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이라는 말을 나는 오래 불편해했다.
이유를 정확히 말하기가 어려웠는데
어느 날 이 단어가 분수라는 걸 생각하고 나서 좀 정리가 됐다.
생산성은 산출을 투입으로 나눈 값이다.
대체로 분모에 시간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지표는 속도를 재는 지표다.
같은 결과를 더 짧은 시간에 내면 생산성이 높고
같은 시간에 더 적게 내면 낮다.
이 계산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공장에서 나온 개념이고 그 자리에서는 잘 작동한다.
문제는 이 분수가 사람을 평가하는 데 쓰일 때다.
기계에 쓸 때는 조건이 고정되어 있다.
같은 전력과 같은 재료와 같은 환경에서 비교한다.
사람에게 쓸 때는 그 조건이 제각각인데
결과만 나란히 놓는다.
이것은 그 분모에 관한 기록이다.
40분과 3시간
앞서 몇 번 쓴 숫자를 다시 꺼내야겠다.
같은 분량의 문서를 읽는 데
텍스트 파일이면 40분쯤 걸리고
스캔본이면 문자 인식과 정리를 포함해 3시간쯤 걸린다.
같은 사람 같은 문서인데 4배가 넘게 차이 난다.
여기서 내 생산성은 얼마인가.
분자는 같다. 읽어 낸 문서 한 건.
분모만 바뀐다.
그러니까 이 계산에서 내 생산성은
내 능력이 아니라 그 파일의 형식이 정한다.
그런데 평가는 나에게 온다.
느리다는 인상은 사람에게 붙는다.
파일 형식에 붙지 않는다.
이게 생산성이라는 지표의 가장 큰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모에 들어가는 시간에는
그 사람의 속도와 환경의 상태가 섞여 있는데
결과는 그 사람의 값으로만 기록된다.
한번은 이 계산을 실제로 해 본 적이 있다.
한 학기 동안 받은 자료의 형식을 세어 봤다.
접근 가능한 파일과 그렇지 않은 파일의 비율.
절반쯤이 그렇지 않은 쪽이었다.
그러니까 그 학기에 내 작업 시간의 상당 부분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가 아니라 내용에 도달하는 데 쓰였다.
이 시간을 나는 어디에도 청구하지 않았다.
청구할 곳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그게 청구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청구할 수 없더라도 세어는 둬야 한다.
세어 두지 않으면 그 시간은 그냥 내가 느린 것이 된다.
리프킨이 말한 것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산업슬롯가 만들어 온 노동 체계가 자동화와 정보기술 속에서 근본적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봤다.
그가 말한 위험은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노동이 오랫동안 인간의 슬롯적 위치와 존엄과 시민권의 기준으로 작동해 온 슬롯에서
대량의 노동 배제가 어떤 불평등을 만드는가에 관한 경고였다.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제도가 적응하는 속도를 앞지르면
슬롯는 소수의 고숙련 집단과 다수의 배제된 사람들로 갈라질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그가 특히 짚은 게 이 대목이다.
산업슬롯는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 중심으로 측정해 왔다는 것.
이 구조에서 속도가 느리거나
표준화된 체계에 맞추기 어려운 사람은 쉽게 비효율적 존재가 된다.
장애인은 이 기준 앞에서 가장 오래 서 있던 집단이다.
실제로 장애인 고용 정바카라의 역사를 보면
상당 기간 이 전제가 깔려 있었다.
장애인은 생산성이 낮으니
그 차이를 보조금이나 의무 부과로 메워 준다는 방식.
이 구조는 고용을 늘리는 데는 역할을 했다.
다만 전제 자체는 그대로 뒀다.
생산성이 낮다는 판정을 인정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보전받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보전받는 존재는 조직 안에서 위치가 낮다.
숫자는 채워지는데 자리는 안 올라가는 현상이
여기서 나온다.
노동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존 노동 체계와 맞지 않는 존재로 분류되어 왔다.
이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 온 문장이 여기서도 똑같이 성립한다.
표준이라는 것
우리 노동시장은 여전히 표준 노동 모델을 전제한다.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속도와 정해진 수행 방식.
앞서 나는 8시간이라는 총량 기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번에 말하고 싶은 건 그 안의 속도다.
총량은 조정하기가 그나마 쉽다.
단시간 근무나 유연근무 같은 제도가 이미 있다.
속도는 조정 대상으로 잘 논의되지 않는다.
같은 8시간을 일해도
그 안에서 몇 건을 처리했는지가 평가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기준은 대체로 명시되지 않는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한다는 수준으로 존재한다.
명시되지 않은 기준은 조정을 요구하기가 어렵다.
무엇을 조정해 달라고 해야 할지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과 발달장애인과 감각장애인의
서로 다른 작업 리듬은 이 구조와 충돌한다.
충돌의 결과는 대체로 하나로 나타난다.
