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의 아키텍처

by김경훈

정부 예산안 기사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나는 좀 이상한 습관이 있다.


기사 본문보다 표를 먼저 찾는다.

어느 항목이 늘고 어느 항목이 줄었는지.


정바카라 발표문은 매년 비슷하다.

포용과 동행과 권리 같은 단어가 들어간다.


그 단어들은 예산서에 안 들어간다.

예산서에는 숫자만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숫자 쪽을 본다.


예산서를 읽는 일은 사실 나에게 쉬운 작업이 아니다.


표가 많고 그 표들이 대체로 이미지나 PDF로 되어 있어서

화면 낭독기로 읽으면 칸이 뒤엉킨다.


그래서 몇 년째 같은 요령을 쓴다.

표를 통째로 읽으려 하지 않고 항목 이름으로 검색해서 그 줄만 확인한다.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이미 아는 항목만 볼 수 있다는 것.


예산서에서 정작 중요한 건 새로 생긴 항목과 사라진 항목인데

그건 이 방법으로는 잘 안 잡힌다.


정보 접근이 부족하면 감시도 부족해진다.

그리고 감시가 부족한 예산은 조용히 바뀐다.


올해도 익숙한 문장을 들었다.

중요한 건 알지만 재정 여건상 어렵다는 문장.


그 문장을 듣고 나서 나는 다른 계산을 하나 해 봤다.


이것은 어느 쪽 비용만 장부에 적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내 장부



지난 1년 동안 내가 개인적으로 쓴 것들을 항목별로 적어 봤다.

정확한 회계는 아니다. 대략의 감각이다.


첫째 항목은 교통비다.


저상버스가 오지 않거나 정류장에서 어느 버스인지 확인이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되면

중요한 일정에는 택시를 탄다.

지각하면 안 되는 회의나 심사 자리에는 거의 택시를 탄다.


버스로 갈 수 있는 거리를 택시로 가는 횟수가 한 달에 대여섯 번쯤 된다.

1년이면 60번 남짓이다.


둘째 항목은 자료 변환이다.


이미지로 된 문서나 스캔본 PDF를 받으면 그걸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

문자 인식을 돌리고 결과를 확인하고 표가 깨진 부분을 손으로 정리한다.


한 건에 20분에서 한 시간쯤 걸린다.

1년이면 며칠은 될 것이다.


한 번은 회의 자료가 전날 밤 11시에 왔다.

스캔본이었다.


문자 인식을 돌리고 표가 깨진 부분을 정리하고 나니 새벽 2시였다.

회의는 오전 10시였다.


다른 참석자들은 그 자료를 아침에 10분쯤 훑고 들어왔을 것이다.

같은 회의에 같은 준비를 하려고 나는 3시간을 더 썼다.


그 3시간은 아무 데도 청구되지 않는다.


셋째 항목은 보조기기와 소프트웨어다.


화면 낭독기와 점자정보단말기와 각종 기기는 지원 제도가 있다.

그런데 지원 품목과 기준액이 정해져 있어서 차액은 본인 부담이다.

그리고 지원 주기가 있어서 그 사이에 고장 나면 그것도 본인 부담이다.


넷째 항목은 시간이다.


앞의 세 항목은 그래도 숫자로 셀 수 있다.

이건 그렇지 않다.


같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남들보다 먼저 자료를 요청해야 하고

같은 문서를 읽는 데 더 오래 걸리고

같은 목적지에 가는 데 더 일찍 나선다.


다섯째 항목은 포기다.


이건 지출이 아니라서 장부에 적기가 애매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가장 큰 항목일 것이다.


자료가 접근 가능한 형태로 올 것 같지 않아서 신청하지 않은 프로그램.

현장 접근성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서 사양한 초청.

설명하기 지쳐서 그냥 안 간 곳.


이 항목의 금액은 0원이다.

아무 지출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항목이야말로 접근성이 부족한 슬롯에서 개인이 치르는 가장 큰 비용이다.


이 항목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전부 내가 부담했고 어느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다.

온라인 게임이 있고 소득이 있고 옆에 태워 줄 사람이 있다.


같은 항목을 소득 없이 혼자 감당하는 사람에게는

이 장부의 각 줄이 그대로 못 하는 일의 목록이 된다.





국가 장부



이제 국가 쪽 장부를 보자.


장애인 정바카라과 관련해 예산서에 적히는 것은 지출이다.


활동지원 급여로 얼마.

보조기기 지원으로 얼마.

저상버스 보급으로 얼마.

편의시설 설치로 얼마.


이 숫자들은 정확하고 검증 가능하고 매년 비교된다.

그래서 예산 심의에서 이 숫자들은 언제나 논의의 중심에 선다.


문제는 이 장부에 반대편 칸이 없다는 것이다.


이동하지 못해서 발생한 비용은 어디에 적히는가.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발생한 비용은 어디에 적히는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하지 못해서 생긴 손실은 어디에 적히는가.

지역슬롯에서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시설에서 수십 년을 보낸 비용은 어디에 적히는가.


이 항목들은 예산서에 없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루어진다.


