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바카라상 위에 6년 된 기계가 하나 있다.
점자정보단말기다.
점자 셀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위에서 점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면서 글자를 만든다.
손끝을 대면 지금도 반응한다.
다만 예전만큼 빠르지는 않다.
셀 몇 개는 반응이 둔해져서 그 자리에 오는 글자를 나는 문맥으로 추측한다.
읽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고 오독이 조금 늘었다.
이 기계는 이제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
이것은 그 6년에 관한 기록이다.
기계 한 대가 태어나서 늙어 가는 동안 실제로 얼마가 들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지난번에 나는 어느 장부에 어떤 비용이 안 적히는지를 썼다.
이번에는 그 비용이 시간축을 따라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쓰려고 한다.
0년차
기계를 처음 들이던 해에 나는 지원 제도를 이용했다.
보조기기 지원에는 품목이 정해져 있고 품목마다 기준액이 있다.
그 기준액까지가 지원이고 나머지는 본인 부담이다.
내가 필요했던 사양은 기준액보다 위에 있었다.
셀 수가 많아야 표를 읽기 편하고
연결이 안정적이어야 회의 중에 끊기지 않는다.
그래서 차액을 냈다.
이 구조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기준액이 없으면 예산 관리가 불가능하니까.
다만 기준액을 정하는 방식에 한 가지가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기를 무엇에 쓸 것인가.
같은 점자정보단말기라도
바카라을 읽는 데 쓰는 사람과 회의 자료를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데 쓰는 사람은
필요한 사양이 다르다.
지금의 기준액은 대체로 앞쪽을 상정하고 만들어져 있다.
그러니까 이 제도는 나를 소비자로는 지원하고 노동자로는 잘 지원하지 않는다.
차액은 그 간격의 크기다.
한 가지 더 있다.
지원 품목 목록에는 갱신 주기가 있다.
기술이 바뀌는 속도보다 그 목록이 바뀌는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이미 시장에서 표준이 된 사양이 목록에는 아직 고급형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생긴다.
목록을 만드는 쪽 잘못이라기보다 절차의 문제다.
품목과 기준액을 바꾸려면 조사와 심의와 고시가 필요하고 그건 시간이 걸린다.
다만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차액은 계속 개인이 낸다.
2년차와 4년차
2년차에 처음 고장이 났다.
셀 몇 개가 안 올라왔다.
수리를 맡겼고 3주쯤 걸렸다.
수리비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문제는 3주였다.
그 3주 동안 나는 노트북의 화면 낭독기만으로 버텼다.
음성으로 듣는 건 되는데 표를 확인하거나 숫자를 정확히 읽는 데는 점자가 훨씬 낫다.
그래서 그 기간에 나온 작업물의 오류율이 평소보다 높았을 것이다.
정확히 재 보지는 않았지만 체감으로 안다.
이건 비용 항목에 안 들어간다.
수리비 얼마라고만 남는다.
4년차에 두 번째 고장이 났다.
이번에는 충전 쪽이었고 부품 수급이 늦어서 5주가 걸렸다.
보조기기 수리에서 이건 흔한 일이다.
시장이 작아서 부품 재고가 얇고
수리할 수 있는 곳이 전국에 몇 군데밖에 없다.
일반 소비재라면 5주짜리 수리를 사람들이 견디지 않을 것이다.
대체품을 사거나 다른 브랜드로 갈아탄다.
보조기기에는 그 선택지가 잘 없다.
그래서 기다린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그 사람의 생산성과 일정과 신뢰도가 조금씩 깎인다.
대여 기기를 빌려주는 제도가 있는 곳도 있는데
기기마다 조작 방식이 달라서 익숙해지는 데 또 시간이 든다.
수리 기간은 원래 비용이 아니라 시간으로 계산되는 항목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결국 돈이 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자동차 보험이 자주 떠오른다.
차가 고장 나서 수리에 들어가면 렌터카 비용이 보상 항목에 들어 있다.
