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보도 탱고도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0년 전 미시간에 있을 때 일이다.
그때 나는 혼자였고 안내견도 없었고 결혼은 상상도 안 하고 있었다.
12월이었고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곳의 겨울은 소리가 이상해진다.
눈이 쌓이면 반사음이 죽어서 공간이 갑자기 좁게 느껴진다.
발밑에서 나던 소리도 사라진다.
그래서 겨울에는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기숙사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길에 미끄러졌다.
손목이 부러졌다.
이것은 시각장애인이 손목을 다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때 어느 사무실에서 들은 질문 하나에 관한 기록이다.
두 번 멈춘다
오른쪽 손목이었다.
깁스를 하고 6주라고 했다.
비장애인에게 손목 골절은 불편한 6주다.
글씨를 못 쓰고 무거운 걸 못 들고 샤워가 번거롭다.
나에게는 조금 다른 일이었다.
점자는 손으로 읽는다.
그러니까 그날부터 6주 동안 나는 읽는 방법 하나를 잃었다.
왼손만으로도 읽을 수는 있다.
다만 속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오래 못 읽는다.
음성으로 들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맞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버텼다.
다만 그때 알았다.
읽기 수단이 하나뿐인 상태와 두 개인 상태는 전혀 다르다는 것.
표를 확인하거나 수식을 따라가거나 인용 부호를 정확히 봐야 할 때
음성만으로는 잘 안 된다.
점자는 그럴 때 눈에 가까운 역할을 한다.
지팡이도 문제였다.
오른손으로 잡던 걸 왼손으로 바꾸니 몸의 균형 감각이 통째로 어긋났다.
익숙한 길에서 두 번 벽에 부딪혔다.
기숙사 방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물건의 위치를 손으로 확인하며 사는 사람에게
한 손을 쓰지 못한다는 건 확인 속도가 절반이 된다는 뜻이다.
컵을 찾다 쏟고 문고리를 놓치고
깁스한 손으로 뭔가를 건드려서 떨어뜨렸다.
그 겨울에 나는 처음으로 방 안에서 조심하며 살았다.
그전까지 방은 내가 가장 편한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그 6주 동안 나는 평소보다 훨씬 더 못 하는 사람이었다.
시각장애는 그대로였고 거기에 다른 제한이 하나 더 얹혔을 뿐인데
결과는 단순한 덧셈이 아니었다.
장애는 서로 곱해진다.
그때 몸으로 배웠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운 게 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졌다는 것.
시각장애는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설명이 필요 없고 대체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안다.
깁스는 달랐다.
사람들이 훨씬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문을 잡아 주고 짐을 들어 주고 괜찮냐고 물었다.
같은 사람인데 깁스가 있을 때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중에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깁스는 일시적이라서 그렇다.
6주 뒤에 사라질 상태에 대한 도움은 부담이 없다.
계속되는 상태에 대한 도움은 다르다.
한 번 도와주면 계속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사람을 망설이게 한다.
이건 나쁜 마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계산이다.
그리고 이 계산이 왜 제도가 필요한지를 설명해 준다.
지속적인 필요는 선의로 감당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질문
학교의 장애학생지원실에 갔다.
나는 이미 그 사무실에 등록된 학생이었다.
시각장애 관련 조정 사항이 이미 파일에 있었다.
담당자가 물었다.
지금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필요하냐고.
나는 손목 이야기를 했다.
점자를 못 읽는다는 것과 이동이 불안해졌다는 것.
담당자가 몇 가지를 적더니 이렇게 말했다.
시험 시간을 더 드리고
과제 제출 기한을 조정하고
필기 지원 인력을 붙이고
기숙사에서 강의동까지 셔틀을 배정하겠다고.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물었다.
6주 뒤에 다시 볼까요 아니면 그때 연장이 필요하면 오시겠어요.
나는 그 질문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너무 당연한 흐름이었으니까.
이상하다는 걸 안 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그 사무실에서 나에게 아무도 이렇게 묻지 않았다.
이게 영구적인 상태입니까.
그들이 물은 건 하나였다.
지금 무엇이 필요합니까.
옆자리
기다리는 동안 옆에 앉아 있던 학생이 있었다.
목소리로 보아 20대 초반이었고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농구를 하다 다쳤다고 했다.
그 학생도 같은 사무실에 왔다.
같은 대기실에 앉아 같은 담당자를 만나고 같은 절차를 밟았다.
이게 그날의 핵심이었다는 걸 나는 한참 뒤에 알았다.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 사람과
8주 뒤면 완전히 회복될 사람이
같은 창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미래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 그 순간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성격이 같았다.
이동 지원과 시간 조정과 대체 자료.
그 사무실은 두 사람을 구별하지 않았다.
구별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리하는 건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조정 사항이었으니까.