회계에서 이런 걸 뭐라고 부르는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정보학에서는 비슷한 현상을 자주 다룬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검색되지 않고

검색되지 않는 것은 인용되지 않고

인용되지 않는 것은 논의에서 사라진다.


예산 심의도 결국 문서를 놓고 하는 일이다.

그 문서에 없는 항목은 회의실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지출은 항목이 있어서 매년 심사받고

미지출로 인한 손실은 항목이 없어서 매년 무사하다.


그리고 이 손실은 대체로 다른 항목의 지출로 나타난다.


지역슬롯에서 살 조건이 없으면 시설 운영비가 늘고

이동할 방법이 없으면 응급 이송 비용이 늘고

일할 환경이 없으면 소득 보전 지출이 늘어난다.


같은 돈이 예방 쪽에서 안 쓰이고 사후 쪽에서 쓰이는 것이다.

그런데 예산서에서 이 둘은 다른 부처의 다른 항목이라 나란히 놓이지 않는다.


이 비대칭이 장애인 정바카라이 반복해서 뒤로 밀리는 회계적 이유다.


물론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못 한 일의 비용을 어떻게 정확히 계산하느냐고.


맞는 지적이다. 그건 어렵다.

그런데 어렵다는 게 0으로 두는 근거는 아니다.


교통 분야에서는 이미 시간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도로 사업 타당성을 따진다.

환경 분야에서는 오염으로 인한 건강 피해를 비용으로 계산한다.

안 하던 계산을 새로 만든 사례가 이미 여럿 있다.


접근성 분야만 유독 그 계산을 안 하고 있다.

못 해서가 아니라 아직 아무도 필요하다고 강하게 말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비용이라는 말



그래서 장애인 정바카라은 늘 비용으로 이야기된다.


활동지원은 지출이고

접근성은 부담이고

이동권은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는 사업이 된다.


이 프레임 안에서는 이길 수가 없다.

지출 항목끼리 비교하면 언제나 더 급한 지출이 있으니까.


그런데 프레임을 하나만 바꾸면 그림이 달라진다.


경사로를 놓는 데 드는 돈은 새로 생긴 비용이 아니다.

처음 건물을 지을 때 안 쓴 돈을 지금 쓰는 것이다.


전자문서를 접근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비용도 마찬가지다.

원래 그렇게 만들었으면 안 들었을 돈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접근성 예산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과거에 미룬 청구서다.


미룬 청구서에는 이자가 붙는다.

나중에 고치는 게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 늘 비싸다.


이 이자를 계산에 넣지 않으면

매년 미루는 쪽이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매년 그 선택을 해 왔다.


이 구조에는 이상한 성질이 하나 더 있다.


미룬 사람과 갚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


30년 전에 계단만 놓기로 결정한 사람은 지금 그 자리에 없다.

그 결정으로 절약된 예산은 그때 다른 사업에 쓰였고 그건 성과로 보고됐다.


지금 그 건물에 경사로를 놓는 예산은

새로 생긴 부담으로 계산되고 담당자는 왜 이 돈이 필요한지 설명해야 한다.


절약은 당대에 성과가 되고 청구서는 다음 세대에 간다.

이런 구조에서는 누구도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 이유가 없다.


접근성을 설계 단계 의무로 못 박아야 한다는 주장은

윤리적 요구이기 이전에 이 회계 구조를 끊자는 요구다.





참여와 거부권 사이



여기까지가 회계 이야기고 그다음은 권한 이야기다.


정부는 공청회를 연다. 간담회도 한다. 당사자 위원도 위촉한다.

이건 사실이고 과거보다 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면 대체로 두 가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

정바카라의 큰 방향과 예산 규모.


의견은 낼 수 있다. 그 의견이 기록도 된다.

다만 그 의견으로 무언가를 멈출 수는 없다.


정치학에서는 이 차이를 꽤 중요하게 본다.

참여와 거부권은 다른 것이다.


참여는 말할 기회이고 거부권은 결정에 대한 지분이다.

말할 기회만 있는 집단은 협의 대상으로 분류되고

지분이 있는 집단은 협상 상대로 분류된다.


그리고 예산 편성 과정에서 실제로 힘을 갖는 건 후자다.


이 차이는 회의록에도 남는다.


협의 대상의 발언은 의견으로 기록되고

협상 상대의 발언은 조건으로 기록된다.


의견은 검토되고 조건은 반영된다.

같은 말을 해도 어느 칸에 적히느냐에 따라 다음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당사자 참여를 늘린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섞여 있다.

자리에 앉히는 것과 지분을 주는 것.


지금까지 늘어난 것은 대체로 앞쪽이다.


이건 누가 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제도의 구조가 그렇다.

어떤 부처가 예산을 깎으려 할 때

그 항목에 관련된 이해집단이 조직되어 있고 반발할 수단이 있으면 신중해진다.

그런 수단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쉬운 항목이 된다.


슬롯복지정치학이 오래전부터 말해 온 것도 이거다.

복지정바카라은 필요의 크기가 아니라 조직된 목소리의 크기로 결정된다.


