몫의 아키텍처

by김경훈

나는 하루 8시간을 일하지 않는다.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근로계약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출근 기록도 그렇게 남는다.


실제로는 다르다.


어떤 날은 12시간을 붙어 있고 어떤 날은 4시간 만에 그만둔다.

자료가 접근 가능한 형태로 오면 빨라지고

스캔본으로 오면 그날 하루가 통째로 사라진다.


내가 특별히 성실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같은 업무의 시간 소요가 조건에 따라 크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흔들림의 폭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재 본 적이 있다.


같은 분량의 문서를 읽는 데

텍스트 파일이면 40분쯤 걸리고

스캔본이면 문자 인식과 정리를 포함해 3시간쯤 걸린다.


4배가 조금 넘는다.


이 차이는 내 능력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날 그 문서가 어떤 형식으로 왔는지가 정할 뿐이다.


노동 시간을 성실성의 지표로 읽는 문화에서

이 흔들림은 대체로 나에 대한 평가로 돌아온다.


이건 나만의 사정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각자 다른 이유로 8시간에 안 맞는 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 노동시장은 8시간을 정상으로 놓고 설계되어 있다.


이것은 그 8시간이라는 숫자에 관한 기록이다.





이미 나누고 있다



내 일은 사실상 나눠서 돌아간다.


문헌을 찾고 정리하는 초기 작업의 상당 부분은 석사 선생님들과 함께한다.

어떤 자료를 볼지 정하는 건 내가 하고

그 자료를 접근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건 대체로 다른 사람이 한다.


발표 자료의 시각 요소도 그렇다.

구조와 내용은 내가 짜고 도표와 배치는 함께 만든다.


이걸 오랫동안 나는 그냥 도움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잡 셰어링 관련 자료를 읽다가

내가 하고 있는 게 그것과 꽤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잡 셰어링은 하나의 직무를 두 명 이상이 나누어 수행하는 고용 형태다.

근무 시간을 나누기도 하고 업무 영역을 나누기도 한다.


지금 내 연구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확히 그 구조다.


차이가 하나 있다.

제도적으로는 그게 잡 셰어링이 아니라는 것.


서류상 나는 한 사람 몫의 자리를 혼자 차지한 전일제 노동자이고

석사 선생님들은 별도의 지원 인력이다.


같은 일을 나눠서 하고 있는데 제도는 그걸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이름이 다르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하면

설계가 달라진다.


지원 인력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건 보조이고 임시이고 예산 항목이 따로 있다.

잡 셰어링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그건 고용 형태이고 계약이 있고 둘 다 노동자다.


같은 현실인데 하나는 편의 제공이고 하나는 근로 형태다.


이 차이는 그 사람의 지위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지원 인력은 나를 돕는 사람이다.

잡 셰어링의 동료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앞의 관계에서는 성과가 내 것이 되고 뒤의 관계에서는 성과가 우리 것이 된다.


그리고 이 구분이 임금과 경력과 승진에 그대로 반영된다.

같은 시간을 같은 사무실에서 보내고도

한쪽만 경력이 쌓이는 구조가 그래서 생긴다.





8시간의 출처



주 40시간이라는 기준은 어디서 왔을까.


이 숫자에는 긴 역사가 있고 대체로 자랑스러운 역사다.

하루 12시간 14시간씩 일하던 시대를 노동운동이 밀어내면서 만들어 낸 상한선이다.


그러니까 8시간은 원래 보호를 위한 숫자였다.

이 이상은 일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숫자의 성격이 바뀌었다.

상한선이 표준이 되고 표준이 자격 요건이 됐다.


지금 8시간은 이렇게 작동한다.

이만큼 일할 수 있어야 정규직으로 친다.


보호를 위해 만든 선이 진입 조건이 된 것이다.


이런 전환은 접근성 논의에서도 자주 본다.


기준은 처음에 최소한을 보장하려고 만들어진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 기준이 목표치가 되고

다시 얼마 뒤에는 그 기준이 자격 심사표가 된다.


같은 숫자인데 어느 방향으로 읽느냐에 따라

누군가를 지키기도 하고 누군가를 걸러 내기도 한다.


그리고 방향은 대체로 조용히 바뀐다.

아무도 회의에서 이제부터 이 숫자를 문턱으로 쓰자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있다.


중증 뇌병변장애인과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과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 중 상당수는

일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시간 연속 노동이 어려워서 취업에 실패한다.


4시간은 할 수 있는데 8시간은 어렵다.

그러면 지금 노동시장에서 그 사람의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무리해서 8시간을 하거나 아예 안 하거나.


중간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중간이 있기는 하다.

단시간 일자리는 존재한다.


다만 그 자리는 대체로 임금이 낮고 경력으로 안 쌓이고 승진 경로가 없다.

