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횡단보도에서 남은 시간을 모른다.
신호등 아래 숫자가 줄어드는 장치가 있다는 건 안다.
그 숫자를 보고 사람들은 판단한다.
7초 남았으면 뛰고 3초 남았으면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그 판단을 나는 못 한다.
숫자는 시각 정보다.
음향신호기가 있는 곳에서는 소리로 시작을 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대체로 시작만 알려 준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규칙을 하나 만들어 두고 산다.
소리가 시작되고 나서 조금이라도 늦었다 싶으면 안 건넌다.
다음 신호를 기다린다.
이 규칙 덕분에 나는 도로 중앙에 갇혀 본 적이 거의 없다.
대신 남들보다 신호를 한 번씩 더 기다린다.
한 번에 2분쯤이다.
하루에 네다섯 번 건너면 10분쯤 된다.
1년이면 60시간쯤 되겠다.
그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안전을 위해 시간을 쓰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다만 그 선택을 하게 만든 게 내 몸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남은 시간을 알려 주는 장치가 소리로도 있었다면
나는 그 2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정보가 없어서 쓰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아무 통계에도 안 잡힌다.
이것은 그 규칙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도시의 시간이 누구의 보폭에 맞춰져 있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바퀴 소리
지난달 대구 어느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보행보조기 바퀴 소리로 알았다.
실버카라고 부르는 그 네 바퀴짜리 손잡이 있는 기구.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는 특유의 리듬이 있다.
빠르지 않고 일정하다.
신호가 바뀌고 나는 건넜다.
내 걸음은 느리지 않다. 눈이 안 보인다고 걸음이 느려지지는 않는다.
탱고와 나는 8초쯤 걸려 건너편에 닿았다.
그런데 바퀴 소리는 아직 뒤에 있었다.
도로 한가운데쯤이었다.
그리고 음향신호기 소리가 끊겼다.
몇 초 뒤에 차 소리가 났다.
출발하는 소리가 아니라 기다리는 소리였다.
공회전 소리가 몇 대 겹쳐 있었다.
그리고 경적이 한 번 울렸다.
짧게. 재촉하는 종류의 짧은 경적.
바퀴 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그러다 삐끗하는 소리가 났다. 바퀴 하나가 턱에 걸린 소리 같았다.
결국 그분은 건너왔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소리만 들었다.
그런데 소리만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순서가 또렷했다.
신호가 끊기고 차가 서고 경적이 울리고 걸음이 빨라지고 바퀴가 걸렸다.
이 순서가 이 글의 전부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그 경적을 울린 사람도 아마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운전석에서는 앞이 잘 안 보인다.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안 가면 무슨 일인가 싶어 짧게 누른다.
대부분 그 정도의 일이다.
문제는 그 짧은 소리가 도로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도착하느냐다.
거기 서 있는 사람에게 그건 재촉이 아니라 판정에 가깝다.
당신 때문에 지금 이 도로가 멈춰 있습니다.
그 판정을 매번 받는 사람은 결국 외출을 줄인다.
이게 통계에 잡히지 않는 방식의 이동 제약이다.
1.0이라는 숫자
우리나라 보행신호 시간은 대체로 이렇게 계산된다.
진입에 필요한 시간을 먼저 잡고 거기에 횡단 시간을 더한다.
횡단 시간은 횡단보도 길이를 보행 속도로 나눈 값이다.
그 보행 속도 기준이 일반 지역에서 초당 1.0미터다.
이 숫자는 어디서 왔을까.
건강한 성인의 평균 보행 속도를 표준으로 놓고 산출한 값이다.
여기서 평균이라는 말이 하는 일을 봐야 한다.
평균은 중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신호 시간은 중간에 맞추면 안 되는 종류의 설계다.
중간에 맞추면 절반이 못 건넌다.
그래서 교통공학에서는 보통 하위 15퍼센타일 속도를 쓴다.