장애인은 인구의 5퍼센트쯤 된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 5퍼센트는 하나로 조직되기가 특히 어렵다.

장애 유형이 다르면 필요가 다르고

이동과 의사소통에 제약이 있으면 모이는 것 자체가 비용이고

무엇보다 생존이 급한 사람에게 지속적인 정치 활동을 요구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조직되기 어렵다.

그리고 조직되지 못한 절박함은 정바카라에서 후순위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고 싶다.


그렇다고 장애인단체가 더 세게 나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면 안 된다.

그건 다시 개인과 집단의 노력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직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든 것도 결국 제도다.

이동이 어려우면 모이기 어렵고

정보가 늦게 오면 대응이 늦고

소득이 불안정하면 활동에 시간을 쓰기 어렵다.


그러니까 접근성과 정치적 힘은 서로를 만든다.

접근성이 없으면 조직되기 어렵고

조직되지 못하면 접근성 예산이 밀린다.


이 고리를 개인이 끊을 수는 없다.

끊으려면 제도 쪽에서 먼저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기다림이라는 말



이 이야기를 보보에게 했더니 보보가 한 단어를 짚었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떤 점에서."


"기다림은 원래 끝이 있어야 성립하는 말이잖아.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게 없으면 그건 기다림이 아니라 그냥 안 하는 거지."


맞는 말이다.


목표 연도가 있고 연차별 예산이 있고 미달성 시 사유를 공개하는 절차가 있으면

그건 기다림이다.


그게 없으면 기다려 달라는 말은

결정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부드럽게 표현한 문장에 가깝다.


그리고 이 문장은 비용이 거의 안 든다.

그래서 자주 쓰인다.


시범사업이라는 말도 비슷하게 쓰인다.


시범사업은 원래 좋은 제도다.

작게 해 보고 효과를 확인하고 고쳐서 넓히는 절차.


문제는 종료 시한과 본사업 전환 기준이 없을 때다.

그러면 시범이라는 이름이 유예의 다른 표현이 된다.


효과가 확인됐는데도 시범인 사업들이 있다.

그건 검증이 안 끝난 게 아니라 예산을 붙일 결정을 안 한 것이다.


시범사업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붙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까지인가. 무엇이 확인되면 본사업으로 가는가.


이 두 줄이 없으면 시범사업은 영구적인 대기실이 된다.





제목: 장부의 아키텍처 혹은 계산되지 않은 비용에 대하여.


예산은 숫자로 되어 있어서 중립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산은 그 슬롯가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기는지를 적어 둔 문서다.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안 하는 것이다.


그 판단은 정당할 수도 있다.

급한 일은 늘 있고 자원은 늘 부족하다.


다만 그 판단이 매년 같은 방향으로만 나온다면

그건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다.


국제슬롯의 방향은 비교적 분명하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바카라을 만들 때

장애인과 그 대표조직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도록 국가에 의무를 지운다.


캐나다는 우리 없이 우리에 관한 것은 없다는 원칙을 국가 장애정바카라 원칙으로 선언했고

영국의 일부 지방정부는 장애인과 행정이 정바카라을 함께 설계하는 방식을 실천하고 있다.

스웨덴은 장애를 복지 부처의 업무가 아니라

교통과 교육과 노동과 디지털을 포함한 국가 전체의 과제로 다룬다.


이 나라들이 완벽해서 인용하는 게 아니다.

그들도 예산 싸움을 하고 후퇴도 한다.


다만 장애인을 정바카라의 대상이 아니라 시민으로 놓는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방향이 정해져 있으면 후퇴해도 돌아올 자리가 있다.


그리고 우선순위는 힘의 배분에서 나온다.


결론: 바뀌어야 하는 건 예산의 크기만이 아니다.

그 예산이 정해지는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느냐다.


장애인 정바카라이 늘 마지막 순서라면

그건 장애인의 필요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 필요를 대변할 힘이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작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작동하지만

그 품격은 다수가 아닌 사람들의 권리를 어떻게 다루는지에서 드러난다.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약속이 아니라 더 많은 결정이다.

약속은 다음 정부로 넘길 수 있지만 결정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결정에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


목표 연도와 연차별 예산과 국비 지방비의 바카라임 구분과 집행 기관과 성과 지표.

시한을 넘기면 사유와 수정 계획을 공개하는 절차.

시범사업에는 종료 시한과 본사업 전환 기준.


이 형식들이 붙는 순간 약속은 결정이 된다.

붙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문장도 보도자료로 남는다.


그리고 결정을 하려면 먼저 장부를 고쳐야 한다.

지출 칸만 있는 장부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그나저나 이 글을 쓰면서 내 장부를 다시 봤다.

택시비 항목이 제일 컸다.

보보가 그걸 보더니 그러면 앞으로 자기가 더 태워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게 해결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기는 한데 사실 좀 고마웠다.

개인이 메우는 비용은 늘 이런 식으로 생긴다.

누가 나쁜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이 좋아서 생긴다.

탱고는 그날도 조수석 발밑에 앉아 있었다.

저 녀석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교통비를 안 내는 구성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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