그러니까 중간이 아니라 다른 층이다.


이 구조에는 이상한 순환이 있다.


단시간으로 일하면 경력이 안 쌓이고

경력이 없으면 좋은 자리에 못 가고

좋은 자리는 대체로 전일제라서 다시 못 간다.


시간을 줄인 대가로 경로가 통째로 닫힌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무리해서 8시간을 선택한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몸이 먼저 그만둔다.


퇴사 사유에는 개인 사정이라고 적힌다.


잡 셰어링이 기존 단시간 노동과 다른 지점이 여기다.


하나의 온전한 직무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직무의 성격과 바카라임과 경로가 그대로 유지된다.


반쪽짜리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온전한 자리를 두 사람이 맡는 것이다.





워크페어라는 말



이 이야기를 하려면 워크페어를 짚고 가야 한다.


복지와 노동을 합친 말이고

국가가 급여만 주는 대신 노동시장 참여를 촉진하거나 노동 의무를 부과하는 정바카라을 가리킨다.


1990년대 영국의 제3의 길과 미국의 복지개혁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 재편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슬롯복지학계는 이 방향을 오래 비판해 왔다.


실업과 빈곤의 원인을 노동시장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바카라임으로 돌리고

슬롯권을 조건부 권리로 바꾸고

국가의 복지 바카라임을 줄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비판은 정당하다.

그리고 장애인에게는 더 정당하다.


장애인의 노동시장 배제는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접근성과 차별과 구조적 장벽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으면 급여를 줄이겠다는 방식은

그 사람이 일할 수 없게 만든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결과만 처벌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가고 싶다.


워크페어 비판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장애인을 계속 급여의 대상으로만 두자는 결론으로 이어지면 그것도 곤란하다.


노동은 장애인에게 생계 수단만이 아니다.


슬롯적 역할을 갖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자기 삶을 스스로 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27조도 이 방향으로 되어 있다.

장애인이 다른 시민과 동등하게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노동시장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


권리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의무가 아니라 권리다.


일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고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건 뒤쪽이다.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하지 않기로 선택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


급여가 끊기면 그건 의무다.

지원이 유지되면 그건 권리다.


권리로 설계된 제도에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일한다.

안 해도 된다는 걸 알 때 해 보겠다고 나서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실패해도 돌아갈 자리가 있어야 시도할 수 있다.

이건 장애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일반의 이야기다.





27퍼센트포인트



숫자를 하나만 보자.


경제협력개발기구는 장애인의 고용률이 비장애인보다 평균 27퍼센트포인트쯤 낮고

실업 위험은 두 배 이상 높다고 분석한다.


국제노동기구도 장애인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여전히 매우 낮고

빈곤 위험이 현저히 높다고 지적한다.


이 격차를 개인의 능력 차이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27퍼센트포인트는 능력 분포로 만들어질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건 이 격차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장애인 고용 수준이 높은 나라들이 복지지출이 적은 나라들이 아니다.

오히려 복지와 노동시장 정바카라을 적극적으로 결합한 나라들이 성과가 좋다.


노르웨이는 개별 맞춤형 직업훈련과 임금보조와 직무조정과 취업 후 지원을 함께 운영한다.

스웨덴은 보조공학기기 지원과 직무 재설계와 고용주 지원을 묶어 놓았다.

독일은 의무고용제와 고용부담금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광범위한 직업재활 서비스를 제공한다.

네덜란드는 부분근무와 유연근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일할 수 있게 만든다.


같은 워크페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처벌형과 지원형은 완전히 다른 물건이 된다.


그리고 성과가 좋은 쪽은 지원형이다.


이 대비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나라에도 의무고용제가 있고 고용부담금이 있다.

제도의 뼈대는 독일과 비슷하다.


다만 독일 쪽에는 그 옆에 광범위한 직업재활 서비스가 붙어 있다.

우리는 그 부분이 상대적으로 얇다.


의무만 있고 지원이 얇으면 어떻게 되는가.

기업은 부담금을 내는 쪽을 고른다.


그게 더 싸고 더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산은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이다.


부담금을 올리는 것으로는 이 계산이 잘 안 바뀐다.

고용하는 쪽이 실제로 가능해져야 바뀐다.





적응의 방향



직업재활 쪽에서는 이 방향 전환이 이미 오래전에 일어났다.


과거의 직업재활은 장애인을 노동시장에 적응시키는 일이었다.

훈련을 시키고 기능을 높여서 기존의 자리에 맞추는 것.


지금의 직업재활은 반대 방향을 함께 본다.

노동시장을 장애인에게 적응시키는 것.


직무를 다시 설계하고 근무 시간을 조정하고

보조공학기기를 넣고 근로지원인을 배치하고 이동을 지원한다.


지원고용을 발전시킨 연구자들이 오래전부터 말해 온 것도 이것이다.

