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매원의 얼굴

에디트 슈타인이 말한 타인의 의식 경험

by김경훈

가게에 들어간다.


판매원이 다가와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물건을 보여준다. 이건 요즘 잘 나가고 저건 신상품이라고 설명한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그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안다. 물건을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완벽하게 해석된다. 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에디트 슈타인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이해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능이라고.


판매원이라는 역할을 이해했을 뿐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이해하지 않았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역할로 분류하고 그에 맞게 대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효율적이다.


식당에 가면 종업원이 있고 병원에 가면 간호사가 있고 회사에 가면 부장이 있다. 각 역할에는 예상되는 행동이 있고 그에 맞는 대응 방식이 있다. 이 체계 덕분에 우리는 매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 편리함에는 대가가 있다. 사람이 역할 안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접받는 쪽은 그것을 안다. 자기가 사람으로 대해지는지 기능으로 대해지는지를 대부분 알아차린다. 말투나 눈길이나 반응 속도 같은 것에서 그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대개 여기서 온다. 상대가 무례해서가 아니라 나를 하나의 역할로만 보고 있다는 감각.


이 작업은 사실 기계도 할 수 있다. 입력을 받아 범주로 분류하고 그 범주에 맞는 출력을 내보내는 것. 요즘 기술이 잘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그런데 분류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괴로워하고 망설이는 하나의 사람으로 상대를 아는 일.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상대를 개별자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범주에 넣는 순간 그 사람은 그 범주의 한 사례가 된다. 사례에는 고유함이 없다.


슈타인이 붙들었던 문제가 여기였다. 한 사람을 사례가 아니라 그 사람으로 아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슈타인이 이 문제를 다룬 방식이 흥미롭다.


그는 후설의 조교였고 현상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박사 논문의 주제로 공감을 택했다.


그가 붙인 정의가 이렇다. 공감이란 타인의 의식 경험이다.


이 정의가 까다로운 이유가 있다. 타인의 의식은 원리적으로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생각을 안다. 내 감정도 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직접 볼 수 없다. 그 사람이 말해줘도 그것은 말일 뿐이고, 말과 실제 상태 사이에는 언제나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은 없앨 수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현상학이 이런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흥미롭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경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들여다본다.


공감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쉽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타인의 의식에 접근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매일 공감을 하고 있고 그것이 자주 성공한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가능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어나는가다.


그렇다면 공감은 어떻게 가능한가. 건널 수 없는 틈을 어떻게 건너는가.



슈타인의 답은 몸이었다.


의식은 보이지 않지만 몸은 보인다. 그리고 몸은 의식의 상태를 계속 내보내고 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수치심이 몸으로 나온 것이다. 미간에 잡히는 주름은 걱정의 표현이다. 어깨가 굳는 것도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목소리는 특히 많은 것을 전달한다. 슈타인은 이렇게 썼다. 목소리의 음색에서 그가 기분이 좋은지 울적한지, 마음이 차분한지 흥분했는지, 상대에게 다정한지 거부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고.


같은 문장도 어떤 음색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괜찮다는 말이 정말 괜찮다는 뜻일 때와 전혀 괜찮지 않다는 뜻일 때가 있고, 우리는 대개 그 차이를 알아차린다. 단어는 같은데 다른 정보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몸은 의식과 의식 사이에 놓인 다리다.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것이 몸을 통해 밖으로 나오고, 그것을 내가 받는다.



그런데 슈타인의 설명에는 한 단계가 더 있다.


상대의 몸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얼굴이 빨개진 것을 봤다고 하자. 그것이 수치심이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


내가 부끄러웠을 때 얼굴이 뜨거워졌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긴장했을 때 목소리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야 그 떨림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감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하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자기 몸에 대한 감각.


이 두 번째 조건이 흥미롭다. 우리는 보통 공감을 상대 쪽의 문제로 생각한다. 상대를 잘 살펴야 한다고. 그런데 슈타인의 설명에 따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상대를 읽을 재료가 없다.


