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항의 아키텍처

by김경훈

조사원이 우리 집 식탁에 앉아 문항을 읽는다.


목소리가 사무적이지만 불친절하지는 않다.

태블릿을 두드리는 소리가 문항 사이사이에 들어간다.


활동지원 인정조사다.


"실내에서 이동하실 때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탁.


"식사는 혼자 하실 수 있나요."

"네."

탁.


"옷 갈아입는 건요."

"혼자 합니다."

탁.


세 번의 탁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알았다.

오늘 점수가 낮게 나오겠구나.


탁 소리에는 리듬이 있다.


답이 짧으면 바로 나고 답이 길어지면 늦게 난다.

늦게 나는 소리는 조사원이 어느 칸에 넣을지 잠깐 고민했다는 뜻이다.


그 리듬을 듣고 있으면 내 삶이 어느 칸으로 들어가는지가 얼추 짐작된다.


두 시간짜리 대화가 끝나면

나라는 사람은 몇십 개의 값으로 정리되어 서버로 올라간다.


이것은 그 조사표의 문항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사실대로 답할수록 불리해지는 구조에 관한 기록이다.





잘리는 자리



문항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이동과 식사와 배변과 착의와 위생.

사람이 하루를 사는 데 필요한 기본 동작들이다.


문제는 그 동작들이 조건 없이 물어진다는 것이다.


실내에서 이동할 수 있느냐.

할 수 있다.

우리 집에서는.


가구 위치를 다 알고 있고 5년째 살고 있고 탱고가 옆에 있으니까.


처음 가는 건물에서는 다르다.

복도 구조를 모르고 화장실이 어디인지 모르고

공사 중이면 동선이 통째로 바뀐다.


그러니까 정확한 답은 이렇다.

익숙한 공간에서는 혼자 하고 낯선 공간에서는 못 한다.


그런데 조사표에는 그 답을 넣을 칸이 없다.


예. 아니오. 부분적으로 가능.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부분적으로 가능을 고르면 어떤 부분인지가 안 남는다.

그러면 다음 사람이 그 기록을 읽고도 내 상황을 모른다.


이건 조사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분은 문항을 성실하게 읽고 답을 성실하게 옮긴다.


문항이 물어보지 않는 걸 조사원이 적을 수는 없다.


정보학에서는 이런 걸 자료 구조의 문제로 본다.

어떤 정보를 담을 칸이 없으면 그 정보는 수집 단계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한 번 사라진 정보는 아무리 좋은 분석으로도 복원되지 않는다.


인정조사표의 칸 구조가 곧 그 제도가 보는 인간의 모양이다.


그리고 이 구조에는 시간이 빠져 있다.


문항은 현재 시제로 물어진다.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기능은 하루 안에서도 변한다.

아침에 되는 게 저녁에 안 되고

컨디션이 좋은 날과 나쁜 날이 다르다.


만성 질환이 있는 사람이나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이 변동 폭이 훨씬 크다.


조사는 그중 하루의 한 시점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한 시점이 앞으로 몇 년의 지원 시간을 정한다.


표본 하나로 모집단을 추정하는 셈인데

연구였다면 이런 설계는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한 유인



이 조사에는 더 곤란한 성질이 하나 있다.


점수가 높아야 시간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점수는 못 하는 항목이 많을수록 올라간다.


그러니까 지원을 더 받으려면 자기를 더 못하는 사람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 구조를 처음 겪었을 때 나는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혼자 해내려고 오래 연습해 온 것들이 있다.

길을 외우고 소리로 공간을 읽고 기기를 익히고.


그 노력의 결과가 조사표에서는 점수 하락으로 돌아온다.


혼자 잘하면 지원이 줄고 지원이 줄면 혼자 하기 어려워지고

그러면 다음 조사에서 점수가 올라간다.


제도가 회복을 처벌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건 장애 영역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근로능력 평가나 돌봄 인정점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아지면 끊기는 지원은 사람을 나아지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 구조에는 도덕적 부작용도 있다.


조사 앞에서 사람은 자기 삶을 최악의 순간 기준으로 설명하게 된다.

평소에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으면 안 되는 날을 말해야 하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 날이 실제로 있으니까.


다만 그렇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서술이 조금씩 그쪽으로 기운다.


제도가 사람에게 자기를 설명하는 언어를 준다는 걸

나는 이 조사표에서 배웠다.


이 문제를 아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현장 조사원들도 대체로 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조심스럽게 이렇게 묻는다.

안 되는 날도 있으시죠.


그 한 문장이 사실은 문항이 못 하는 일을 대신하고 있다.


다만 그건 그분의 경험과 재량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재량으로 메우는 구조는 사람이 바뀌면 사라진다.


