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의 악령

니체가 이름 붙인 목소리

by김경훈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집을 지어보고 싶다거나 가게를 열어보고 싶다거나 바카라을 한 권 써보고 싶다거나. 대개 삼사십대에 이런 마음이 온다. 지금까지 해온 것과 다른 무언가,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진다.


이 충동은 대개 실행되지 않는다. 잠깐 생각하다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정리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몇 년 뒤에 다시 같은 생각이 든다.


니체는 이 충동을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것으로 봤다.


그의 바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창조는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해방이며 삶을 수월하게 만든다.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삶을 견디게 해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니체 자신이 그랬다. 그는 심한 편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썼다. 쓰는 일이 그를 버티게 했다.



그런데 니체는 창조가 값싼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창조하려면 고통을 겪어야 하고 많은 변화를 거쳐야 한다고 썼다. 창조하는 자의 삶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왜 그런가.


창조는 언제나 무언가를 치우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새 집을 지으려면 있던 것을 허물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려면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부분은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정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려면 그것을 만들기 전의 자신으로 남을 수 없다. 만드는 과정에서 자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달라짐에는 이전의 자기를 놓는 일이 포함된다.


이것이 니체가 죽음이라고 부른 것이다. 비유이지만 과장된 비유는 아니다. 오래 해오던 방식을 버리는 일은 실제로 무언가를 잃는 경험이다.


익숙한 방식에는 축적이 들어 있다. 여러 번 해봐서 어디가 어려운지 알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안다. 그 축적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나가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래서 잘하는 사람일수록 방식을 바꾸기 어렵다.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하는 사람은 버릴 것이 없어서 오히려 자유롭다.


경력이 쌓일수록 새로운 시도가 줄어드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게을러져서가 아니라 지금 가진 것이 무거워서다.



그리고 니체는 이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방해물에 이름을 붙였다.


중력의 악령이다.


이 악령이 하는 일이 흥미롭다. 우리 어깨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무거운 생각을 떨어뜨린다. 니체는 그것을 납 구슬 같은 생각이라고 표현했다.


떨어지는 문장들은 대개 이렇다.


너는 못 해. 실력이 부족해. 이미 늦었어. 다른 사람들은 훨씬 잘하잖아. 괜히 시작했다가 망신만 당할 거야.


이 목소리의 특징은 그럴듯하다는 것이다.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실력이 부족할 수 있고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반박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냉정한 판단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밖에서 오지 않는다. 니체가 지적한 부분이 이것이다. 그대가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적은 언제나 그대 자신일 것이라고 그는 썼다.


남이 하는 비판은 반박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데 자기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그렇게 처리되지 않는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쪽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목소리는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만들지 않으면 평가받지 않는다. 그러니 하지 말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지키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목소리에 저항하기가 더 어렵다. 나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아끼려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니체가 이것을 적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명백한 적은 알아보기 쉽다. 자기를 위한다는 얼굴을 한 것이 가장 다루기 어렵다.


중력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중력은 밀지 않는다. 그냥 아래로 당긴다. 저항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그래서 이 힘은 사건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누가 나를 막아섰다면 그것은 기억에 남는다. 부당하다고 느끼고 화가 나고 대응할 방법을 생각한다.


중력은 그렇지 않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시작하지 않은 일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몇 년 뒤에 돌아보면 아무것도 안 한 시기가 있는데 왜 그랬는지 설명이 안 된다. 특별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씩 아래로 당겨졌을 뿐이다.



니체는 이 악령에 굴복한 상태를 최후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가 묘사한 최후의 인간은 이렇다.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며 안락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람. 낮에도 즐기고 밤에도 즐기며 건강을 숭배하는 사람.


최후라는 말이 붙은 이유가 있다. 더 이상 다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새로 생기지 않으므로 인류가 거기서 멈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땅은 작아졌고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최후의 인간이 그 땅에서 뛰어다니고 있다고.


여기까지가 니체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잠깐 멈출 필요가 있다.



