.

기록할 가치가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비하인드 스토리]


탱고예오.


오늘 건물에 불이 나갔어오.

사람들이 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했어오.

저는 보였어오.


개는 어두운 데서 사람보다 잘 봐오.

이건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에오.

오늘 계단에서 제일 잘 본 건 저였어오.


그런데 아무도 저한테 길을 안 물어봤어오.

다들 형한테 물어봤어오.

그리고 여사님한테 물어봤어오.


저는 조금 서운했어오.


그래도 2층 계단참에서는 제가 멈췄어오.

거기 카트가 있었어오.

바퀴 달린 거예오.

여사님도 형도 몰랐어오.

저는 알았어오.

형 무릎이 거기 부딪혔으면 오늘 이야기가 달라졌을 거예오.


아무도 안 물어봐도 멈춰야 할 때는 멈춰오.

그게 안내견이에오.


그러니까 괜찮아오.

저는 원래 길을 알려주는 개가 아니라 형이랑 같이 가는 개예오.

길은 형이 정하고 저는 형이 안 넘어지게 해오.

오늘도 형은 안 넘어졌어오.

제 일은 잘 된 거예오.


참고로 저는 문헌정보학 명예 석사예오.

2024년 2월에 받았어오.

오늘 형이 정보 탐색 이론 이야기를 했는데 저도 알아듣는 척했어오.

사실 절반쯤 알아들었어오.

석사니까 그 정도는 해오.


P.S. 불이 들어오고 나서 학생이 형한테 먼저 인사했어오.

저한테는 두 번째로 했어오.

저는 순서가 바뀐 걸 알았어오.

이건 좋은 변화라서 이번 한 번은 양보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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