중증장애인도 적절한 지원이 있으면 일반 노동시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지원의 유무였다는 뜻이다.


정상화 이론을 발전시킨 쪽에서는 노동을 성인기의 대표적인 슬롯적 역할로 본다.

그 역할에서 배제되면 소득만 잃는 게 아니라 슬롯적 위치를 잃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장애인 고용정바카라의 목표는 취업률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갖게 되는가다.


취업률만 관리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숫자를 채우기 좋은 자리들이 만들어지고

그 자리는 대체로 경로가 없는 자리다.


그래서 나는 고용 통계를 볼 때 두 가지를 같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명이 취업했는가.

그리고 2년 뒤에 몇 명이 남아 있는가.


앞의 숫자는 매년 발표되고 뒤의 숫자는 잘 안 보인다.


유지율이 낮은 취업률은 사실 취업률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 여러 번 세어진 것에 가깝다.





나누는 일



잡 셰어링으로 돌아오면 이 제도의 장점은 세 가지쯤 된다.


첫째는 진입이다.

8시간을 못 하는 사람이 4시간으로 들어올 수 있다.


둘째는 유지다.

고용에서 진짜 어려운 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다.

무리한 노동 강도로 들어간 자리는 대체로 오래 못 간다.


셋째는 고용주 쪽이다.

합리적 편의 제공이라는 의무를 개별 조정으로만 풀면 부담이 크게 느껴진다.

직무를 나누는 방식은 그 부담을 구조로 흡수한다.


물론 쉬운 제도는 아니다.


두 사람이 하나의 직무를 맡으면 인수인계가 매일 발생한다.

누가 무엇을 어디까지 했는지 공유하는 비용이 생긴다.


그 비용을 개인의 성실함으로 메우게 하면 그 제도는 실패한다.

기록 체계와 인수인계 절차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이건 내가 앞서 다른 글에서 썼던 이야기와 이어진다.

좋은 사람이 떠나도 남는 구조를 만드는 일.


잡 셰어링은 그 구조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구조가 생기면 나눠 쓰는 두 사람만 편해지는 게 아니다.


직무 기록이 정리된 조직은 원래 다 편해진다.


한 가지 조심할 것도 있다.


잡 셰어링이 장애인 전용 제도로 도입되면 안 된다는 것.


장애인만 나눠서 일하는 자리가 따로 생기면

그건 결국 분리된 층이 하나 더 만들어지는 것이다.


육아 중인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학업을 병행하는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형태가 예외가 아니라 선택지가 된다.

그리고 선택지가 되어야 낙인이 안 붙는다.


접근성 논의에서 반복되는 원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정 집단을 위해 만든 것은 오래 못 가고

모두가 쓸 수 있게 만든 것이 오래간다.





제목: 몫의 아키텍처 혹은 8시간을 못 채우는 몸에 대하여.


복지냐 노동이냐는 질문은 애초에 잘못 세워진 질문이다.


복지를 줄여서 노동으로 밀어내는 것도 아니고

노동을 포기하고 급여로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복지를 기반으로 한 노동권이고

슬롯보장을 토대로 한 슬롯참여다.


활동지원과 근로지원인과 보조공학기기와 이동지원은

일하지 않기 위한 지원이 아니라 일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이 둘은 서로를 대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의 것이 있어야 뒤의 것이 가능해진다.


결론: 8시간은 원래 사람을 지키려고 만든 숫자였다.

그 숫자가 지금은 사람을 거르는 문턱으로 쓰인다.


숫자를 없애자는 게 아니다.

하나의 자리를 반드시 한 사람이 채워야 한다는 전제를 다시 보자는 것이다.


한 사람 몫이라는 말에서 몫은 원래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 말 안에 이미 답이 들어 있다.


그리고 나누는 일은 잃는 일이 아니다.


하나의 자리를 둘이 맡으면

그 자리에 두 사람의 경험과 두 사람의 시선이 들어온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 사람이 온전히 감당하는 것을 능력의 증거로 여겨 왔다.

그 기준에서 나누는 일은 부족함의 표시가 된다.


그런데 실제로 잘 굴러가는 조직들을 보면

대체로 일이 잘 나뉘어 있다.


혼자 다 하는 사람이 있는 조직은

그 사람이 아프면 멈춘다.


그나저나 이 글을 쓰면서 석사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우리 이거 사실상 잡 셰어링 아니냐고.

석사 선생님이 웃으면서 그러면 자기 이름도 논문에 들어가느냐고 했다.

이미 들어가 있다고 답했다.

사실 그게 정답이다.

일을 나누면 성과도 나누는 게 맞다.

탱고는 그동안 연구실 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저 녀석은 하루에 6시간쯤 일하고 나머지는 잔다.

근무 형태로 보면 우리 중에 제일 앞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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