좋은 조사원을 만나면 정확하게 기록되고

그렇지 않으면 다르게 기록되는 상태.


같은 사람이 조사원에 따라 다른 점수를 받는다면

그건 객관적인 척도라고 부르기 어렵다.





폐지된 것과 남은 것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장애를 1급부터 6급까지 나눠 왔다.


2019년부터 그 체계가 정도가 심한 장애인과 심하지 않은 장애인의 2단계로 간소화됐다.

등급제 폐지라고 불렸다.


큰 변화였고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다만 현장에서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보면 조금 복잡하다.


서비스를 받으려면 여전히 조사를 받아야 하고

그 조사는 여전히 기능 중심이고

그 결과는 여전히 점수로 나온다.


등급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서비스 필요도라는 이름의 점수가 들어왔다.


이름이 바뀐 것과 구조가 바뀐 것은 다르다.


물론 전면 개편은 어렵다.

예산 배분에 쓸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누가 봐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무엇을 재느냐다.


지금 조사표가 재는 건 이것이다.

이 사람이 혼자 몇 개를 할 수 있는가.


재지 않는 건 이것이다.

이 사람 주변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


같은 정도의 뇌병변 장애가 있어도

가족이 곁에 있는 사람과 혼자 사는 사람은 다르고

저상버스가 다니는 동네와 안 다니는 동네가 다르고

활동지원사를 구할 수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이 다르다.


그런데 이 차이들은 조사표에 거의 안 들어간다.


기능은 개인에게 붙어 있고 환경은 개인 바깥에 있는데

조사는 개인만 본다.


장애를 개인의 손상으로 보는 관점이 조사표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푸코가 말한 정상성 비판이 여기서 유효하다.


근대 슬롯는 인간을 끊임없이 측정하고 비교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을 만들어 왔다.

학교와 병원과 군대와 공장이 그 측정 장치였다.


판정 체계도 그 계보 위에 있다.


점수는 중립적인 숫자처럼 보이지만

그 점수를 만드는 항목들이 이미 어떤 몸을 기준으로 잡혀 있다.


혼자 몇 걸음을 걷는가.

식사를 어느 정도 수행하는가.


이 문항들의 기준점은 결국 하나다.

얼마나 정상에 가까운가.


그러니까 등급을 없애도 이 축을 그대로 두면

사람은 여전히 정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로 측정된다.





구빈원



이 대목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 꺼내고 싶다.


19세기 영국의 구빈원 이야기다.


1834년 신구빈법은 노동 가능한 빈민과 구제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을 나눴다.

그리고 국가 지원을 받으려면 구빈원이라는 시설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당시 구빈원은 일부러 열악하게 운영됐다.

열등처우 원칙이라고 불린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도움을 받는 삶이 일하는 삶보다 비참해야 사람들이 복지에 기대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구빈원은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제도라기보다

누가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선별하는 장치였다.


이 사고방식의 핵심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사람들이 도움을 지나치게 받으려 한다는 전제.


그래서 제도의 설계 목표가 필요한 사람에게 닿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막는 것이 된다.


이 두 목표는 방향이 반대다.


전자를 우선하면 절차가 단순해지고 문턱이 낮아진다.

후자를 우선하면 절차가 촘촘해지고 증명이 늘어난다.


그리고 문턱이 높아지면 가장 먼저 걸러지는 사람은

부정하게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서류를 갖출 여력이 없는 사람이다.


열등처우 원칙은 법조문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논리가 남아 있는지는 각자의 제도가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근대 복지의 역사가 돌봄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선별의 역사였다는 걸

이 건물이 보여 준다.


현대 복지국가는 이 구빈원적 사고를 극복하려고

권리로서의 복지와 보편적 슬롯보장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선별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다.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구빈원은 건물이 아니다.

조사표이고 점수표이고 데이터베이스다.


철문 대신 로그인 화면이 있고

관리인 대신 알고리즘이 있다.





데이터로 관찰 가능한 인간



최근 복지행정에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과 위기가구 예측 시스템과 부정수급 탐지 시스템.

건강보험료와 통신비와 단전 단수 정보와 카드 사용 내역과 체납 정보를 결합해

위험군을 예측한다.


이 시스템들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고독사 예방이나 위기가구 조기 발견에서 실제로 성과가 있다.


혼자 사는 사람의 전기 사용량이 갑자기 끊기면 그건 중요한 신호다.

그 신호를 사람이 일일이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이 방향에는 한 가지 성질이 따라온다.


시스템은 데이터가 있는 사람만 볼 수 있다.


이동 기록이 적으면 슬롯활동이 낮은 사람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이동 기록이 적은 이유가 이동할 수 없어서일 수 있다.


디지털 기기를 잘 못 쓰는 고령 장애인은 온라인 활동 데이터가 거의 없다.