이 방식에는 실무적인 장점도 있다.
신분으로 관리하면 등록과 해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등록과 해지 사이에 늘 분쟁이 생긴다.
조정 사항으로 관리하면 그냥 시작하고 끝난다.
필요가 있으면 열고 없어지면 닫는다.
그리고 상태가 변하면 조정도 바뀐다.
장애는 원래 고정된 게 아니다.
같은 사람도 나이가 들면 달라지고 병이 겹치면 달라지고
심지어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신분으로 관리하는 제도는 이 변화를 잘 못 따라간다.
한 번 정해진 등급이 몇 년씩 그대로 남는다.
오랫동안
한국의 장애인복지법은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슬롯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사람.
읽어 보면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두 단어가 걸린다.
오랫동안. 그리고 상당한 제약.
오랫동안이 얼마인가.
3개월인가 6개월인가 1년인가 아니면 평생인가.
법은 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는 의학적 판정과 행정 절차가 그 선을 긋는다.
장애가 사실이 아니라 인정받는 지위가 되는 지점이 여기다.
상당한 제약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상당한가.
혼자 버스를 못 타는 것인가.
키오스크를 못 쓰는 것인가.
온라인 민원을 못 보는 것인가.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
그 제약은 누구로부터 오는가.
휠체어 이용자가 못 들어가는 이유는 다리 때문일 수도 있고 계단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정보를 못 얻는 이유는 시력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문서가 이미지라서일 수도 있다.
현행법의 정의는 이 질문에서 앞쪽만 본다.
원인을 개인의 몸 안에서 찾는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다르게 본다.
장애를 손상과 슬롯적 환경적 장벽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장애가 몸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슬롯 안에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 법의 정의는 아직 그 자리까지 오지 않았다.
이 차이는 실제 제도 설계에서 크게 벌어진다.
원인을 몸에서 찾으면 해결바카라도 몸으로 간다.
치료와 재활과 기능 회복.
원인을 상호작용에서 찾으면 해결바카라이 둘로 나뉜다.
몸 쪽에도 가고 환경 쪽에도 간다.
그리고 임시 장애의 경우 환경 쪽 해결바카라이 훨씬 효율적이다.
6주 뒤에 나을 사람의 몸을 고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 6주 동안 강의 자료를 파일로 주는 일은 그날 할 수 있다.
일시적 상태일수록 환경 조정의 비용 대비 효과가 크다.
그런데 지금 제도는 일시적이라는 이유로 그 조정을 아예 안 한다.
기다리라는 말
의료적 판정 절차 자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진단서와 검사 결과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장애 유형에 따라 몇 달의 경과 관찰이 필요한 경우도 실제로 있다.
그건 정확성을 위한 절차다.
문제는 그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의 삶이다.
사고가 난 순간부터 이동은 어려워진다.
질병이 시작된 순간부터 생계가 흔들린다.
재활이 시작된 순간부터 돌봄 부담이 생긴다.
그런데 제도는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장애는 이미 시작됐는데 장애인은 아직 아닌 구간이 생긴다.
그리고 그 구간이 대체로 가장 힘든 시기다.
사고 직후에는 아직 아무것도 정리가 안 되어 있다.
집도 안 고쳤고 기기도 없고 이동 방법도 모르고
무엇보다 본인이 자기 상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도움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지원이 가장 적다.
이 순서가 뒤집혀 있다는 게 지금 제도의 핵심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체계는 장애인을 지원하는 체계라기보다
장애를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체계에 가깝다.
그리고 증명은 시간이 걸린다.
증명의 부담이 어디에 놓이는지도 봐야 한다.
지금은 당사자가 자기 상태를 증명해야 한다.
서류를 모으고 병원을 다니고 절차를 따라간다.
몸이 가장 안 좋은 시기에 가장 복잡한 행정을 해야 하는 구조다.
그리고 이 과정을 혼자 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가족이 대신하게 되고 가족이 없으면 아예 못 한다.
그러니까 지금 제도는 증명할 여력이 있는 사람을 먼저 지원한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결과는 그렇다.
다르게 하는 곳들
다른 나라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면 방향이 보인다.
미국의 여러 주에는 단기장애보험이 있다.
질병이나 사고로 일정 기간 일을 못 하게 되면
그 장애가 영구적인지와 무관하게 소득 보전과 지원이 제공된다.
기준이 영구성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다.
독일에는 재활이 연금보다 우선한다는 오래된 원칙이 있다.
장애를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것보다 재활과 슬롯 복귀를 먼저 지원한다는 뜻이다.
분류보다 참여 유지가 중요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네덜란드는 노동능력 상실과 슬롯참여 제한을 중심으로 접근한다.
장기 장애 여부를 먼저 가리지 않고 필요한 지원을 먼저 준다.
장애 여부는 지원의 출발점이 아니라 지원 과정에서 판단된다.