느린 쪽 15퍼센트가 건널 수 있는 속도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관련 연구를 보면 일반인의 하위 15퍼센타일 속도가 초당 1.00미터쯤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1.0이라는 숫자 자체는 근거 없이 정해진 게 아니다.
문제는 그 표본에 누가 들어 있느냐다.
같은 연구에서 노인의 하위 15퍼센타일 속도는 초당 0.85미터였다.
그리고 지팡이나 휠체어를 쓰는 노인은 초당 0.73미터였다.
1.0미터로 설계된 횡단보도를 0.73미터로 건너면 어떻게 되는가.
30미터짜리 횡단보도에서 계산해 보면
1.0미터 기준으로는 30초가 나오고 실제로는 41초가 걸린다.
11초가 모자란다.
그 11초 동안 그 사람은 도로 위에 있다.
그리고 그 11초 동안 신호는 이미 바뀌어 있다.
지난달 그 사거리에서 내가 들은 소리가 그 11초였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사람은 신호가 바뀌자마자 출발하지 않는다.
신호를 인지하고 몸을 움직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나이가 들면 길어진다.
지팡이를 짚거나 보조기를 미는 사람은 방향을 잡는 데도 시간이 든다.
그래서 실제로 쓸 수 있는 횡단 시간은 계산값보다 늘 짧다.
계산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데
사람은 출발선에 서기까지도 시간을 쓴다.
이 차이는 대체로 몇 초 안쪽이다.
그리고 도로 한가운데서는 그 몇 초가 전부다.
0.7이라는 숫자
다행히 이 문제가 방치되어 있지는 않다.
경찰청은 2020년 11월에 교통신호기 설치관리 매뉴얼을 개정했다.
교통약자를 고려한 보행 속도 기준을 초당 0.8미터에서 0.7미터로 낮췄다.
연구 용역을 거쳐 나온 개정이고 방향도 옳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 적용되는 범위다.
0.7미터 기준은 어린이보호구역과 노인보호구역 같은 지정된 구역에 적용된다.
그 바깥의 일반 도로는 여전히 1.0미터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긴다.
보호구역은 시설 주변에 지정된다.
학교 앞이나 노인복지관 앞 같은 곳.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가정하고 있는 셈이다.
느리게 걷는 사람은 특정 시설 근처에만 있다.
실제로는 어디에나 있다.
집 앞 사거리에도 있고 시장 앞에도 있고 병원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도 있다.
지난달 그 사거리는 보호구역이 아니었다.
그냥 동네 사거리였다.
보호구역이라는 개념은 위험을 공간으로 관리한다.
그런데 느린 보폭은 공간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붙어 있다.
사람은 구역 밖으로도 걸어 나간다.
이건 정보학에서 다루는 분류 문제와 닮아 있다.
어떤 속성을 공간에 붙일 것인가 사람에게 붙일 것인가.
공간에 붙이면 관리가 쉽고 사람에게 붙이면 정확하다.
행정은 대체로 공간에 붙인다.
구역을 그으면 지도에 표시되고 예산이 잡히고 성과가 보고되니까.
그런데 사람에게 붙어 있는 속성을 공간으로 관리하면
반드시 두 종류의 오류가 생긴다.
구역 안에 있는데 그 속성이 없는 사람.
구역 밖에 있는데 그 속성이 있는 사람.
앞쪽은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신호가 좀 길 뿐이다.
뒤쪽은 도로 한가운데 남는다.
두 오류의 비용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는 지금 둘을 같은 무게로 놓고 구역을 긋고 있다.
20년짜리 버튼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온 게 보행신호 연장 버튼이다.
2000년대 중반에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과 맞물려 도입되기 시작했다.
노인복지관과 종합병원과 장애인 거주시설 인근을 중심으로 시범 설치됐다.
취지는 분명했고 선의였다.
20년이 지났다.
보급률은 여전히 낮다.
예산과 우선순위 문제로 대부분의 횡단보도에는 없다.
