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가 나눈 두 감정
미움은 나쁜 감정으로 취급된다.
사랑은 권장되고 미움은 금지된다.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말하면 그 사람의 인격이 곧바로 의심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미움을 느끼면 그것을 숨기거나 스스로를 나무란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데.
그런데 미움이 정말 감정의 밑바닥일까.
쇼펜하우어는 다르게 봤다. 그가 보기에 미움보다 훨씬 나쁜 것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 나쁜 것은 대체로 좋은 것처럼 보인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먼저 그가 사랑과 미움을 어떻게 봤는지부터 보자.
그는 이 둘이 같은 집에 산다고 했다.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서라는 한 공간의 두 얼굴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우리 경험과 잘 맞는다.
무관심한 사람을 미워하기는 어렵다. 미움은 대개 가까웠던 사람, 기대했던 사람, 마음을 썼던 사람을 향한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는 일이 흔하다.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다. 오래 다투던 사람과 어느 순간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감정이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마음이 걸려 있다는 점에서 둘은 같다. 방향만 다르다.
그러니까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다.
이 점은 일상에서도 확인된다.
헤어진 연인에 대해 계속 화가 나 있다면 아직 정리가 안 된 것이다. 진짜로 끝난 것은 그 사람 소식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을 때다.
험담을 오래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싫으면 잊으면 되는데 계속 이야기한다. 그만큼 그 사람이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움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에게나 그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쇼펜하우어가 강조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감정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하기로 결심해서 사랑하게 되는 사람은 없다.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고 미움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감정은 온다.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도착하고 도착한 뒤에는 그냥 거기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뒤에 있다. 그것을 키우거나 내버려두거나 다스리거나 눌러두는 것. 다만 없앨 수는 없다.
이 인식이 왜 중요한가.
미움을 느끼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기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느끼지 않아야 할 것을 느끼고 있으니 그것을 부인하게 된다. 나는 저 사람이 밉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런데 감정은 그대로 있으니 다른 형태로 나온다.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가 생긴다.
인정하는 편이 낫다. 지금 저 사람이 밉다고. 그것을 인정해야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느끼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 미움을 느끼는 것은 선택이 아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선택이다.
이 구분이 흐려지면 두 가지 오류가 생긴다.
하나는 감정을 죄로 다루는 것이다. 미운 마음이 든 것만으로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판정한다. 그러면 감정을 숨기게 되고 숨긴 감정은 다루기 어려워진다.
다른 하나는 감정을 면죄부로 쓰는 것이다. 미워서 그랬다고 말하면 행동이 정당화된다고 여기는 것. 감정이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이 행동까지 선택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것은 앞의 오류에 대한 것이었다. 오지 않게 할 수 없는 것을 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일의 무용함.
다스리는 것은 가능하다.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둘을 혼동하면 힘만 든다.
여기까지가 미움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 진짜 문제로 넘어가자.
괴테가 남긴 문장이 있다.
미움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그러나 멸시는 인간을 무너뜨린다.
이 문장을 처음 보면 갸웃하게 된다. 미움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니. 미움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구분을 알고 나면 이해가 된다.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미움은 마음의 일이고 멸시는 머리의 일이다.
이 구분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보자.
미움은 감정이다. 온몸을 뒤흔들고 잠을 못 자게 만들고 판단을 흐린다. 그런데 정작 왜 이렇게까지 미운지는 본인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이유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유가 감정보다 작다는 뜻이다. 미움의 크기가 사건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
멸시는 다르다. 멸시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저 사람은 이래서 부족하고 저래서 수준이 낮다.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이유들은 대개 틀리지 않았다. 그것이 멸시를 견고하게 만든다.
미움은 스스로도 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진다.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멸시는 그런 자기 점검을 거치지 않는다. 근거가 있으니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근거가 쌓인다. 이미 그렇게 보고 있으니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것들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멸시에는 격동이 없다. 차분하다. 화가 나지도 않고 잠을 설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사람을 낮게 평가하고 그것으로 끝이다.
이 차분함이 멸시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것이 멸시를 위험하게 만든다.
두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방식도 다르다.
미움은 티가 난다. 목소리가 올라가고 표정이 굳고 말이 거칠어진다. 숨기려 해도 어딘가에서 새어 나온다.
멸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예의 바른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말투는 정중한데 상대의 말을 진지하게 받지 않는 것. 웃으면서 넘기는 것. 굳이 반박하지 않는 것.
반박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박은 상대를 진지하게 대할 때 나오는 행동이다.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해도 그 사람이 대화 상대라고 여기면 논박하게 된다.
멸시하는 사람은 반박하지 않는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관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왜 그런가.
미움은 상대를 여전히 대등한 자리에 둔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를 흔들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움에는 아이러니한 존중이 들어 있다. 상대를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운 것이다.
멸시는 반대다. 상대를 나보다 아래에 놓는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나에게 도달하지 않는다. 반응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것이 왜 파괴적인가.
멸시받는 사람은 반박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미움을 받는 사람은 그래도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왜 그러느냐고 물을 수 있고 오해를 풀 수 있다. 감정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 수도 있다.
멸시받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다. 좋은 말을 해도 저 수준에서 나온 말로 처리되고 옳은 지적을 해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미 평가가 끝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더 잘하면 인정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평가의 기준이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애쓰는 모습이 딱하게 여겨지거나 주제넘게 보인다. 무엇을 해도 이미 정해진 해석 안으로 들어간다.
이 구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실상 그 관계를 떠나는 것뿐이다. 안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멸시는 상대를 대화 상대에서 제외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제외는 상대에게 전달된다.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놀랍도록 정확하게 감지한다. 말의 내용보다 그 말이 자기에게 도달하는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차린다.