차가 없는 동안 생기는 불편을 비용으로 인정한 것이다.
보조기기에는 그런 항목이 없다.
기기 값은 지원하고 그 기기가 없는 5주는 개인의 사정이 된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그 기기는 이동 수단이거나 눈이거나 목소리다.
무엇을 대체 수단으로 인정할지에 대한 규칙이 없으면
공백은 언제나 조용히 개인에게 간다.
6년차
지금이 6년차다.
지원 주기가 돌아오려면 아직 남았다.
품목별로 정해진 내구연한이 있고 그 기간이 지나야 다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내구연한과 실제 수명이 잘 안 맞는다는 것이다.
하루에 6시간씩 쓰는 사람과 한 달에 몇 번 쓰는 사람의 기기가
같은 연한으로 관리된다.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먼저 고장 나고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없으면 더 곤란하다.
그런데 제도는 사용량을 안 본다.
날짜만 본다.
날짜로 관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용량을 확인하려면 누가 얼마나 썼는지를 들여다봐야 하고
그건 감시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게으른 행정의 결과가 아니다.
사생활을 지키려는 선택이기도 하다.
다만 그 선택의 비용을 지금은 이용자가 혼자 낸다.
대안이 없지는 않다.
본인이 신청하면 조기 교체를 심사받을 수 있게 하거나
직업 활동에 쓰는 기기는 별도 주기를 두거나 하는 방식.
핵심은 예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용 맥락을 물어보는 절차를 하나 넣는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시기가 주기적으로 온다.
기계는 이미 못 쓰겠는데 아직 지원은 안 되는 구간.
그 구간을 넘기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자비로 새로 사거나 불편을 감수하고 버티거나.
지금 나는 뒤쪽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읽는 속도가 좀 느리다.
6년을 다 합치면 구입 차액과 수리비와 소모품과 소프트웨어 갱신비가 나온다.
정확한 금액을 적지는 않겠지만 웬만한 노트북 몇 대 값은 된다.
그리고 이 지출은 6년 뒤에 다시 시작된다.
자산으로 남지도 않는다.
이게 장애비용의 가장 중요한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반복되고 축적되지 않는다.
비장애인의 큰 지출은 대체로 자산이 된다.
집을 사면 집이 남고 차를 사면 차가 남는다.
중고로 팔 수도 있고 담보가 되기도 한다.
보조기기는 그렇지 않다.
중고 시장이 거의 없고
있어도 그 사람 몸에 맞춰 설정된 물건이라 가치가 잘 안 붙는다.
그러니까 이 지출은 소비도 아니고 투자도 아니다.
살아 있기 위해 매년 다시 내는 사용료에 가깝다.
이 성질을 계산에 넣지 않으면
장애인의 자산 규모를 보고 이 사람은 여유가 있다고 판단하는 실수가 생긴다.
센이 말한 것
아마르티아 센은 사람의 삶을 소득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고 했다.
중요한 건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는 것.
역량접근이라고 부르는 이 관점은 장애비용을 설명할 때 특히 잘 맞는다.
같은 300만 원을 받아도
이동하고 읽고 소통하기 위해 먼저 나가야 하는 돈이 다르면
실제로 쓸 수 있는 자원은 다르다.
그러니까 소득이 같다고 조건이 같은 게 아니다.
이 관점이 실무에서 왜 중요하냐면
거의 모든 복지 제도의 기준선이 소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급 자격도 소득이고 감면 대상도 소득이고 지원 우선순위도 소득이다.
같은 소득이면 같은 형편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그 소득에서 먼저 빠져나가는 고정 지출이 다르면
같은 형편이 아니다.
주거비는 이미 이런 방식으로 일부 반영된다.
지역별 주거비 차이를 감안하는 계산이 있다.
장애비용도 같은 방식으로 반영할 수 있다.
개념은 이미 있고 적용만 안 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장애인실태조사에서 장애로 인한 추가비용은 월평균 17만 원 정도로 조사된다.