있는 것들도 문제가 있다.
휠체어 이용자가 손을 뻗을 수 없는 높이에 붙어 있는 경우가 있고
시각장애인이 그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연장 버튼을 눌러 본 적이 없다.
있는 줄 알았어도 못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의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버튼을 누르려면 먼저 이런 판단을 해야 한다.
나는 이 신호 안에 못 건널 사람이다.
그리고 그 판단을 공공장소에서 몸으로 표시해야 한다.
버튼 앞으로 가서 그걸 누르는 동작으로.
그 동작은 주변에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 이 사람 때문에 여러분이 몇 초 더 기다립니다.
사람은 그런 걸 잘 못 한다.
특히 매일 지나는 동네 사거리에서는 더 못 한다.
그래서 버튼이 있어도 안 누르고 그냥 서두른다.
서두르다 넘어진다.
구조가 만든 문제를 개인이 자기 손으로 신고해서 해결하라는 방식.
20년 동안 이 방식이 잘 작동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고 나는 본다.
그리고 이런 장치에는 묘한 부작용이 하나 더 있다.
버튼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알리바이가 된다.
사고가 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연장 버튼이 있었는데 왜 안 누르셨습니까.
장치는 그 순간 지원 수단에서 바카라임 배분 장치로 바뀐다.
있는데 안 썼다는 문장이 만들어지는 순간
설계의 바카라임이 이용자의 부주의로 옮겨 간다.
접근성 장치를 설계할 때 이 점을 늘 확인해야 한다.
이 장치가 나중에 누구를 탓하는 데 쓰일 수 있는가.
무구속적이라는 말
다른 나라들은 다른 방향으로 갔다.
미국 연방도로청의 교통신호 지침은 신호 시간 산정에서
고령자와 교통약자를 고려해 보행 속도를 낮춰 잡도록 권장한다.
병원이나 노인시설 주변에서는 더 완화된 기준을 적용한다.
노르웨이 오슬로는 비전 제로라는 철학 아래
차량 속도 제한을 강화하고 신호 체계와 공간 구조를 함께 재편했다.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 사망 사고를 거의 없앤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가포르의 그린맨 플러스는 교통약자가 카드를 태그하면
신호 시간이 자동으로 늘어나는 방식이다.
영국과 독일 등에서는 컴퓨터 비전과 레이더 센서를 결합해
횡단보도에 남아 있는 보행자를 감지하고 신호를 자동으로 연장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핀란드와 스웨덴 쪽에서는 겨울 적설 환경까지 계산에 넣는다.
가열 보도블록과 보행 감지를 연동해서
눈이 쌓여 걸음이 더 느려지는 조건에서도 건널 수 있게 하는 실험이 이루어져 왔다.
날씨를 변수로 넣는다는 발상이 인상적이다.
같은 사람도 비 오는 날에는 더 느리게 걷는다.
고정된 숫자 하나로는 그걸 담을 수 없다.
이 흐름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 무구속적이라는 말이다.
이용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작동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표현이 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는다고 생각한다.
접근성 장치의 상당수는 이용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버튼을 누르라거나 카드를 태그하라거나 미리 신청하라거나.
그 요구는 작아 보이지만 두 가지 비용을 만든다.
그 장치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하고
자신이 그 장치의 대상임을 드러내야 한다.
앞의 비용은 정보 격차를 만들고 뒤의 비용은 낙인을 만든다.
센서가 알아서 감지하는 방식은 그 둘을 다 없앤다.
아무것도 안 알아도 되고 아무것도 안 밝혀도 된다.
물론 이 방식에도 조심할 게 있다.
사람을 계속 감지한다는 건 사람을 계속 촬영하거나 측정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저장하고 얼마나 두고 누가 보는지에 대한 규칙이 없으면
접근성 장치가 감시 장치가 된다.
이건 앞서 다른 글에서 쓴 이야기와 같은 문제다.
감지의 목적을 통과 여부 하나로 한정하고
영상 자체를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하는 것.
