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왜 거짓말을 허락하지 않았나
아무 죄 없는 사람이 당신 집에 찾아와 숨겨달라고 한다.
당신은 그를 안으로 들인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여기 누가 오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대답한다. 아무도 안 왔는데요.
경찰은 그 말을 믿고 다른 집으로 간다.
이제 질문이다. 당신은 잘한 것인가.
대부분은 즉시 답할 것이다. 당연하지.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칸트는 아니라고 했다.
이 대답을 처음 접하면 어리둥절하다.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처럼 보인다. 규칙에 집착하다가 사람을 잃는 쪽을 택하는 사람. 그런 인상이 남는다.
그런데 그가 왜 그렇게까지 말했는지를 따라가보면 조금 다른 그림이 보인다.
이 사고실험은 실제 논쟁에서 나왔다.
프랑스 철학자 뱅자맹 콩스탕이 1797년에 이런 주장을 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의무지만 그 의무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을 해치는 진실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논리였다.
이 주장은 상식적으로 들린다. 죄 없는 사람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 사실대로 말할 의무가 왜 있겠는가.
칸트는 이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썼다. 제목이 인간애에서 비롯한 거짓말은 정당하다는 주장에 대하여였다.
그 글에서 그는 이렇게 못 박았다.
모든 진술에서 정직은 신성하고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이성의 지시다.
예외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정직이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그 의무가 누구를 향하는가다.
콩스탕은 의무가 관계에서 생긴다고 봤다. 진실을 들을 자격이 있는 상대에게만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다.
칸트는 의무가 상대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봤다. 내가 진실을 말하는 것은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내 원칙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앞의 관점에서는 상대를 평가한 뒤 대응이 결정된다. 뒤의 관점에서는 평가와 무관하게 대응이 정해져 있다.
이 입장은 완고하게 들린다. 그리고 실제로 완고하다.
칸트를 옹호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지점에서 그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왜 이렇게까지 말했는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규칙이 아니었다. 신뢰였다.
칸트의 논리는 이렇다.
거짓말은 개인 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서 있는 토대를 갉아먹는다.
우리가 사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계약을 맺고 약속을 잡고 함께 일한다. 이 모든 것이 상대의 말을 믿을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돌아간다.
그 전제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계약서에 적힌 말을 믿을 수 없으면 계약이 무슨 소용인가. 약속 시간을 믿을 수 없으면 약속을 왜 잡는가.
거짓말이 무서운 이유는 티가 나지 않게 이 토대를 부순다는 데 있다. 한 번의 거짓말이 당장 세상을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씩 갉아낸다.
그리고 이 갉아냄이 쌓이면 어느 순간 아무도 아무 말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된다.
상대를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모르는 채로 살아야 하는 삶. 칸트는 그것을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봤다.
이 상태가 어떤 것인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기가 흔한 슬롯를 생각해보면 된다. 거기서는 거래 하나를 하는 데도 많은 비용이 든다. 상대를 확인해야 하고 증거를 남겨야 하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신뢰가 높은 슬롯에서는 이 비용이 낮다. 말로 약속하고 그것이 지켜진다. 그래서 같은 일을 하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가 적다.
경제학에서 신뢰를 자본의 일종으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칸트가 거짓말을 개인의 도덕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로 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각자의 작은 거짓말이 모여서 슬롯 전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된다.
신뢰에는 고약한 성질이 하나 있다.
쌓는 데는 오래 걸리는데 무너지는 데는 순식간이라는 것이다.
몇 년을 함께 일한 사람이라도 결정적인 거짓말 하나가 드러나면 그 몇 년이 다시 계산된다. 그때 그 말도 거짓이었나. 그 일도 그런 것이었나. 지나간 시간 전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두 번 거짓말한 사람은 진실을 말해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다.
문제는 진실을 말해도 믿을 수 없다는 부분이다. 거짓말이 드러나면 그 사람의 모든 말이 판정 불가능해진다. 맞는 말을 해도 확인해봐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건 처벌이 아니라 구조다. 판단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거짓말의 진짜 비용은 그 거짓말이 밝혀졌을 때가 아니라 그 뒤에 발생한다. 앞으로 할 모든 말의 값이 떨어진다.
신뢰가 이렇게 비대칭적인 데는 이유가 있다. 믿는다는 것은 확인하지 않기로 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때 실제로 하는 일은 검증을 생략하는 것이다. 저 사람이 그렇다고 했으니 확인하지 않는다. 이 생략 덕분에 관계가 효율적으로 굴러간다. 모든 말을 확인해야 한다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거짓말이 드러나면 이 생략이 위험한 것이 된다. 확인하지 않은 것들이 전부 불안해진다. 그래서 다시 확인하기 시작한다.
한번 확인하는 습관이 생기면 그것을 되돌리기가 어렵다. 신뢰가 회복되려면 다시 확인을 생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확인해도 문제가 없다는 경험이 충분히 쌓여야 한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린다.
칸트가 이 문제를 크게 본 데는 시대적 배경도 있다.
그는 계몽주의의 한복판에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 이성으로 판단하는 인간이 그의 이상이었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내라는 것이 그의 구호였다.
그런데 이성적 판단에는 재료가 필요하다. 사실이 있어야 판단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거짓 정보를 주면 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하게 된다. 내 이성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데 결론은 틀린다. 재료가 오염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짓말은 상대의 판단 능력을 무력화하는 일이다.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다.