니체의 이 부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첫째, 안락하게 사는 사람을 경멸하는 태도가 들어 있다. 여행을 다니고 건강을 챙기고 무리하지 않는 삶. 니체는 그것을 작은 삶이라고 불렀지만 그 삶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언가를 만들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계에 쫓기거나 돌볼 사람이 있거나 몸이 아프거나. 그들이 창조하지 않는 것은 악령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를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다르고,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에 가깝다. 그것을 두고 정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니체 자신은 그 조건을 갖고 있었다. 스물다섯에 교수가 됐고 이후 아프긴 했지만 글을 쓸 시간과 여건은 있었다. 생계를 위해 하루 열두 시간을 일하면서 저녁에 철학을 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가진 조건을 의식하지 못한 채 남을 평가하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그 평가는 대개 조건이 없는 쪽에 불리하게 작동한다.


둘째, 니체의 논리에는 위험한 면이 있다. 자기를 넘어서다 파멸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는 썼다. 이 문장은 멋있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 파괴를 미화한다.


그리고 니체 자신이 그 길로 갔다. 1889년 토리노에서 정신이 무너졌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고 정확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창조를 위한 숭고한 대가처럼 다루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아픈 것은 낭만이 아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파멸을 창조의 증거로 읽기 시작하면 이상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은 사람은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이 되고, 자기를 갈아 넣는 일이 진지함의 표시가 된다.


실제로 이런 인식은 여러 분야에 남아 있다. 예술이든 학문이든 사업이든 몸을 상하게 하면서 일한 사람의 이야기가 미담처럼 전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온 것이지 그 덕분에 나온 것이 아니다. 니체가 건강했다면 더 오래 더 많이 썼을 것이다.


셋째, 창조를 큰일로만 보는 것도 문제다. 바카라을 쓰고 회사를 세우고 작품을 남기는 것만 창조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 창조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를 기르는 일이나 오래 한 가지 일을 잘 해내는 일이나 누군가를 오래 돌보는 일은 창조가 아닌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작은 삶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다.


니체가 이런 삶들을 충분히 고려했는지는 의문이다. 그의 시선은 위대함 쪽에 고정되어 있었고 평범함을 그 반대편에 두었다.


넷째, 이런 종류의 주장은 부담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압박이 오히려 사람을 굳게 만든다. 대단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시작 자체가 어려워진다.


그러니 니체의 어조는 그대로 가져오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럼에도 니체에게서 가져올 것이 있다.


중력의 악령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유용한 이유는 그 목소리를 자기 자신과 분리해주기 때문이다.


너는 못 한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대개 그것을 자기 판단으로 여긴다. 냉정하게 따져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판단을 신뢰한다.


그런데 그것에 악령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건 내 판단이 아니라 어깨에 앉은 무언가가 떨어뜨린 것이다. 그러면 한 번 더 확인해볼 여지가 생긴다.


이름을 붙이는 일에는 이런 효과가 있다. 어떤 상태에 이름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와 떼어놓고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무능하다는 생각과 지금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인식은 다르다. 앞의 것은 사실 진술처럼 느껴지고 뒤의 것은 관찰이다. 관찰은 검토할 수 있다.


니체가 그것을 악령이라는 낡은 단어로 부른 것도 이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악령은 내가 아니다. 밖에서 온 것이고 그러니 쫓아낼 수 있다.


정말 실력이 부족한가. 정말 늦었는가. 아니면 그냥 무서운 것인가.


이 구분은 중요하다. 실제로 준비가 안 됐으면 더 준비하면 된다. 그런데 두려움이 원인이라면 아무리 준비해도 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준비할수록 더 잘 아는 것이 많아져서 두려움이 커진다.


무언가를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실력인지 두려움인지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진전이다.


구분하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실력이 문제라면 무엇이 부족한지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을 더 배워야 하고 저 도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면 목소리가 줄어든다.


두려움이 문제라면 이유가 계속 바뀐다.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것이 나온다. 준비가 부족하다고 해서 준비했더니 이번에는 때가 아니라고 하고, 때를 맞췄더니 이번에는 반응이 걱정된다.


