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향수의 성분표는 세 줄이면 끝난다.
그린 헤이즐넛. 시더우드. 로스팅 오크.
탑 하나 미들 하나 베이스 하나. 이보다 짧은 성분표를 가진 향수는 드물다. 그런데 이 짧은 목록에는 물어볼 것이 꽤 많다.
먼저 헤이즐넛부터.
익은 개암이 아니다. 그린 헤이즐넛이라고 적혀 있다. 아직 익지 않아 껍질이 초록빛인 상태. 이 시기의 개암은 고소하지 않다. 풀 냄새가 나고 약간 떫고 물기가 많다. 우리가 아는 견과류의 냄새는 익어서 마르고 볶아야 나온다.
그러니 이 향수의 첫 향에서 초콜릿 스프레드 같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실제로 여러 리뷰가 그 점을 경고한다. 견과류와 나무를 상상하고 왔다가 예상외로 초록빛이라고 놀라는 사람이 많다.
지난 호에서 포피 앤 바알리를 다루며 그 향수의 모든 재료가 최종 형태에 도달하기 전에 멈춰 있다고 썼다. 같은 집안의 이 향수도 사정이 비슷하다. 열매가 되기 직전에서 붙잡아 둔 것이다.
"익으면 흔해집니다. 익기 전이 더 할 말이 많아요."
조향사는 얀 바스니에다. 조 말론의 블룸즈버리 세트 컬렉션을 만든 사람이고 가을 숲과 찬 공기와 연기를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취향이 그대로 작품이 된 경우다.
그가 오크를 택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참나무는 서양에서 오랫동안 특별한 나무였다. 켈트족은 신성한 나무로 여겼고 지팡이와 지팡이 손잡이를 만들었으며 아서왕의 원탁도 참나무 한 그루를 잘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백 년을 사는 나무이니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사실 자체가 경외의 근거가 됐다.
향수에서 나무라고 하면 대개 샌달우드나 시더우드를 떠올린다. 오크가 주인공으로 나서는 일은 드물다. 이 컬렉션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간 셈이다.
베이스의 오크가 이 향수의 진짜 주인공이다.
조 말론은 2017년에 잉글리시 오크 컬렉션을 내면서 로스팅 오크 앱솔루트라는 재료를 전면에 세웠다. 참나무 조각을 씻은 다음 고온에서 볶아 얻어내는 물질이다. 그렇게 하면 달고 스모키한 앱솔루트가 나온다.
이 공정은 위스키 통을 만드는 방식과 같은 원리다. 참나무 통 안쪽을 불로 그슬리면 나무 안의 성분이 분해되면서 바닐린과 여러 향 물질이 만들어진다. 위스키의 단맛과 바닐라 향의 상당 부분이 거기서 온다. 오크는 원래 그렇게 향이 강한 나무가 아닌데 열을 가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서 열세 번째 편이 떠올랐다. 바이레도 비블리오테크를 다루면서 오래된 바카라의 달콤한 냄새가 리그닌 분해로 생긴 바닐린이라고 썼다. 같은 물질이다. 바카라이 백 년에 걸쳐 천천히 하는 일을 오크는 몇 시간의 고온에서 해낸다. 속도만 다를 뿐 원리는 같다.
시간과 열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나무를 부수고 그 부스러기에서 냄새를 꺼낸다.
덧붙일 것이 있다. 향수에서 오크라는 단어가 붙은 재료 중에 오크모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참나무가 아니다. 참나무 껍질에 붙어 자라는 이끼다. 시프레 계열의 핵심 재료이고 축축하고 흙 같은 냄새를 낸다. 이름만 보면 같은 집안 같지만 전혀 다른 생물이다.
이런 혼동은 자료의 세계에서도 흔하다. 표제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다른 것이 같은 항목으로 묶이거나 반대로 같은 것이 다른 이름으로 흩어진다. 정리하는 사람이 늘 붙잡고 있는 문제다.
잉글리시 오크 앤 헤이즐넛에 오크모스는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 있는 오크는 나무 그 자체이고 그것도 불에 그슬린 상태다.
한 가지 걸리는 질문이 있었다.
