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말론 런던 포피 앤 바알리

by김경훈

이 향수의 이름에는 두 가지가 적혀 있다. 양귀비와 보리.


그리고 둘 다 향료로 존재하지 않는다.


개양귀비는 침묵하는 꽃이다. 붉고 얇은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 유명한 모습과 달리 코를 가까이 대도 거의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 보리도 마찬가지다. 밭에 서 있는 보리에서 우리가 맡는 것은 흙과 마른 잎과 볕에 데워진 공기이지 보리 자체의 냄새가 아니다.


미들 노트의 제비꽃도 사정이 같다. 19세기 말에 이오논이라는 합성 분자가 발견되기 전까지 제비꽃 향은 재현할 방법이 없었다.


향수 업계에는 침묵하는 꽃이라는 표현이 있다. 분명 존재하고 눈에도 잘 띄는데 향료로는 붙잡히지 않는 꽃들. 은방울꽃 헬리오트로프 라일락 그리고 제비꽃이 여기 속한다. 이런 꽃들의 향은 추출이 아니라 조립으로 만들어진다. 다른 재료를 조합해 그 인상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제비꽃의 경우는 특히 극적이다. 19세기 말에 이오논이라는 분자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제비꽃 향수가 가능해졌다. 그 전까지 제비꽃은 향수에 담을 수 없는 꽃이었다. 화학이 없었다면 이 향수의 미들 노트도 없었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이 향수는 이름과 심장부의 재료 대부분이 실물에서 뽑아낸 것이 아니다. 전부 재현이다.



"저는 존재하지 않는 냄새들의 모음입니다."


이 문장을 듣고 나는 잠깐 멈췄다. 향수 리뷰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 있다. 어떤 향수가 무엇무엇의 냄새를 담았다는 말. 그런데 담긴 것이 애초에 냄새가 없는 대상이라면 그 문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들판에 서 본 적 있으십니까. 그때 맡은 것이 양귀비였습니까 아니면 그 자리의 공기였습니까."


정확한 반문이었다. 우리는 꽃 냄새를 맡는다고 믿지만 실제로 코에 들어오는 것은 꽃과 흙과 바람과 볕이 섞인 상태다. 꽃은 그 장면의 이름표일 뿐 냄새의 주체가 아닌 경우가 많다.


이 향수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출발한다. 양귀비를 재현하는 대신 양귀비가 서 있던 자리를 재현한다.



2019년에 나왔고 조향사는 마틸드 비자우이다. 영국 들판에서 흔들리는 붉은 양귀비와 황금빛 보리밭이라는 이미지를 브랜드가 내세웠다.


첫 향은 무화과다. 이름에 없는 재료가 제일 먼저 나온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무화과의 살과 껍질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초록의 풋내음. 여기에 블랙커런트가 시큼한 각을 세우고 제비꽃이 파우더리한 결을 얹는다.


이 오프닝을 두고 첫 향부터 촉촉한 흙내가 난다고 쓴 리뷰를 봤는데 맞는 말이다. 들판의 향수인데 꽃부터 시작하지 않고 땅부터 시작한다.


중반부에서 밀과 양귀비와 파우더리 노트가 자리를 잡는다. 여기가 이 향수의 핵심인데 신기하게도 딱 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곡물의 고소함 같기도 하고 마른 풀 같기도 하고 아주 옅은 아몬드 같기도 하다. 어느 리뷰어는 이 지점에서 아몬드의 고소함과 미세한 매캐함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양귀비인 것 같다고 썼다.


같은 것 같다는 표현이 이 향수에는 잘 어울린다. 확정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영국에서 붉은 양귀비는 그냥 들꽃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의 전몰자를 기리는 상징이다. 전장이 갈아엎어진 자리에 이 꽃이 유독 많이 피어났기 때문이다. 해마다 11월이면 사람들이 옷깃에 종이 양귀비를 단다.


이 향수가 영국 브랜드에서 나왔고 영국 들판을 내세운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이름은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 물론 이 향수가 추모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단어는 사용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미 의미를 갖고 있다. 표제어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늘 마주치는 문제다. 같은 글자가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다.