스웨덴은 더 나아가 있다.
지원의 기준이 등급이나 진단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필요한 지원의 정도다.
당신이 장애인인가보다 당신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를 먼저 묻는다.
이 나라들이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장애를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상태로 본다는 것.
그리고 지원의 시작점을 판정 이후가 아니라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에 둔다는 것.
10년 전 미시간의 그 사무실이 하던 일도 결국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 방식에도 대가가 있다.
필요를 중심으로 판단하면 판단하는 사람의 재량이 커진다.
그러면 담당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고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기간과 진단으로 자르는 방식은 그 재량을 줄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선의와 악의의 대립이 아니다.
예측 가능성과 실질적 대응 사이의 오래된 교환 관계다.
다만 그 교환에서 지금 우리는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 있다.
예측 가능성을 얻고 필요한 사람 상당수를 놓치고 있다.
균형점을 조금만 옮겨도 달라질 것이다.
전면 개편이 아니라 임시 지원 창구 하나를 여는 것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
누구나 지나가는 구간
임시 장애 지원 제도를 만들자는 제안은
복지 대상을 늘리자는 이야기로 오해되기 쉽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오히려 대상을 정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자는 제안이다.
지금은 사람을 먼저 분류하고 그다음에 지원한다.
장애인인지 아닌지를 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서비스가 열린다.
바꿔야 할 순서는 이렇다.
필요를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에 지원한다.
그러면 8개월 동안 휠체어를 쓰는 사람도
뇌졸중 재활 중인 사람도
암 치료 과정에서 계단을 못 오르게 된 사람도
등록 여부와 무관하게 필요한 만큼 지원받을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장애인이라는 명칭이 아니다.
이동 지원과 정보 접근과 보조기기와 재활과 슬롯참여를 유지할 조건이다.
그리고 이 제안에는 조금 다른 이유도 있다.
사고와 질병과 수술과 정신건강 위기와 노화는 누구에게나 온다.
오늘의 비장애인이 내일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수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면서 한 번 이상 기능이 제한되는 구간을 지난다.
다만 그 구간이 짧으면 우리는 그걸 장애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 구간에 아무 지원이 없는 슬롯는
결국 모두가 한 번씩은 혼자 견뎌야 하는 슬롯다.
그리고 이 제안에는 기존 등록 장애인에게도 이득이 있다.
임시 지원 창구가 생기면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아진다.
지금 등록 장애인은 인구의 5퍼센트쯤이다.
여기에 일시적으로 기능이 제한된 사람을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커진다.
접근성 시설과 서비스의 이용자가 늘면
그 시설과 서비스의 정치적 위치도 달라진다.
소수를 위한 특별 조치에서 다수가 언젠가 쓰는 공용 설비로.
경사로와 자막과 음성 안내가 지금 그런 경로를 밟고 있다.
지원 제도도 같은 경로를 밟을 수 있다.
제목: 오랫동안의 아키텍처 혹은 장애는 언제 시작되는가.
장애는 진단서가 발급되는 날 시작되지 않는다.
일상생활과 슬롯생활에서 배제되는 순간 시작된다.
그 사이의 간격이 지금 우리 제도의 가장 큰 공백이다.
오랫동안이라는 단어는 원래 제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들어갔을 것이다.
일시적인 불편까지 전부 포함하면 관리가 안 되니까.
그 걱정을 이해한다.
다만 그 단어가 지금 하는 일은 관리가 아니라 선별에 가깝다.
기준을 없애자는 게 아니다.
기준의 축을 기간에서 필요로 옮기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축을 옮기면 재판정 논쟁도 성격이 달라진다.
지금 장애 재판정은 대체로 등급을 낮출 근거를 찾는 절차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당사자에게 두려운 일이 된다.
필요 중심으로 설계되면 재확인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금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을 조정해야 하는지를 보는 절차가 된다.
같은 행위인데 목적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진다.
10년 전 그 담당자가 6주 뒤에 다시 볼까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불안도 느끼지 않았다.
결론: 장애를 증명한 사람만 지원하는 슬롯는 이미 한발 늦은 슬롯다.
증명은 언제나 사후에 완성되고 필요는 언제나 사전에 발생한다.
포용슬롯는 장애를 정확히 판정하는 슬롯가 아니라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을 제때 지원하는 슬롯여야 한다.
그나저나 이 이야기를 보보에게 처음 했다.
10년이나 지난 일인데 왜 말 안 했냐고 물어서
딱히 숨긴 건 아니고 그냥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답했다.
보보가 그러면 지금 손목은 괜찮냐고 물었다.
비 오는 날 조금 시큰거린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비 예보를 나한테 묻는다.
탱고는 이 이야기를 들어도 알 리가 없다.
저 녀석이 우리 집에 온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