어느 리뷰어가 이 향수를 조사하다가 로스팅 오크라는 말을 보고 물었다. 이 향수를 위해 참나무가 죽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목공소에서 나온 폐목재나 잘라낸 가지를 쓰는 건가.
브랜드 설명에는 그 부분이 없다. 씻은 나무 조각이라고만 되어 있다.
"저에 대해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나누면 후자가 더 많습니다."
이 대답이 정직해서 오히려 좋았다. 향수 업계에서 원료의 출처는 대체로 공개되지 않는다. 배합비는 영업 비밀이고 공급망은 복잡하며 소비자가 물어볼 통로도 마땅치 않다.
문헌정보학에서는 이런 문제를 출처 정보라고 부른다. 자료가 어디서 왔고 누구의 손을 거쳤으며 어떤 경로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이 정보가 없으면 자료의 신뢰성을 평가할 수 없다. 미술품에서도 소장 이력이 빠지면 가격이 떨어진다. 물건 자체는 그대로인데 이력이 없다는 이유로.
향수에는 그 관행이 거의 없다. 병에는 브랜드와 향 이름만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비어 있다. 열여섯 번째 편에서 다룬 프레데릭 말이 조향사 이름을 병에 넣은 것이 예외적인 사건으로 다뤄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름 하나 적는 것이 사건이 될 만큼 이 분야는 정보를 남기지 않는다.
물론 향수를 살 때 원목의 출처를 따지는 사람은 드물다. 다만 알 수 없다는 것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팔공산 자락으로 나간 날 이 향수를 뿌리고 갔다.
여름 끝이라 아직 숲이 무성했다. 그늘에 들어서면 온도가 확 떨어지고 공기의 무게가 달라진다. 발밑에서 마른 잎과 젖은 흙이 번갈아 밟혔다. 매미 소리가 층층이 겹쳐 들리다가 어느 구간에서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무가 빽빽한 자리는 소리도 다르게 지나간다.
탱고가 앞에서 속도를 조절했다. 오르막에서는 반 발짝 앞서고 내리막에서는 조금 더 붙는다.
손목의 향과 숲의 냄새를 번갈아 맡아 봤다. 겹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시더우드의 마르고 서늘한 결이 그렇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숲에는 볶은 냄새가 없다.
당연한 이야기다. 살아 있는 나무는 볶이지 않는다. 이 향수의 베이스는 자연의 냄새가 아니라 인간이 나무에 열을 가해서 만든 냄새다. 숲이 아니라 공방이나 증류소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이 향수는 영국 시골의 참나무 숲을 담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담긴 것은 그 숲의 나무를 베어 볶은 결과물이다. 풍경이 아니라 가공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향이 조금 다르게 읽혔다. 나쁘게가 아니라 다르게. 숲에 서 있는 기분이 아니라 숲에서 나온 재료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 옆에 있는 기분이다.
내려오는 길에 보보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향수가 담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담긴 것이 다를 때 그것을 거짓이라고 해야 하는지. 보보는 잠시 걷다가 그건 거짓이라기보다 생략에 가깝다고 했다. 모든 설명은 무언가를 빼놓고 만들어지는데 문제는 무엇을 빼느냐라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빼놓은 것이 소비자의 판단에 영향을 줄 만한 것이면 그때부터는 윤리 문제가 된다고. 향수 병에 원목 출처가 없는 건 아무도 묻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물으면 곤란해서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 구분이 안 되는 상태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속력은 여덟 시간 정도이고 확산은 크지 않다. 피부보다 옷에 더 잘 남는다는 평이 많다. 실제로 다음 날 셔츠에서 냄새가 났다.
조 말론 특유의 단순함이 이 향수에서는 장점으로 작동한다. 재료가 셋뿐이라 각각이 또렷하고 겹쳐 뿌리기에도 좋다. 어떤 이는 이 단순함을 두고 도전적인 요소를 전부 걷어낸 결과라고 평하기도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모든 향수가 도전적일 필요는 없다.
여름이 물러가고 아침 공기에 서늘함이 섞이기 시작하는 지금 뿌리기 좋다. 아직 초록이 남아 있고 이미 마르는 것들이 생겨나는 계절. 그린 헤이즐넛과 볶은 오크가 한 병에 있는 것이 딱 그 상태다.
살아 있는 것과 가공된 것이 나란히 있는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