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 하나를 새로 들려고 했다.
큰일이 아니었다.
앱에서 상품을 고르고 약관에 동의하고 계좌를 연결하면 끝나는 일.
첫 번째 문 앞까지는 순조로웠다.
상품 설명이 화면 낭독기로 잘 읽혔고
금리와 기간도 문제없이 확인했다.
막힌 건 약관 동의 화면이었다.
동의 버튼이 비활성 상태였다.
낭독기가 이렇게 읽었다.
버튼. 사용할 수 없음.
이유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약관을 끝까지 스크롤해야 버튼이 활성화되는 구조였다.
나는 스크롤을 하지 않는다.
낭독기로 문서를 읽으면 항목에서 항목으로 순차 탐색을 한다.
화면은 그 움직임을 스크롤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는데
읽었다는 증명에 실패했다.
이것은 그날 내가 두드린 세 개의 문에 관한 기록이다.
첫 번째 문
이 장치의 취지는 나쁘지 않다.
약관을 안 읽고 동의하는 관행을 막으려고 만든 것이다.
소비자를 보호하려는 설계다.
그런데 이 설계가 확인하는 건 읽었는지가 아니다.
스크롤을 했는지다.
읽기를 스크롤로 대신 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둘은 얼추 붙어 있다.
화면을 내리면서 읽으니까.
낭독기 사용자에게는 떨어져 있다.
그리고 떨어져 있는 쪽이 실제로 더 꼼꼼히 읽는 쪽이다.
읽었다는 걸 증명하는 장치가
실제로 읽은 사람을 막는 구조.
이런 게 접근성 문제의 전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악의도 없고 무시도 없다.
그저 하나의 행동을 다른 행동으로 대신 재는 순간
그 대체가 성립하지 않는 몸이 생긴다.
금융에서 이런 대체 측정이 유난히 많은 건 이유가 있다.
바카라임 소재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분쟁이 생기면 은행은
이용자가 약관을 확인했다는 기록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확인했다는 증거를 남기는 장치가 계속 늘어난다.
스크롤과 체크박스와 자필 서명과 녹취.
그 장치들은 이용자를 보호하려고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은행을 보호하는 쪽으로도 작동한다.
그리고 증거를 남기기 어려운 몸은
그 절차 자체에서 배제된다.
보호 장치가 촘촘해질수록 문턱이 높아지는 구조가
금융에는 특히 많다.
두 번째 문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받은 건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원하시는 업무를 말씀해 주세요.
음성봇이었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약관 동의 버튼이 활성화되지 않는다고.
잠시 뒤 이런 답이 왔다.
약관 조회를 도와드릴까요.
다시 말했다.
동의 버튼이 눌리지 않는다고.
앱 이용 안내로 연결하겠다고 했다.
세 번째 시도에서 상담원 연결이라고 또박또박 말하니
잠시 대기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전체 과정에 6분쯤 걸렸다.
연결된 상담원은 친절했다.
그리고 내가 설명한 문제를 이해했다.
다만 해결은 못 했다.
그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앱을 다시 설치해 보라는 안내와
개발팀에 전달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이건 그 상담원의 잘못이 아니다.
앱에서 막힌 절차를 창구 쪽에서 대신 처리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상담 경로가 있다는 것과
그 경로가 앞 단계의 실패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전화가 연결돼도 같은 앱 절차를 다시 시도하라는 안내만 가능하다면
그 문은 열려 있어도 통과할 수 없는 문이다.
세 번째 문
그러면 창구로 가면 된다.
이게 오랫동안 마지막 답이었다.
막히면 은행에 가면 됐다.
그런데 그 문도 좁아지고 있다.
2026년 9월 보도에서 금융감독원 제출자료를 인용한 수치에 따르면
전국 은행 ATM은 2022년 말 2만 9321대에서
2026년 6월 말 2만 4711대로 줄었다.
3년 반 동안 4610대 그러니까 15.7퍼센트가 사라졌다.
같은 기간 시중은행 영업점도 5657개에서 5381개로 줄었다.
한편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모바일뱅킹을 포함한 인터넷뱅킹의 일평균 이용건수는 2829만 건으로
전년보다 10.9퍼센트 늘었다.
오프라인 접점이 줄고 온라인 거래가 느는 흐름이 함께 진행되고 있다.
이 두 숫자를 나란히 놓으면
사람들이 창구를 덜 쓰니까 창구를 줄인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체로 맞는 설명이다.
다만 이 계산에서 빠지는 게 있다.
온라인으로 못 옮겨 간 사람들에게
창구 하나가 사라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장애인에게 점포 폐쇄는 평균 이동거리 증가로 설명되지 않는다.
휠체어로 갈 수 있는 경로가 있는지.
그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있는지.
동행 지원을 확보할 수 있는지.
이 세 가지가 실제 방문 가능성을 정한다.
집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
어떤 사람에게는 10분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반나절이다.
ATM이 남아 있어도 마찬가지다.
