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의 아키텍처

by김경훈

정전이 났을 때 나는 한동안 몰랐다.


조명을 안 쓰기 때문이다.

밤에도 우리 집 거실은 대체로 어둡고 나는 그 상태로 산다.


보보가 저녁 약속으로 늦게 오는 날이었고

나는 소파에서 오디오북을 듣고 있었다.


알게 된 건 소리 때문이었다.


이것은 전기가 끊긴 두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나에게 전기가 무엇이었는지 처음으로 정리해 본 기록이다.





소리가 사라진다



먼저 냉장고가 멈췄다.


냉장고는 낮고 일정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우리 집 부엌의 방향을 알려 준다.


그다음이 공기청정기였다. 거실 왼쪽 벽 근처.

보일러 순환 펌프도 조용해졌다.


세 개가 한꺼번에 사라지니까 집이 이상해졌다.


소리가 없어진 게 아니라 공간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시각장애인이 익숙한 공간을 어떻게 아는지 설명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손으로 더듬는 걸 떠올린다.


실제로는 소리를 더 많이 쓴다.


가전제품의 소음은 고정되어 있고 방향이 있고 거리가 있다.

그러니까 그건 사실 랜드마크다.


정전은 그 랜드마크를 한꺼번에 끈다.


나는 그날 우리 집 거실에서 잠깐 방향을 잃었다.

5년을 산 집인데 그랬다.


소리 없는 집은 처음 와 보는 집처럼 넓었다.


몇 초 뒤에 정신을 차리고 벽을 짚어 방향을 잡았다.

그러니까 큰일이 난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몇 초가 오래 남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이건 꽤 흔한 일이었다.


공사로 가게 몇 곳이 문을 닫으면 지하상가의 지형이 바뀌고

에어컨이 꺼진 사무실은 여름과 겨울이 다르게 들린다.


내가 아는 공간은 사실 소리로 그려진 공간이고

그 소리를 만드는 건 대체로 전기다.


그러니까 전기는 나에게 조명보다 지도에 가깝다.


이런 걸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는다.

끊겨야만 무엇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종류의 기반시설이다.





그다음에 멈춘 것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폰 배터리가 40퍼센트쯤이었다.


화면 낭독기를 켜 두고 쓰면 배터리가 빨리 준다.

그리고 정전 상황에서 폰은 조명이 아니라 정보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고

복구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보보에게 상황을 알리고

필요하면 검색을 해야 한다.


그 전부가 이 40퍼센트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점자정보단말기는 충전 중이었다.

정전이라 충전이 멈췄고 남은 배터리로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었다.


와이파이가 끊겨서 데이터로 넘어갔다.

그러면 배터리가 더 빨리 준다.


승강기도 멈췄을 것이다.

9층이니 계단으로 내려가면 되긴 하는데

비상등만 켜진 계단은 나에게 밝기와 무관하게 낯선 조건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가면 소리 지형이 무너지니까.


정리하면 그날 두 시간 동안 나에게 전기는

조명이 아니라 방향과 정보와 이동이었다.


그리고 이 목록을 만들어 보니

내가 그동안 전기를 얼마나 얕게 이해하고 있었는지가 보였다.


한 가지 더 있었다.


정전이 나면 안내가 시각으로 온다.


승강기 앞 게시판에 붙는 종이.

현관 게시판의 복구 안내문.

동 대표가 올린 사진 공지.


관리사무소 방송이 나오면 그건 들을 수 있는데

정전이면 그 방송도 안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날 나는 복구 시간을 결국 전화로 물어봤다.

그리고 통화하는 동안 배터리가 더 줄었다.


정보가 시각으로만 오면

그걸 음성으로 바꾸는 비용을 개인이 낸다.

이 경우에는 그 비용이 배터리였다.





더 급한 사람들



두 시간 뒤에 복구됐고 나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다른 경우들이 자꾸 떠올랐다.


인공호흡기를 쓰는 사람.

산소발생기를 쓰는 사람.

가래 흡인기가 필요한 사람.


이 기기들이 멈추면 두 시간은 불편이 아니라 위험이다.


전동침대와 리프트가 멈추면 체위 변경이 안 되고

욕창예방 매트리스가 멈추면 몇 시간 만에도 문제가 생긴다.


전동휠체어를 충전하지 못하면 다음 날 외출이 통째로 사라진다.


보완대체의사소통 기기를 쓰는 사람에게 전원이 끊기면

그건 말을 잃는 것과 같다.


이 목록을 적어 놓고 보면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전기는 이제 조명과 냉난방을 위한 연료가 아니다.

이동과 의사소통과 건강관리와 정보 이용을 떠받치는 기반시설이다.


그런데 우리 에너지복지 논의는 여전히 겨울철 난방비 중심으로 움직인다.





바우처라는 제도



우리나라는 에너지법에 근거해 에너지 취약계층에 에너지바우처를 지원한다.


기초생활보장 급여 수급 세대 중에서

노인과 영유아와 등록장애인과 임산부와

중증 희귀 중증난치질환자와 한부모가족과 소년소녀가정 등

세대원 특성 기준을 충족하는 가구가 주요 대상이다.