이유가 계속 갈아 끼워진다면 그것은 이유가 아니라 결론이다. 하지 않기로 이미 정해두고 근거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를 크게 볼 필요가 없다.


니체가 예로 든 것들은 거창하지만 그가 말한 구조는 규모와 무관하다.


핵심은 세 가지다. 지금까지 하던 방식을 놓을 것. 결과가 어떨지 모르는 상태를 견딜 것. 그 과정에서 자기가 달라지는 것을 받아들일 것.


이 조건은 작은 일에서도 성립한다.


늘 만들던 요리 말고 처음 보는 것을 해보는 일.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하던 업무를 다르게 해보는 일. 안 읽던 분야의 바카라을 펼치는 일.


전부 실패할 수 있고 실패하면 시간이 아깝다. 그래서 안 하게 된다. 중력의 악령은 이런 작은 자리에서 훨씬 자주 일한다.


큰 결심 앞에서는 오히려 각오가 생긴다. 문제는 별것 아닌 일들이다. 굳이 새로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매일 조금씩 선택지를 줄인다.


그리고 이 축소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번에 크게 줄어들면 알아차린다. 그런데 하루에 하나씩 줄면 모른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서야 예전에는 이런 것도 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다. 하나를 새로 해보면 그것이 다음 것을 쉽게 만든다. 해봤더니 별일 아니었다는 경험이 쌓이면 다음번 문턱이 낮아진다.


그러니까 이건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무엇을 만드느냐보다 지금 넓어지는 쪽으로 가고 있는지 좁아지는 쪽으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니체의 생애를 보면 그가 왜 이 문제에 집착했는지 짐작이 된다.


그는 스물다섯에 바젤대학 교수가 됐다. 대학을 막 마친 나이였다. 고전문헌학 분야에서 대단한 출발이었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다. 1878년부터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교수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후로는 자유 저술가로 살았고 두통이 덜한 곳을 찾아 계속 이동했다.


가장 중요한 저작들은 그 시기에 나왔다. 안정된 자리에서가 아니라 아프고 떠도는 상태에서 썼다.


그러니 창조가 그를 살렸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쓰지 않았다면 그 시기를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모두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만드는 일이 구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쉬는 일이 구원이다.


니체가 자기 경험을 인류 전체에 대한 처방으로 확장한 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이건 사상가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자신을 살린 것이 모두를 살릴 것이라고 믿는 것. 그런데 사람마다 결핍이 다르고 그래서 필요한 것도 다르다.


너무 많이 만들어서 소진된 사람에게 더 만들라는 말은 해롭다. 반대로 오래 멈춰 있던 사람에게는 그 말이 필요할 수 있다.


같은 조언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니체의 결론, 즉 창조하지 않으면 최후의 인간이라는 주장은 지나치다. 그것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고 한쪽을 경멸하는 논리다.


그런데 그가 관찰한 것은 정확했다.


무언가를 만들려고 할 때 우리를 막는 것은 대개 바깥의 조건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라는 것. 그 목소리가 그럴듯한 논리를 갖추고 있어서 반박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는 밀지 않고 당기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는 것.


그러니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하지 않기로 한 그 일을, 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말 그럴 만해서인가. 아니면 어깨 위에서 떨어진 납 구슬 하나 때문인가.


이 질문에 답한 뒤에 그만두는 것과 답하지 않고 그만두는 것은 다르다.


앞의 경우는 선택이고 뒤의 경우는 그냥 중력이다.


그리고 답이 그만두는 쪽으로 나와도 괜찮다.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여력이 없다거나 우선순위가 아니라거나 하는 이유는 충분히 좋은 이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정했다는 감각이다. 하지 않기로 정한 것과 어쩌다 하지 않게 된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나중에 다시 꺼낼 수 있다. 조건이 달라지면 다시 검토하면 된다.


후자는 그렇지 않다. 결정한 적이 없으니 재검토할 것도 없다. 그냥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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