유형별 차이는 매우 크다.
자폐성장애의 경우 월 60만 원 수준이고
뇌병변장애와 신장장애도 평균을 크게 웃돈다.
여기에 전동휠체어 배터리 교체나 자세유지기기 교체나
의사소통보조기기 업그레이드나 주택 개조 같은 비정기 지출을 넣으면
실제 부담은 이 숫자를 훨씬 넘는다.
영국의 장애인단체 스코프는 다른 방식으로 계산했다.
장애인이 있는 가구가 비장애인 가구와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월평균 1095파운드가 더 든다는 분석이었다.
우리 돈으로 200만 원쯤 된다.
두 숫자의 차이는 실제 부담의 차이라기보다 계산 방식의 차이에 가깝다.
우리 조사는 지출한 금액을 묻는다.
스코프는 같은 생활수준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금액을 계산한다.
지출한 금액을 물으면 못 쓴 돈은 안 잡힌다.
살 수 없어서 안 산 기기는 0원으로 기록된다.
포기는 지출로 계산되지 않는다.
이건 앞서 다른 글에서도 했던 이야기인데
장애비용 통계에서 이 문제는 특히 크다.
소득이 낮을수록 추가비용 지출이 적게 잡히는 현상이 그래서 생긴다.
돈이 없으면 기기를 안 사고 치료를 미루고 활동지원을 덜 쓴다.
그러면 통계상 그 사람의 장애비용은 낮게 나온다.
가장 지원이 필요한 사람의 비용이 가장 작게 기록되는 구조.
이 숫자를 그대로 쓰면 정바카라은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비용이 적으니 지원도 적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건 지출액 조사가 아니라 필요액 추정이다.
같은 생활수준에 도달하려면 얼마가 드는가를 계산하는 방식.
스코프의 방법이 그쪽이다.
쌓이지 않는다
이 비용의 또 다른 성질은 자산 형성을 막는다는 것이다.
매달 나가는 돈이 많으면 저축이 안 되고
저축이 안 되면 목돈이 필요한 순간에 대응할 수 없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삶에는 목돈이 필요한 순간이 꽤 자주 온다.
기기 교체와 주택 개조와 갑작스러운 의료 지출.
그러니까 이 구조는 이렇게 돌아간다.
추가비용이 실질소득을 줄이고
줄어든 소득이 교육과 고용의 기회를 좁히고
좁아진 기회가 다시 소득을 줄인다.
국제슬롯에서 장애와 빈곤의 순환이라고 부르는 구조다.
캐나다에는 이 순환을 끊으려는 제도가 있다.
장애인 자산형성 제도인데
본인이 저축하면 정부가 일정 비율을 매칭해서 얹어 준다.
빈곤을 완화하는 게 아니라 자산을 쌓게 하는 방향이다.
호주의 국가장애보험제도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전동휠체어와 의사소통보조기기와 활동지원과 주택 개조를
개인별 필요에 따라 지원한다.
북유럽 국가들은 아예 시장에서 개인이 부담할 일이 적도록
보조기기와 돌봄과 이동지원을 공공서비스로 제공한다.
형태는 다 다른데 전제는 같다.
장애로 생기는 추가비용은 개인이 감당할 불운이 아니라
슬롯가 조정해야 할 구조적 비용이라는 것.
새로 생긴 항목
최근 몇 년 사이 이 목록에 항목이 하나 늘었다.
디지털 접근성 비용이다.
과거의 장애비용은 대체로 물리적이고 의료적인 것들이었다.
휠체어와 재활치료와 이동.
지금은 다르다.
화면 낭독 프로그램과 점자정보단말기와 문자 인식 도구.
청각장애가 있으면 문자통역과 실시간 자막.
뇌병변이나 중증 지체장애가 있으면 음성인식과 특수 입력장치와 의사소통보조기기.
여기에 최근에는 구독료가 붙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소프트웨어를 한 번 사면 몇 년을 썼다.
지금은 매달 나간다.