자기 몸이 무엇을 느끼는지 잘 모르는 사람은 남의 몸도 읽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주장은 실용적인 함의를 갖는다. 공감을 기르는 방법이 상대를 더 열심히 관찰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연습도 같은 능력을 키운다. 지금 목이 뻣뻣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가. 이런 질문을 자주 하는 사람은 감정과 몸의 대응표를 더 많이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대응표가 남을 읽을 때 쓰인다.


반대로 자기 상태를 계속 무시하며 살아온 사람은 그 표가 빈약하다. 상대가 신호를 보내도 그것을 무엇으로 번역해야 할지 모른다. 무심해서가 아니라 사전이 없어서다.



이 대목에서 짚어둘 것이 하나 있다.


몸이 다리라고 할 때 그것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슈타인 자신이 목소리의 음색을 강조한 것이 그 예다. 표정이나 몸짓만큼이나 목소리에도 많은 것이 실린다. 말의 속도, 문장 사이의 간격, 숨을 들이쉬는 방식, 갑자기 낮아지는 음역.


이것들은 표정보다 숨기기 어려운 면이 있다. 얼굴은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의 목소리에서 아무렇지 않지 않음이 새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전화로 오래 이야기하다 보면 상대의 상태를 상당히 정확하게 알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정보가 적은 것이 아니라 다른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다.


다리는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개가 있고 사람마다 주로 쓰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어떤 다리를 자주 쓰느냐에 따라 읽어내는 것이 달라진다. 목소리에 익숙한 사람은 표정이 잡아내지 못하는 것을 잡고, 표정에 밝은 사람은 목소리가 놓치는 것을 본다.


슈타인이 감각 인상을 종합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의 통로만으로는 부족하고 여러 통로에서 오는 것을 함께 놓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 공감을 잘한다는 것은 특정 감각이 예민하다는 뜻이 아니다. 들어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모아서 읽는다는 뜻에 가깝다.



물론 이 다리는 자주 어긋난다.


슈타인도 이 점을 인정했다. 사람은 속내를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표정을 관리한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얼굴을 하고 화가 나는데 웃는다. 그래서 몸이 보내는 신호가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같은 신호가 다른 뜻일 수 있다. 말이 없어진 사람은 화가 난 것일 수도 있고 슬픈 것일 수도 있고 그냥 피곤한 것일 수도 있다.


문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고 다른 곳에서는 감추는 것이 예의다. 같은 무표정이 한쪽에서는 무관심이고 다른 쪽에서는 절제다.


그래서 하나의 신호만 보면 틀리기 쉽다.


슈타인이 제시한 방법은 종합이었다. 상대에게서 인지한 모든 감각 인상을 한꺼번에 놓고 보는 것이다.


그가 든 비유가 적절하다. 여러 뜻이 있는 단어를 우리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문맥으로 파악한다. 그 단어 하나만 보면 애매한데 문장 전체를 보면 뜻이 정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목소리와 말의 내용과 지금까지의 상황과 최근에 있었던 일을 함께 놓으면 그림이 잡힌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이 종합을 빠르게 해내는 사람이다.


이건 특별한 재능이라기보다 훈련에 가깝다. 자주 하면 늘고 안 하면 둔해진다.


다만 여기에는 위험도 있다. 종합이 빠르다는 것은 성급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신호를 보고 저 사람은 이런 상태라고 단정하는 일이 흔하다. 그리고 한번 단정하면 그 뒤의 신호는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쪽으로만 읽힌다.


그래서 공감을 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오히려 크게 틀리는 경우가 있다. 읽는 속도가 빨라서 확인을 건너뛰기 때문이다.


슈타인이 말한 종합은 결론을 빨리 내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많이 모으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가장 정확한 방법은 여전히 물어보는 것이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아무리 좋아도 본인의 말을 이기지는 못한다.