그 정도는 지금 기술로 충분히 가능하다.
기준을 다시 쓰는 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는 속도 기준이다.
보호구역 밖에서도 낮은 기준을 쓸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
구역이 아니라 도로의 폭과 통행 특성에 따라 정하는 방식으로.
둘째는 자동 연장이다.
버튼을 늘리는 것보다 감지 기반 연장으로 넘어가는 편이 낫다.
20년 동안 버튼이 증명한 게 그것이다.
셋째는 공간이다.
긴 횡단보도 중앙에 안전지대를 넉넉히 두면
한 번에 못 건너도 두 번에 나눠 건널 수 있다.
기술보다 이쪽이 더 확실할 때가 많다.
센서는 고장 나고 소프트웨어는 업데이트되고 예산은 끊긴다.
콘크리트로 만든 안전지대는 그냥 거기 있다.
접근성에서 가장 오래가는 개선은 대체로 가장 단순한 것들이었다.
경사로와 낮은 턱과 넓은 문.
그것들은 전원이 필요 없고 인증이 필요 없고 담당자가 바뀌어도 그대로다.
넷째는 잔여 시간 정보다.
남은 시간을 소리로 알려 주는 음향신호기가 있으면
나 같은 사람도 건널지 말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지금 나는 그 판단을 못 해서 늘 한 박자 보수적으로 산다.
안전하지만 자유롭지는 않다.
이 네 가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전부 사람이 아니라 도로를 고치는 일이라는 것.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대바카라의 상당수는 사람 쪽을 향했다.
조심히 건너십시오. 야광 밴드를 착용하십시오. 버튼을 누르십시오.
그 말들이 틀리지는 않다.
다만 그 말들은 사고가 났을 때 무엇을 탓할지를 미리 정해 둔다.
도로를 고치는 대바카라은 반대다.
사고가 나면 설계를 다시 본다.
안전공학에서 안전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접근이 이것이다.
사람은 실수하고 느려지고 늙는다는 걸 전제로 놓고
그래도 죽지 않는 도로를 만드는 것.
전제를 바꾸면 대바카라의 방향이 통째로 바뀐다.
제목: 보폭의 아키텍처 혹은 도시의 시간은 누구의 걸음에 맞춰져 있는가.
도로 설계는 시간을 배분하는 일이다.
차에게 몇 초를 주고 사람에게 몇 초를 줄 것인가.
그 배분에서 사람 쪽 시간은 언제나 속도로 환산된다.
그리고 그 속도는 하나의 숫자로 정해진다.
숫자 하나로 정하는 순간 그 숫자에 못 미치는 몸은 설계 바깥으로 나간다.
설계 바깥으로 나간 사람은 도로 위에서 개인의 문제가 된다.
왜 서두르지 않았느냐. 왜 버튼을 안 눌렀느냐. 왜 나왔느냐.
결론: 초고령슬롯에서 느린 걸음은 예외가 아니다.
지금 빠르게 걷는 사람도 언젠가 그쪽으로 간다.
그러니까 이건 소수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모두의 미래를 위한 설계 변경이다.
가장 느린 걸음에 도시의 시간을 맞추면 무엇을 잃을까.
신호 주기가 몇 초 길어지고 차가 조금 더 기다린다.
무엇을 얻을까.
아무도 도로 한가운데서 혼자가 되지 않는다.
이 교환이 손해라고 생각하는 슬롯라면
그 슬롯는 이미 시간의 가격을 잘못 매기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그날 건너온 뒤에 그분이 내 옆에서 한참 숨을 골랐다.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분도 그랬을 것이다.
잠시 뒤 바퀴 소리가 멀어졌다.
탱고는 그동안 내 왼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 녀석은 내가 안 움직이면 안 움직인다.
그날 우리 셋은 같은 신호를 건넜는데 걸린 시간이 서로 달랐다.
도시는 그중 하나만 계산에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