접근성 기능이 유료 요금제에 들어 있는 서비스도 있다.
그러면 같은 서비스를 쓰는데 나만 상위 요금제를 써야 한다.
이건 새로운 종류의 비용이다.
소유가 아니라 접속에 붙는 비용이고 끊기면 즉시 못 쓴다.
그리고 이 비용은 지금 어느 지원 품목에도 잘 안 들어가 있다.
보조기기 지원은 대체로 물건을 사는 데 맞춰져 있으니까.
기기는 지원하고 그 기기를 쓸 수 있게 하는 구독은 지원하지 않는 상태.
디지털 전환이 빨라질수록 이 간격은 넓어진다.
그리고 구독 모델에는 다른 위험도 하나 있다.
물건은 내 것이라 회사가 없어져도 남는다.
구독은 회사가 정바카라을 바꾸면 끝난다.
접근성 기능이 무료였다가 유료로 바뀌거나
지원이 중단되거나 요금제가 개편되면
어제까지 쓰던 도구가 오늘 사라진다.
이건 개인이 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위험이 아니다.
기반시설이라면 그 지속성을 개인의 결제 능력에 맡기면 안 된다.
수도와 전기를 매달 해지 위험 속에서 쓰지는 않으니까.
국제슬롯에서 디지털 장애 격차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여기 있다.
디지털 슬롯에 참여하려면 비장애인보다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고
그 비용을 계산에 안 넣으면 정보와 교육과 고용에서 다시 밀려난다.
제목: 수명의 아키텍처 혹은 6년마다 다시 시작하는 것들.
장애비용은 한 번에 큰 금액이 나가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조금씩 자주 그리고 반복적으로 온다.
그래서 눈에 잘 안 띈다.
당사자도 정확히 얼마인지 대체로 모른다.
정바카라이 이 비용을 다루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측정이다.
보조기기의 생애주기 비용과 주거 개조비와 디지털 접근성 비용과 가족돌봄 비용까지 포함해
실제로 얼마가 드는지를 정기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둘째는 평가 기준이다.
장애인의 경제 상태를 소득으로만 보면 실제를 못 본다.
장애비용을 뺀 실질가처분소득으로 봐야 한다.
셋째는 생애주기 지원이다.
사는 것만 지원하고 고치는 것과 바꾸는 것과 배우는 것을 지원하지 않으면
그 기기의 수명이 곧 그 사람의 활동 기간이 된다.
배우는 것이 빠져 있다는 점은 특히 지적하고 싶다.
좋은 기기를 받아도 쓰는 법을 익히지 못하면 서랍에 들어간다.
그리고 보조기기 교육은 지금 대체로 초기 몇 시간에 그친다.
기기는 업데이트되고 기능은 늘어나는데
교육은 개봉하던 날에 멈춰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 기기의 기능을 절반쯤만 쓰고 있다.
나도 그렇다.
이건 개인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지원 설계가 구매 시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생기는 일이다.
결론: 계단 앞의 경사로가 특혜가 아니듯
장애로 생기는 추가비용을 슬롯가 나누는 것도 특혜가 아니다.
같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을 맞추는 일이다.
전동휠체어는 이동권의 수단이고
의사소통보조기기는 표현의 자유를 위한 도구이고
접근성 기술은 이제 시민권의 기반시설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 지출들은 복지비가 아니라 인프라 비용으로 읽어야 한다.
도로에 쓰는 돈을 아무도 복지지출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그나저나 이 기계를 언제 바꿀지 보보와 이야기했다.
보보가 그냥 지금 사자고 했다.
읽는 게 느려지면 결국 자기가 읽어 줘야 하니까 그게 더 손해라고.
계산이 정확해서 반박을 못 했다.
탱고는 이 기계가 내는 딸깍 소리를 좋아한다.
점 올라오는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든다.
6년을 같이 들은 소리라 저 녀석에게도 익숙한 모양이다.
바꾸면 소리가 달라질 텐데 그건 좀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