그러면 위험 신호도 안 잡힌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은 민원을 안 넣는다.

그러면 요구도가 낮은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러니까 이 시스템이 가장 못 보는 사람이

대체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로 관찰 가능한 인간을 이해한다.


그리고 관찰 가능성은 공평하게 분포하지 않는다.


여기에 예측 시스템 특유의 문제가 하나 더 붙는다.


예측 모델은 과거 데이터를 학습한다.

그리고 과거 데이터에는 과거의 배제가 들어 있다.


지금까지 어떤 집단이 서비스를 적게 받아 왔다면

모델은 그 집단의 필요가 낮다고 학습한다.


배제의 기록이 필요의 추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오류는 겉으로 잘 안 드러난다.

모델의 정확도는 오히려 높게 나온다.

과거를 잘 재현할수록 정확하다고 평가되니까.


정확한 모델이 잘못된 방향으로 정확할 수 있다.





왜 줄었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설명이다.


활동지원 시간이 줄었을 때

그게 조사 항목 때문인지 산정 방식이 바뀌어서인지

아니면 어떤 계산의 결과인지를 당사자가 알기 어렵다.


결과는 매우 구체적이다.

한 달에 몇십 시간이 줄고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원인은 매우 추상적이다.

종합 점수가 몇 점이라는 통보가 온다.


이 비대칭이 블랙박스 행정의 핵심이다.


이의를 제기하려면 무엇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지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상태로 이의 신청서를 써야 한다.


버지니아 유뱅크스는 자동화된 불평등에서

디지털 복지 시스템이 지원의 기술이 아니라 감시와 선별의 기술로 변질될 위험을 지적했다.


이 경고에서 중요한 건 의도가 아니다.

아무도 감시하려고 만들지 않았다.


효율을 높이려고 만든 것이 결과적으로 선별 장치가 되는 경로가 있다는 것이고

그 경로는 대체로 조용하다.


유럽연합 쪽에서 설명 가능한 인공지능과 인간의 개입 원칙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기계가 판단해도 되지만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사람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판단을 사람이 뒤집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건 기술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절차에 대한 요구다.


그리고 설명이라는 말도 조심해서 써야 한다.


산식을 공개하는 것과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은 다르다.


점수 산정 방식을 문서로 공개해 놓고

그 문서가 이미지 파일이면 나는 못 읽는다.


수십 페이지짜리 산정 지침을 올려 두고

설명은 이미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설명 가능성은 정보를 내놓는 문제가 아니라

그 정보가 당사자에게 도달하는 문제다.


이의 제기 절차도 그렇다.

있다는 것과 쓸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서류를 갖추고 기한을 지키고 근거를 대야 하는 절차라면

그건 이미 여력이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권리다.





제목: 문항의 아키텍처 혹은 나를 설명할 칸이 몇 개인가.


조사표는 행정 문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슬롯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적어 둔 문서다.


무엇을 묻는가.

어떤 답을 고를 수 있게 해 두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정은 아예 적을 곳이 없는가.


이 세 가지가 그 제도의 인간관이다.


지금 우리 조사표는 사람을 기능의 목록으로 본다.

혼자 몇 개를 할 수 있는지 세는 방식이다.


그 방식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어떤 배분 기준은 필요하고 숫자는 그 일을 한다.


다만 그 옆에 다른 칸이 있어야 한다.

이 사람 주변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를 적는 칸.


같은 기능이라도 환경이 다르면 필요한 지원이 다르니까.


그리고 서술을 적을 칸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지금 조사표에는 선택지만 있고 문장이 들어갈 자리가 거의 없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른 사정이 전부 같은 몇 개의 값으로 접힌다.


서술은 통계로 만들기 어렵다는 걸 안다.

분석이 번거롭고 비교가 안 되고 시간이 든다.


그런데 그 번거로움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그 비용을 아끼면 아낀 만큼 사람이 안 보인다.


결론: 복지가 숫자와 예측 모델로만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지워지는 건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데이터로 충분히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

민원을 넣지 않는 사람들.

평균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


기술은 복지를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다.

다만 효율이 사람을 앞서는 순간 그 제도는 다시 구빈원이 된다.


이번에는 철창이 없어서 밖에서는 잘 안 보일 뿐이다.


그나저나 조사가 끝나고 조사원이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워낙 잘하셔서 점수가 좀 낮게 나올 거예요.

말투에 미안함이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고 실제로 괜찮았다.

다만 잘한다는 말이 불리하게 쓰이는 자리가 세상에 몇 군데나 될까 생각했다.

탱고는 그 두 시간 동안 조사원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저 녀석이 하는 일은 조사표 어느 항목에도 없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오랫동안의 아키텍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