6개월쯤 뒤의 퇴사.
그리고 퇴사 사유에는 개인 사정이라고 적힌다.
이것도 앞서 쓴 적이 있는 문장이다.
속도 기준이 특히 곤란한 건
그게 대체로 비교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옆 사람보다 빠른지 느린지로 평가된다.
그러면 조정이 이루어져도 격차는 남는다.
보조기기를 지원받아서 내가 두 배 빨라져도
그 사이에 다른 사람들도 도구가 좋아진다.
비교 기준이 계속 움직이니까
따라잡는다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건 개인이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평가 방식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기계가 고를 때
자동화가 여기에 한 겹을 더한다.
키오스크와 무인 주문과 자동화 시스템이 빠르게 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효율과 편의의 확대다.
접근성이 없는 자동화가 장애인에게 새로운 장벽이 된다는 이야기는
이 시리즈에서 여러 번 다뤘다.
여기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동화가 노동시장 안에서 선별 기능까지 맡기 시작했다는 것.
해외에서는 인공지능 채용 시스템이
지원자의 발화 방식이나 표정이나 반응 속도를 기준으로 평가하면서
장애인을 구조적으로 배제할 위험이 지적되고 있다.
이런 시스템은 대체로 기존 우수 사원의 데이터를 학습한다.
그리고 기존 우수 사원 중에 비표준적 발화를 하는 사람이 적으면
그 방식은 낮은 점수를 받는다.
여기서 무서운 건 속도가 빨라졌다는 점이다.
사람이 면접을 보면 편견이 있어도 대화가 있다.
설명할 기회가 있고 예외가 생길 여지가 있다.
기계가 1차로 거르면 그 기회 자체가 없다.
그리고 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
앞서 나는 배제가 계산 안으로 들어가면
싸울 대상이 사라진다고 썼다.
채용에서 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는 묘한 사각지대가 있다.
채용 과정에서 장애를 밝히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장애 때문에 떨어졌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
밝히면 밝혔다는 이유로 불리할 수 있고
안 밝히면 불리했다는 걸 입증할 수 없다.
앞서 다른 글에서 나는
비교 대상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차별의 증거인데
그 증거가 입증을 막는다고 썼다.
자동화된 채용에서는 그 구조가 한 겹 더 두꺼워진다.
기준이 공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역에서는
설명 가능성과 인간의 재검토가 특히 중요하다.
기계가 1차로 거르더라도
탈락 사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이 다시 볼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세어지지 않는 일
리프킨은 미래 슬롯에서 시민슬롯와 공동체 영역의 비중이 커질 것으로 봤다.
이 전망에서 내가 붙잡고 싶은 대목이 있다.
지금 노동으로 세어지지 않는데 실제로 슬롯를 굴리고 있는 활동들이 있다.
장애인 자조 모임의 운영.
동료 상담.
접근성 모니터링.
권익 옹호 활동.
제도 개선 요구와 자문.
이런 활동은 슬롯적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전통적 노동 개념 안에서는 대체로 평가받지 못한다.
나도 그 목록의 일부를 한다.
위원회에 나가고 자문을 하고 자료를 검토한다.
그중 일부는 수당이 있고 일부는 없다.
있는 경우도 금액은 대체로 회의 참석 수당 수준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내가 제공하는 건 참석이 아니다.
30년 넘게 이 몸으로 살면서 알게 된 것들이다.
같은 자리에 오는 다른 전문가들은 자기 전문성에 대한 값을 받는다.
당사자는 경험에 대한 값을 잘 못 받는다.
경험은 공부해서 얻은 게 아니니까 값이 없다는 논리가
명시적으로 말해지지는 않지만 구조에는 들어 있다.
앞선 글에서 나는 당사자성이 권위가 아니라 자료라고 썼다.
자료를 만드는 데는 원래 비용이 든다.
그 비용을 당사자가 혼자 부담해 온 것이다.
이 말을 하면 가끔 이런 반응이 온다.
좋은 일 하는데 돈 이야기를 꼭 해야 하느냐.
나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급으로 유지되는 일은 무급으로 할 수 있는 사람만 하게 된다.
소득이 안정적이고 시간이 되고 이동이 되는 사람.
그러니까 앞선 글에서 말한 그 조건들을 가진 사람.
그러면 당사자 참여는 넓어지는 게 아니라
특정 조건을 가진 당사자에게로 좁아진다.
보수를 붙이는 일은 그 사람을 대우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누가 그 자리에 올 수 있는지를 정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북유럽 쪽
북유럽 국가들은 돌봄과 지역슬롯 참여를
슬롯적 노동의 범주로 비교적 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장애인의 근로지원과 보조공학 지원을
복지 서비스가 아니라 노동권 보장 정바카라으로 다룬다.
이 구분이 실무에서 꽤 큰 차이를 만든다.
복지 서비스로 분류되면 그건 예산 사정에 따라 줄어들 수 있는 항목이 된다.