접근 공간과 조작부 높이와 음성 안내와 조작 방식이 맞지 않으면
그건 세어지기만 하는 대수다.
점포 수와 ATM 대수를 세는 지표 옆에
그 시설에 도달해서 업무를 마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지표가 있어야 한다.
닫기 전에 여는 곳
영국의 대응이 참고가 된다.
금융행위감독청은 2024년 9월 18일부터
지정된 은행 등에 지역의 현금서비스 공백을 평가하고
중대한 공백이 확인되면 보완하도록 하는 규칙을 시행했다.
추가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 서비스가 마련될 때까지 기존 시설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건 점포 폐쇄를 금지하는 제도가 아니다.
현금 접근성을 보호하는 장치다.
핵심은 순서에 있다.
폐쇄 이후의 불편을 소비자가 감당하게 하는 대신
대체 서비스의 실질적 준비를 먼저 요구한다.
뱅킹 허브라는 형태도 있다.
우체국이 운영하는 창구에서 일상적인 현금거래를 처리하고
은행별 담당자가 정해진 요일에 방문해
별도 공간에서 계좌관리 같은 복잡한 문의를 대면으로 상담한다.
은행마다 상담일과 제공 업무가 달라서
기존 지점의 모든 기능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여러 은행이 지역의 대면 기반을 공동으로 유지한다는 발상은
우리도 볼 만하다.
다만 이걸 도입할 때 설치 개수만 세면 안 된다.
그 허브까지 갈 수 있는지.
의사소통 지원이 있는지.
상담의 비밀이 지켜지는 구조인지.
특히 마지막이 중요하다.
공동 공간에서 내 계좌 이야기를 하는 일이
옆 사람에게 다 들리는 구조라면 그건 다른 문제가 된다.
숫자를 읽는 법
디지털 쪽 지표도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5년 실태조사에서
디지털 취약계층의 정보화 수준은 일반 국민 대비 77.9퍼센트였고
장애인은 84.1퍼센트였다.
이 숫자를 보고 장애인의 84퍼센트가 금융 앱을 쓸 수 있다고 읽으면 안 된다.
일반 국민을 100으로 놓고 산출한 상대 지수다.
같은 해 웹 접근성 조사에서는
8개 업종 1000개 웹사이트 평균이 70.4점이었고
금융보험업이 79.0점으로 나왔다.
금융보험업 점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건 개선의 결과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다만 웹사이트 평가 점수가
개별 은행 앱에서의 계좌 개설이나 인증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보급과 기준 충족과 거래 완료는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내가 그날 겪은 걸로 말하면 이렇다.
그 은행의 웹사이트는 아마 점수가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상품을 못 만들었다.
두 문장이 동시에 참일 수 있는 구조에서
우리는 앞의 문장만 지표로 관리하고 있다.
전환할 곳이 없을 때
인터넷전문은행에서는 이 문제가 더 선명해진다.
모바일 중심 은행은 이동과 대기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그 성과 자체는 실제이고 나도 이용한다.
다만 비대면 절차가 중단됐을 때
일반적인 영업점 창구로 전환하기가 어렵다.
손의 움직임이나 자세 유지에 제약이 있는 이용자에게
신분증 촬영은 그 자체로 부담이 될 수 있고
화면 낭독기로 읽히지 않는 입력 항목은 거래를 그 자리에서 멈춘다.
물론 상담 경로는 있다.
전화나 채팅을 운영하고 24시간 전화 상담을 안내하는 곳도 있다.
그러니 질문은 창구가 있느냐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그 창구가 앱에서 실패한 절차를 실제로 해결할 권한과 대체 수단을 갖췄는가.
이건 특정 은행의 실태를 단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점포 은행을 평가할 때 확인해야 할 조건이다.
말이 안 통할 때
상담의 자동화가 여기에 겹친다.
문자 기반 챗봇과 전화 기반 음성봇이
초기 문의를 처리하는 방식이 은행권에 빠르게 퍼지고 있다.
2026년 9월 보도에서도
반복 답변과 의도 파악 실패와 상담원 연결 지연이 지적됐다.
은행마다 절차가 다르니
모든 금융상담이 반드시 인공지능을 거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자동 응대가 사람에게 닿기 위한 선행 절차가 되면
거래에서 만난 장벽을 상담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대화형 인터페이스의 접근성을 다룬 리스터 등의 2020년 연구는
챗봇의 접근성이 대화 내용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것을 제공하는 앱이나 웹 환경
보조공학과의 호환성
대화 흐름과 응답 시간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이다.
음성은 문자 입력이 어려운 사람을 돕고
문자는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을 지원한다.
한 가지 방식을 모두에게 요구하면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새로운 장벽이 된다.
특히 응답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
빠른 답변을 재촉하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대화를 끊는 설계는 불리하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입력 방식과 대화 속도를 이용자가 조절할 수 있는 구조다.
음성봇에는 다른 문제도 있다.
마틴 등의 2025년 연구는
통상적인 발화에 주로 학습된 음성인식 시스템이
말장애가 있는 사람의 발화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보인다는 문제를 다룬다.