베이스에서 보리와 머스크와 블랙 라이스 넛이 내려앉는다. 여기서 이 향수가 왜 곡물 계열로 분류되는지가 분명해진다. 볶은 곡식의 구수함이 있는데 뜨겁지 않다. 갓 볶아 낸 것이 아니라 볶아서 식힌 것. 방앗간을 지나칠 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냄새보다는 그 방앗간에서 나온 사람의 옷에 남은 냄새에 가깝다.


여러 리뷰가 이 향수를 두고 핸드크림 같다고 한다.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 비유가 오히려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핸드크림 냄새의 본질은 존재감이 아니라 접촉이다. 멀리 퍼지지 않고 손이 닿는 거리에만 있다. 이 향수도 그렇다.



조 말론이라는 브랜드의 방식도 짚어둘 만하다. 이 집의 향수는 대체로 노트 수가 적고 구조가 단순하다. 복잡한 서사를 쌓기보다 두세 가지 재료를 또렷하게 배치한다. 그래서 처음 맡아도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채기 쉽다.


이 단순함에는 이유가 있다. 조 말론은 향수를 겹쳐 뿌리는 방식을 브랜드 전략으로 삼았다. 하나만으로 완결되기보다 다른 향과 섞일 여지를 남겨 둔다는 뜻이다.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다른 문장과 이어 붙일 수 있는 구절에 가깝다.


포피 앤 바알리가 존재감을 앞세우지 않는 것도 이 설계와 무관하지 않다. 혼자 서 있으려는 향수가 아니다.


밀과 보리를 향수에 넣는다는 발상 자체가 흥미롭다.


곡물은 오랫동안 향수의 재료가 아니었다. 향수는 꽃과 나무와 수지와 동물성 재료로 만들어졌고 곡물은 먹는 것이었다. 그 경계가 흐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인간이 가장 오래 맡아 온 냄새 중 하나가 곡물이다. 정착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사람은 곡식 옆에서 살았다. 널어 말리고 빻고 볶고 저장했다. 향수 재료로는 늦게 들어왔지만 후각의 역사에서는 훨씬 앞자리에 있다.


기록의 세계에도 비슷한 순서 뒤바뀜이 있다. 가장 흔하고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늦게 수집된다. 왕실 문서는 처음부터 보관됐지만 장터의 영수증과 편지와 일기는 한참 뒤에야 자료로 인정받았다. 흔하다는 이유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 것들이다. 지금은 그쪽이 오히려 그 시대를 더 잘 말해 준다.


곡물 노트가 향수에 들어온 것도 같은 종류의 뒤늦은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보보와 근교로 나갔던 날 논둑을 걸었다. 벼가 익어 가는 시기라 공기가 달랐다. 마른 잎과 물과 흙이 섞인 냄새인데 어느 하나로 특정되지 않는다. 발밑에서 마른 풀이 밟히는 소리가 계속 났고 이따금 물꼬 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탱고가 앞장서서 걷다가 이따금 멈춰 코를 낮췄다. 이 녀석이 논 냄새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보가 많은 자리라는 건 아는 것 같았다.


손목의 향과 그 자리의 공기를 번갈아 맡아 봤다. 향수 쪽이 훨씬 단정했다. 논에는 물비린내도 있고 어딘가 썩어 가는 냄새도 있는데 향수에는 그런 것이 없다. 곡식의 고소함만 남기고 나머지를 걷어냈다.


플로라벨리오를 다룰 때 그 향수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일부러 남겨 뒀다고 썼다. 커피와 참깨가 바다 옆에 있었던 것. 포피 앤 바알리는 반대 방향이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모두 덜어냈다.


어느 쪽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나는 기억을 닮았고 하나는 인상을 닮았다. 기억은 지저분하고 인상은 단정하다.


이 향수가 편안한 이유가 거기 있다. 그리고 오래 남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다.


여름이 끝나 가는 지금 뿌리기에 좋은 향수다. 아직 볕이 있고 곡식이 익어 가는 계절. 화려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고 곁에 온 사람에게만 들리는 정도로 말한다. 매일 뿌려도 질리지 않는 종류의 향수는 대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존재하지 않는 꽃의 이름을 달고서 존재하는 계절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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