내 말이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는 감각은 화가 나는 것보다 훨씬 견디기 어렵다. 화를 내는 상대와는 싸울 수 있지만 나를 통과시켜버리는 상대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오래 멸시받은 사람은 말수가 줄어든다.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괴테가 멸시는 인간을 무너뜨린다고 한 것이 이런 뜻일 것이다. 미움은 사람을 아프게 하지만 멸시는 사람을 지운다.
이 차이는 관계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부나 친구 사이에서 크게 싸우는 것은 관계가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다. 싸운다는 것은 아직 서로에게 걸려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말 위험한 신호는 다른 데 있다. 싸움이 멈추고 상대의 말에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것. 무슨 말을 하든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
그 지점에 도달하면 되돌리기가 어렵다. 감정이 식은 것이 아니라 판단이 굳었기 때문이다.
감정은 바뀔 수 있다. 판단은 잘 바뀌지 않는다. 특히 그 판단이 나를 위쪽에 놓아주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기를 높이는 결론은 검토받지 않는다. 불리한 결론은 몇 번이고 다시 따져보면서 유리한 결론은 그냥 받아들인다. 멸시가 오래가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멸시는 편안하다. 상대가 부족하다고 결론 내리면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어진다. 상대를 이해하려 애쓸 필요도 없고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도 없다.
이 편안함 때문에 사람들은 미움에서 멸시로 옮겨간다. 미워하는 것은 힘들고 멸시하는 것은 편하기 때문이다.
이 이동은 대개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화가 난다.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되고 그래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 단계는 피곤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설명이 만들어진다.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 설명. 그러면 마음이 편해진다. 더 이상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놀랄 일도 없어진다.
이 설명이 생기는 순간이 미움에서 멸시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과 겹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리가 됐다고 느낀다.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느끼는데 그 대상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면,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종료일 가능성이 높다.
쇼펜하우어의 원문에는 지금 기준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그는 정서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뚜렷하다는 당시의 통념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여자는 사랑하거나 미워할 뿐 다른 것은 모른다는 식의 인용도 함께 등장한다.
이런 문장들은 그 시대의 산물이고 지금은 근거 없는 일반화로 본다. 감정의 강도가 성별로 갈린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없다.
다만 이 부분을 걷어내도 그의 핵심 구분은 남는다. 미움과 멸시가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고 후자가 훨씬 파괴적이라는 관찰은 성별과 무관하게 성립한다.
오래된 사상을 읽을 때 필요한 작업이 이런 것이다. 무엇이 그 시대의 편견이고 무엇이 시대를 넘는 통찰인지를 가르는 일.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두 가지 중 하나가 된다. 편견까지 함께 받아들이거나 통찰까지 함께 버리거나.
앞의 경우는 오래된 글이라는 이유로 문제 있는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뒤의 경우는 쓸 만한 것을 잃는다.
가려내는 기준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 주장이 특정 집단에 대한 일반화에 기대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 일반에 대한 관찰인지.
미움과 멸시의 구분은 후자다. 누구에게나 해당하고 실제로 확인해볼 수 있다.
쇼펜하우어 본인은 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키우던 푸들을 꾸짖을 때 인간아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원래 이름이 따로 있었는데 화가 나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개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이 인간이었던 셈이다.
이 일화는 종종 그의 인간 혐오를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된다. 다만 다르게 읽을 여지도 있다. 개를 인간에 비유해서 꾸짖으려면 인간이 어떤지에 대해 상당히 생각해봤어야 한다.
정말 관심이 없으면 그런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르고 말았을 것이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대학에 자리를 잡지도 못했다. 강의를 열었지만 학생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같은 시간에 헤겔의 강의를 배치했다가 참패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헤겔은 학계의 중심이었고 쇼펜하우어는 무명에 가까웠다. 그 상황에서 같은 시간에 강의를 연 것은 정면 승부를 걸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이 일화가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헤겔에게 밀린 뒤 쇼펜하우어가 보인 반응이 미움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헤겔을 비난했고 그 비난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멸시했다면 언급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이야기했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의 글은 살아남았다. 괴테가 읽었고 니체는 추종자였으며 바그너도 그의 팬이었다.
인간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인간의 감정에 대해 정확한 관찰을 남긴 셈이다.
어쩌면 거리를 두고 봤기 때문에 보인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사람들에게 느낀 것이 미움이었는지 멸시였는지는 알 수 없다.
푸들을 인간이라 부르며 꾸짖는 사람이 인간에게 완전히 무관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리하면 이렇다.
미움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고 그것을 느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인하면 다른 곳에서 새어 나온다.
미움에는 아직 연결이 남아 있다. 부정적인 연결이지만 연결은 연결이다. 그리고 연결이 있는 한 회복의 가능성도 있다.
멸시는 그 연결을 끊는다. 조용하고 논리적이고 편안하게 끊는다. 그리고 끊긴 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화가 나 있다면 그것은 아직 나쁜 상태가 아닐 수 있다.
물론 미움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 자기를 갉아먹고, 행동으로 나가면 실제로 사람을 다치게 한다.
다만 미움 자체를 없애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눌러둔 미움은 사라지지 않고 대개 멸시로 굳는다. 그게 더 나쁜 자리다.
정말 확인해봐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저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내가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결론을 내려두고 확인만 하고 있는가.
그리고 반대 방향도 물어볼 만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말해도 닿지 않는다는 감각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내 표현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 있다.
뜨거운 것보다 차가운 것이 더 위험할 때가 있다. 온도가 낮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