연구진이 소개한 프로젝트 유포니아의 데이터는
2025년 2월 기준 약 3000명의 화자에게서 모은 150만 건 이상의 발화를 포함한다.
이 규모는 다양한 발화 특성을 반영하려면
별도의 수집과 평가가 필요하다는 걸 보여 준다.
이 연구가 우리 은행 콜봇의 성능을 측정한 건 아니다.
다만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함의는 분명하다.
국내 음성봇도 다양한 장애 특성과 한국어 발화로 검증해야 하고
인식 실패를 이용자의 말하기 능력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
세 문을 함께 보기
호주은행협회는 2023년에
은행서비스 접근성 원칙을 개정하면서 디지털 인증과 인공지능 관련 내용을 넓혔다.
챗봇과 생체인증과 웹사이트와 모바일 앱과 전화서비스를 함께 다루고
장애 당사자가 참여하는 공동설계를 강조했다.
사기와 명의도용을 막기 위한 보안 강화 과정에서도
접근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건 법적 기준이 아니라 업계의 설계 운영 원칙이다.
유럽접근성법처럼 강제력이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참고할 지점이 있다.
금융 접근성을 큰 글씨나 쉬운 화면에 한정하지 않고
인증과 상담과 기기 조작까지 하나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은 유럽접근성법으로
ATM과 소비자 은행서비스 등에 접근성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관련 규정은 2025년 6월 28일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예외와 경과조치가 있어서
그날부로 모든 시설이 바뀐 건 아니다.
이 제도의 의미는 디지털 금융의 접근성을
서비스 설계와 제공의 공통 요건으로 다룬다는 데 있다.
우리도 인터넷전문은행의 편의성과 혁신성을 평가할 때
장애인이 상품 정보를 이해하고 본인확인과 거래를 완료할 수 있는지를
핵심 기준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세 문을 따로 보지 말아야 한다.
거래에서 막힌 사람이 상담에서도 못 풀고 대면 창구에도 못 가면
각 경로의 작은 결함이 합쳐져 서비스 이용 자체가 막힌다.
이 누적 구조는 각각을 따로 점검해서는 안 보인다.
앞으로 조사한다면
인증 중단률과 상담원 연결까지의 시간과
반복 설명 횟수와 최종 해결률을 함께 봐야 한다.
민원 건수만으로는 상담 접수 단계에서 포기한 사람이 안 잡힌다.
그리고 대체로 가장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가장 먼저 포기한다.
포기한 사람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앱 이용 통계에는 중단으로만 남고
상담 통계에는 애초에 안 들어간다.
그러면 그 은행의 자료에서 그 사람은
관심이 없어서 안 한 사람으로 보인다.
수요가 없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그리고 수요가 없으면 개선 우선순위가 내려간다.
못 쓰는 사람이 안 쓰는 사람으로 기록되는 구조를
나는 이 시리즈에서 여러 번 다뤘다.
금융에서는 이 문제가 특히 조용하다.
돈 이야기는 아무도 밖에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목: 창구의 아키텍처 혹은 막혔을 때 어디로 가는가.
우리나라에서도 개선 노력은 진행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2025년 4월 장애인 금융접근성 제고 방안을 발표하면서
음성 일회용 비밀번호 개선과 접근 가능한 계약서류 제공과
문자 기반 상담 확대와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안내를 제시했다.
방향은 옳다.
이 과제들이 현장에서 효과를 내려면
개별 편의 제공이 실제 거래 과정의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
점포를 닫기 전에 대체 서비스를 당사자와 함께 검증하는 것.
자동 응대를 건너뛰고 사람에게 연결되는 경로를 두는 것.
비대면 인증이 어려운 이용자에게 안전한 대체 확인 절차를 주는 것.
인터넷전문은행도 이런 지원으로 안 풀리는 업무에 대해
제휴 대면 지원 같은 보완바카라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결론: 금융회사가 아낀 창구 운영비와 상담 시간은
슬롯 전체의 비용 감소와 같지 않다.
이용자에게 더 긴 이동과 반복 인증과 동행 지원과 추가 설명이 요구된다면
그 비용은 없어진 게 아니라 옮겨 간 것이다.
옮겨 간 비용은 회계에 안 잡힌다.
그래서 효율화로만 기록된다.
접근성 있는 금융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자기 선택과 거래의 비밀을 지키면서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니 물어야 할 질문은 얼마나 자동화했는가가 아니다.
자동화된 절차에서 막힌 사람에게 어떤 문이 남아 있는가다.
그나저나 그 상품은 결국 보보가 옆에서 스크롤을 내려 줘서 가입했다.
손가락 한 번이면 되는 일이었다.
고맙긴 한데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약관을 다 읽은 사람은 나였고 스크롤을 한 사람은 보보였고
읽었다고 인정받은 쪽은 보보의 손가락이었다.
탱고는 그동안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저 녀석은 금융 거래를 할 일이 없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