슈타인은 이 다리가 놓였을 때 두 가지가 생긴다고 봤다.


하나는 깊은 이해와 진짜 친밀감이다. 이것 없이는 좋은 우정도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가 더 흥미롭다. 타인의 마음에 다가감으로써 내 마음이 자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다른 사람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내가 겪어보지 않은 것을 상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알던 감정의 지도가 넓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 확장은 다음번 공감의 재료가 된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읽을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


그러니까 공감은 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받는 일이다. 내 마음을 남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통해 내 마음이 커지는 것이다.


이 관점은 공감을 소모로 보는 시각과 다르다.


요즘은 공감 피로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남의 감정을 계속 받아내다 보면 지친다는 것이다. 이건 실제 현상이고 특히 돌봄이나 상담처럼 그것이 일인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슈타인이 말한 공감은 감정을 대신 짊어지는 일이 아니다. 상대의 상태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 둘은 다르다. 앞의 것은 상대의 감정을 내 것으로 옮겨오는 것이고 뒤의 것은 상대의 자리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다. 옮겨오면 내가 무거워지지만 보는 것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이 구분이 현실에서 늘 깔끔하지는 않다. 다만 이해와 동화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은 기억해둘 만하다.



에디트 슈타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면 이 이야기가 다르게 읽힌다.


그는 1891년 브레슬라우에서 유대인 상인의 열한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17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의 조교가 되었다.


거기까지는 순조로워 보인다. 그런데 그는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논문을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후설의 조교였고 우수한 논문을 썼다. 다만 그 시대에 여성은 그 자리에 갈 수 없었다.


이것도 사람을 범주로 다룬 일이다. 그가 어떤 연구를 했고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검토 대상이 아니었다. 여성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 하나로 결론이 났다.


공감을 연구한 사람이 정확히 그 반대의 원리에 의해 길이 막힌 셈이다.


그는 학자의 길을 접었고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해 수녀가 되었다.


그리고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다.


타인의 의식을 이해하는 방법을 평생 연구한 사람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 제도가 된 시대에 죽었다.


이 사실 앞에서 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가 연구한 것이 왜 중요한지를 그의 죽음이 증명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분류하고 그 분류에 따라 대하는 일. 슈타인이 부족한 이해라고 지적한 그 방식이 극단으로 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20세기가 보여줬다.


역할로 사람을 보는 것과 범주로 사람을 보는 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구조가 같다. 앞의 것은 무례에서 끝나고 뒤의 것은 그렇지 않았다.


차이는 그 분류에 무엇이 걸려 있느냐에 있을 뿐이다. 분류하는 행위 자체는 같다. 개별자를 지우고 범주만 남기는 것.


그러니 판매원을 판매원으로만 보는 일이 사소해 보여도 완전히 사소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습관은 큰일에서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물론 모든 사람을 매 순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루에 수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가고 그 전부에 마음을 쓸 수는 없다. 역할로 처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도록 가끔 멈추는 정도는 가능하다. 슈타인이 요구한 것도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가게로 돌아가보자.


판매원이 물건을 설명하고 있다. 목소리가 조금 피곤하게 들린다. 아까부터 말이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한다.


이 사람은 오늘 몇 시간째 서 있는 중일 것이다. 아마 몇 번이나 같은 설명을 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물건을 사거나 안 사거나 할 뿐이다.


다만 그 순간 그 사람은 판매원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도 어렴풋이 느낀다.


이건 친절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친절은 태도의 문제고 이것은 인식의 문제다. 친절한 말을 하면서도 상대를 기능으로만 보는 것이 가능하고, 특별히 다정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 이 둘을 구별한다. 말은 상냥한데 뭔가 통하지 않는 느낌, 반대로 무뚝뚝한데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느끼기는 한다.


슈타인이 다리라고 부른 것이 아마 그 정도의 일일 것이다.


거창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놓이느냐 아니냐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온도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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