전기와 도시가스와 지역난방과 등유와 액화석유가스와 연탄에 쓸 수 있다.


하절기에는 전기요금 차감 방식으로

동절기에는 요금 차감이나 국민행복카드 등을 이용하는 구조다.


그러니까 이 제도를 도시가스만 지원하는 제도라고 말하는 건 정확하지 않다.

다만 계절별 사용 방식과 에너지원별 결제 가능성과

이용자가 느끼는 편의성에는 차이가 있다.


규모도 늘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2026년도 에너지바우처 예산안은 5172억 원으로

2025년 5014억 원보다 158억 원 늘었다.


다자녀 기초생활수급가구 약 2만 가구를 추가하고

미사용 저사용 가구를 위한 찾아가는 안내 서비스도 추진되고 있다.


이건 이 제도가 일시적인 요금 보조를 넘어

슬롯안전망의 한 축이 됐다는 뜻이다.


문제는 예산과 대상이 늘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지금의 제도가 변화한 기후와 실제 이용 형태를 얼마나 반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달력과 날씨



2026년도 바우처의 공식 사용기간은

2026년 7월 1일부터 2027년 5월 31일까지다.


하절기는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동절기는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로 설정되어 있다.


과거보다 하절기 범위가 넓어졌다.

이건 분명한 개선이다.


다만 지원기간을 달력상의 계절에 맞추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요즘 더위는 6월에 시작한다.

그리고 열대야가 9월까지 이어지는 해가 늘고 있다.


폭염은 계절적 불편이 아니라 슬롯적 재난에 가깝다.

온열질환과 만성질환 악화와 수면장애와 고립 위험을 동시에 높인다.


체온조절 기능이 떨어진 노인과

스스로 냉방기기를 조작하거나 더위를 피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에게

적정한 냉방은 건강을 지키는 조건이다.


앞서 폭염 연구를 다룰 때 확인한 숫자가 있다.

폭염 시 장애인의 온열질환 상대위험도가 비장애인보다 높고

65세 미만 장애인이 비장애 노인보다도 높게 나온다는 결과였다.


그러니까 냉방은 이미 생존의 문제다.


앞으로는 고정된 월 대신

실제 기후 위험에 연동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폭염특보와 한파특보와 열대야 일수와

냉방도일과 난방도일과 지역별 기후 특성을

지급액이나 사용기간 조정에 반영하는 방식.


폭염이 6월에 시작되면 냉방 지원도 그때 시작하고

9월 이후까지 이상고온이 이어지면 기간이 자동으로 연장되는 구조.


전국에 같은 기준을 적용하기보다

남부와 중부와 산간의 차이를 고려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에너지복지가 기후재난 대응의 일부라면

달력보다 실제 위험을 따라가야 한다.





전기에 매달린 집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생활의 전기화다.


최근 확대되는 인공지능 스피커와 사물인터넷 기반 스마트홈과

원격의료와 재택근무와 온라인 교육은 전부 전기를 쓴다.


현관문과 조명과 냉난방기를 음성이나 스위치 하나로 제어하는 기술은

비장애인에게는 편리한 가전 기능일 수 있지만

중증장애인에게는 타인의 도움 없이 하루를 보내게 하는 자립생활 기술이다.


같은 기기가 누구에게는 편의이고 누구에게는 조건이다.


저소득 가구의 전기 의존도도 가볍지 않다.


도시가스가 안 들어오는 집이나 보일러를 못 바꾸는 집에서는

전기장판과 전기히터와 온풍기로 필요한 공간만 데운다.


초기 비용은 적지만 단열이 나쁜 집에서 오래 쓰면 요금이 커진다.


냉방도 마찬가지다.

에어컨이 있어도 요금이 무서워 못 켜면

그 집에 냉방 서비스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기기의 보유와 서비스의 이용은 다른 문제다.

이 구별은 접근성 논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너지복지는

전기냐 도시가스냐를 가르는 문제로 좁혀지면 안 된다.


그 가구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냉방과 난방과 의료기기 가동과 이동보조기기 충전과 정보통신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특히 의료기기와 보조기기를 상시 쓰는 전기의존 가구에는

필수전력 사용량을 따로 인정하거나 가산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가구는 요금 체납으로 단전되면 안 된다.

정전이 나면 우선 복구 대상이 되어야 하고

비상전원과 예비 배터리 지원이 같이 붙어야 한다.


지금 이 세 가지는 각각 다른 제도에 흩어져 있다.


요금 지원은 에너지 관련 부처에 있고

단전 유예는 공급사 약관에 있고

비상전원은 보조기기 지원 품목 쪽에 걸쳐 있다.


그러니까 인공호흡기를 쓰는 가구가 이 셋을 다 갖추려면

서로 다른 세 곳에 각각 신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신청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그 기기를 쓰는 사람의 가족이다.


제도가 흩어져 있으면 그 사이를 잇는 일이 언제나 개인의 몫이 된다.

이건 이 시리즈에서 몇 번이나 확인한 구조다.