노동권 보장으로 분류되면 그건 줄이면 권리 침해가 되는 항목이 된다.
같은 지원인데 어느 칸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안정성이 다르다.
그리고 이 관점의 바탕에는 판단이 하나 깔려 있다.
장애인은 생산성이 낮은 존재가 아니라
환경 조정을 통해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이라는 것.
이 문장은 선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실증적인 주장이다.
화면 낭독기가 있는 나와 없는 나의 산출량은 완전히 다르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하루인데 다르다.
그러니까 생산성은 그 사람에게 붙어 있는 속성이 아니라
그 사람과 환경 사이에서 결정되는 값이다.
이 사실을 계산에 넣으면
보조공학과 근로지원은 비용이 아니라 분모를 줄이는 투자가 된다.
지금 우리 회계에서 그건 여전히 비용 칸에 있다.
한 가지 더 있다.
속도가 느린 대신 얻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조심스럽게 하고 싶다.
느리게 읽으면 더 정확하다거나
장애가 있으면 다른 관점을 갖는다는 식의 말이
칭찬처럼 쓰이는 걸 여러 번 봤다.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기는 하다.
음성으로 순서대로 듣다 보면 구조가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다만 이 논리를 밀고 나가면 위험해진다.
쓸모가 있어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되면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간다.
그래서 나는 이 대목을 이렇게 정리한다.
다양성이 조직에 도움이 된다는 건 대체로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포함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이유는 그 사람이 시민이라는 것 하나로 충분하다.
도움이 되는 건 덤이다.
조심해야 할 것
노동의 의미를 넓히자는 주장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세어지지 않는 활동도 노동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활동을 계속 무급으로 둘 핑계가 생길 수 있다는 것.
당신이 하는 일도 소중한 노동이라는 말이
보수 없이 계속하라는 말로 쓰이는 경우를 나는 몇 번 봤다.
그래서 나는 이 주장을 이렇게 좁히고 싶다.
노동으로 인정하자는 건 이름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값을 매기고 슬롯보험을 붙이자는 뜻이다.
그게 안 되는 활동이라면
적어도 그 활동을 하는 사람이 다른 소득 없이 살 수 있도록
소득보장이 따로 있어야 한다.
실무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당사자 자문에 대한 표준 단가를 만드는 것.
자료 검토 시간과 이동 시간을 보수 산정에 포함하는 것.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는 슬롯보험을 붙이는 것.
전부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다른 전문 영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차이는 그 영역에서는 시간이 값으로 계산되고
이 영역에서는 참석이 값으로 계산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워크페어 논의가 다시 걸린다.
노동을 시민권의 조건으로 만들면
일하지 못하거나 일하지 않는 사람의 자리가 다시 좁아진다.
노동의 범위를 넓히는 일과
노동하지 않을 자유를 지키는 일은 같이 가야 한다.
앞의 것만 하면 결국 모두를 노동자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다시 순위를 매기게 된다.
제목: 속도의 아키텍처 혹은 생산성은 무엇의 비율인가.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을 이야기했지만
그게 인간의 종말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경쟁 중심 질서 다음에 무엇이 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 슬롯는 아직 그 질문 앞에 제대로 서 있지 않다.
여전히 속도와 산출량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비효율로 분류한다.
그리고 그 분류가 일어나는 순간
노동의 문제는 존엄의 문제가 된다.
결론: 생산성은 분수이고 분모에는 시간이 들어간다.
그 시간에는 그 사람의 속도와 환경의 상태가 섞여 있다.
환경을 고치면 같은 사람의 생산성이 올라간다.
이건 온정이 아니라 산수다.
그러니까 장애인 노동권 이야기는
일자리 몇 개를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가치를 단위 시간당 산출로만 재는 슬롯에서
그 계산의 분모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를 다시 보자는 이야기다.
자동화가 빨라질수록 이 질문은 더 중요해진다.
기계는 언제나 사람보다 빠르고
그 비교를 계속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느린 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애인의 노동 문제는 장애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 속도 기준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사람들이 장애인이고
그다음이 고령자이고 그다음이 아픈 사람이고
그다음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일 것이다.
기준을 바꿔 달라는 요구를 지금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중에는 요구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며칠 전 어느 자문 요청 메일을 받았다.
자료 검토와 의견서 작성이 포함된 일이었고 수당은 회의 참석비 수준이었다.
보보가 그걸 보더니 시급으로 나눠 보라고 했다.
나눠 봤더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아무도 안 가면 그 자료가 그대로 나갈 테니까.
이 구조가 유지되는 이유의 절반쯤은 아마 이런 마음일 것이다.
탱고는 그 메일을 읽는 동안 옆에서 자고 있었다.
저 녀석은 하루에 6시간쯤 일하고 사료를 받는다.
우리 집에서 노동 조건이 제일 명확한 구성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