다른 나라들



해외 제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방향에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의 저소득층 가정에너지 지원 프로그램은

요금과 위기 상황과 주택 에너지효율 개선을 함께 지원한다.


주와 지역의 기후에 따라 난방비뿐 아니라 냉방비도 지원할 수 있다.

더운 지역에서는 냉방비를 지원하고

일부 지역은 냉방기기 수리와 에너지 위기 지원도 시행한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별 기후 위험에 맞춰 제도를 다르게 운영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다.


프랑스의 에너지수표는 소득과 가구 구성으로 대상을 정하고

가정의 에너지비용을 지원한다.


2026년에는 조세 자료와 주택 전기공급지점 정보를 연계해

대상자를 확인하고 수표를 자동 발송하는 방식이 운영되고 있다.


자동 발송이라는 대목이 특히 눈에 띈다.


신청주의는 언제나 신청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그리고 신청이 가장 어려운 사람이 대체로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도 이 문제를 알고 있다.

미사용 저사용 가구를 찾아가는 안내 서비스가 그래서 생겼다.


다만 찾아가서 알려 주는 것과 자동으로 지급되는 것은 다르다.


앞의 방식은 행정의 여력에 달려 있고

뒤의 방식은 자료 연계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자료 연계 인프라가 잘 갖춰진 편이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자동 지급에는 개인정보 문제가 따라붙는다.

그 논의를 건너뛰자는 게 아니라

그 논의를 시작은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제도들도 완벽하지 않다.

미국에서도 냉방 지원 수준과 단전 보호 기준이 지역마다 다르고

재원 부족으로 못 받는 가구가 있다.


그래도 냉방과 난방을 모두 필수 서비스로 인정하고

기후와 가구 특성에 따라 방법을 달리한다는 원칙은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택 자체를 고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단열이 부실하고 창호가 낡은 집에서는

같은 실내온도를 유지하는 데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든다.


요금 지원만 반복하면 매년 같은 금액이 새는 집에 들어간다.


단열과 창호 개선과 고효율 냉난방기 보급과

온도조절 장치와 비상전원 지원을 함께 묶어야

부담이 구조적으로 줄어든다.


이건 지출을 늘리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몇 년 단위로 보면 반대다.


새는 곳을 막지 않고 물을 계속 붓는 방식이

지금의 요금 지원 중심 구조다.





제목: 전력의 아키텍처 혹은 조명이 필요 없는 사람의 정전.


나는 에너지 접근권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이건 아직 확립된 법률 용어는 아니다.

에너지빈곤과 에너지정의와 접근권과 기후정의 논의를 묶어 본 개념에 가깝다.


내용은 이렇다.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고 슬롯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안정적으로 차별 없이 이용할 권리.


여기에는 네 겹이 있다.


공급이 끊기지 않는 물리적 접근성.

요금 때문에 냉난방이나 의료기기 사용을 포기하지 않는 경제적 접근성.

신청과 사용과 잔액 확인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정보 접근성.

폭염과 한파와 정전에도 필수 서비스가 유지되는 회복력.


세 번째 겹을 조금 더 말하고 싶다.


바우처가 있어도 신청 화면을 못 읽으면 못 쓴다.

잔액과 사용 기한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면 남기고 소멸시킨다.


미사용 가구 통계에는 그 사람이 안 쓴 것으로 잡히지만

실제로는 못 쓴 것이다.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지원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일이 생긴다.


쉬운 글과 음성과 수어와 점자 안내

대리 신청과 직권 신청과 방문 지원

잔액과 기한 알림.


이 목록은 화려하지 않지만 이게 없으면 앞의 예산이 닿지 않는다.


이 권리가 특별한 이유는 다른 권리를 떠받친다는 데 있다.


전동휠체어를 충전하지 못하면 이동권은 형식으로만 남고

의사소통 기기의 전원이 끊기면 표현의 자유가 멈추고

의료기기가 멈추면 건강권과 생명권이 위협받는다.


그러니까 새로운 권리를 하나 더 만들자는 주장이 아니다.

이미 인정된 권리들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그 아래에 전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하자는 제안이다.


결론: 기후위기 시대의 에너지정바카라은

공급량과 가격만 다루는 산업정바카라일 수 없다.


누구에게 에너지가 부족한지

그 부족이 건강과 자립에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를 보는

복지정바카라이자 인권정바카라이어야 한다.


바우처의 다음 단계는 금액을 올리는 데 있지 않다.

누구에게 어떤 에너지 서비스가 필수인지를 다시 묻는 데 있다.


그나저나 그날 보보가 돌아왔을 때 나는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보보가 들어오면서 왜 불도 안 켜고 있냐고 했다가 아 정전이지 하고 웃었다.

우리 집에서 정전을 가장 늦게 알아채는 사람이 나라는 게 좀 웃긴 일이다.

그런데 가장 오래 곤란한 사람도 나다.

탱고는 정전 내내 아무 반응이 없었다.

냉장고 소리가 멈춘 것도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저 녀석은 코로 사니까 전기가 끊겨도 지도가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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