칸트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한 것과 이어진다. 거짓말은 상대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만든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그 사람의 판단을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왜 예외를 두지 않으려 했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예외를 인정하는 순간 누가 예외에 해당하는지를 내가 판단하게 되고, 그 판단은 결국 내 편의에 따라 넓어지기 때문이다.
이 우려는 근거가 없지 않다. 규칙에 예외를 두면 그 예외가 확장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처음에는 정말 급한 경우에만 쓴다. 그런데 한 번 써보면 다음번에는 조금 덜 급해도 쓰게 된다. 기준이 조금씩 내려가고, 몇 년 뒤에는 처음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각 단계는 이전 단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짚기가 어렵다.
칸트는 이 미끄러짐을 막는 방법이 예외를 아예 두지 않는 것뿐이라고 봤다. 문을 조금이라도 열면 결국 활짝 열리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일관되지만 현실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지나쳤다.
문 앞에 경찰이 서 있고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숨어 있는 상황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뢰의 형식을 지키려다 사람을 잃는다면 그 형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원칙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여기서 유용한 비유가 하나 있다.
도로에는 제한 속도가 있다. 시속 50킬로미터 구간에서 60으로 달리면 위반이다. 그런데 구급차는 그보다 빠르게 달린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제한 속도가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제한 속도는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지키려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을 때는 예외가 인정된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정직이라는 원칙은 유효하다. 다만 사람의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는 그 원칙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
의료 현장에서도 비슷한 판단이 이루어진다. 환자에게 무엇을 언제 어떻게 말할지에 대한 판단은 단순하지 않다. 사실을 전부 즉시 말하는 것이 언제나 최선은 아니다.
다만 이 영역에서도 방향은 분명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환자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배려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알 권리 쪽에 무게가 실린다. 자기 상태를 알아야 자기 삶에 대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가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결국 칸트가 말한 방향으로 움직인 셈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의 정보 차단이 실제로는 상대의 판단권을 빼앗는 일이었다는 인식이다.
물론 전달 방식은 다른 문제다. 무엇을 말할지와 어떻게 말할지는 구분된다. 사실을 전한다는 것이 배려 없이 던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예외에는 조건이 붙는다.
구급차가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구급차이기 때문이다. 아무 차나 급하다고 해서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다.
거짓말의 예외도 그렇다.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이유가 충분해야 한다. 불편해서, 곤란해서, 귀찮아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둘째, 바카라임을 져야 한다. 예외를 적용한 사람은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판단이 틀렸을 때 그것은 상황 탓이 아니라 자기 몫이다.
셋째, 나중에 진실을 밝힐 각오가 있어야 한다. 상황이 지나가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고 신뢰를 다시 쌓을 준비 말이다.
이 조건들이 없으면 예외는 그냥 편의가 된다.
그리고 여기가 실제로 위험한 지점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거짓말에 좋은 이유를 붙일 수 있다. 상대를 배려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지금은 때가 아니어서.
이 이유들이 전부 거짓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진짜 예외인지 아니면 편한 쪽을 택한 것인지는 본인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구분하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나는 시점을 옮겨보는 것이다.
이 거짓말이 나중에 밝혀졌을 때 상대가 뭐라고 할지 생각해보면 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할 것 같으면 예외에 가깝다.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할 것 같으면 아니다.
다른 하나는 누구를 보호하는지 묻는 것이다. 이 거짓말로 위험을 피하는 사람이 상대인가 나인가. 답이 나라면 그것은 예외가 아니다.
물론 이런 점검을 급박한 상황에서 할 수는 없다. 다만 대부분의 거짓말은 급박한 상황에서 나오지 않는다. 생각할 시간이 있는데도 하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이 말에는 이미 판정이 들어 있다. 선의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정당화된다. 그래서 이 표현을 쓰면 검토가 끝난다.
그런데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는 따져볼 만하다.
상처받을까 봐 말하지 않았다고 할 때, 상대가 상처받는 것이 힘든지 아니면 그 장면을 마주하는 내가 힘든지. 이 둘은 다르다.
수치심 때문에 하는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배려하는 형태를 띠지만 실제로는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문제인 경우가 많다.
칸트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가, 아니면 상대의 반응을 관리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대개 답이 후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상대를 위해 진실을 감춘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판단을 내가 내려도 되는가. 상대는 자기 삶에 대한 정보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감당할지 말지는 그 사람이 결정할 문제다.
물론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점이 있고 그럴 때는 미루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다만 미루는 것과 감추는 것은 다르다. 미루는 사람은 언제 말할지를 생각하고 있고 감추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결국 남는 것은 이런 그림이다.
칸트의 결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외 없는 정직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정확했다. 거짓말은 개인 간의 일로 끝나지 않고, 신뢰는 한 번 깨지면 되돌리기 어렵고, 상대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판단을 무력화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외는 있다. 다만 예외라는 것을 알고 써야 한다.
원칙이 흐려진 상태에서 예외를 쓰는 것과 원칙을 알면서 예외를 쓰는 것은 다르다. 앞의 경우 예외는 계속 늘어난다. 뒤의 경우 예외는 예외로 남는다.
이 차이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뒤가 다르다.
원칙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외를 쓴 뒤에 무언가가 남는다. 불편함이라고 해도 좋고 부채감이라고 해도 좋다. 그 감각이 다음번에 기준으로 작동한다.
원칙이 흐려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남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으니 다음번에도 아무렇지 않다.
문 앞에 경찰이 서 있는 상황은 사실 드물다. 대부분의 거짓말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은 자리에서 나온다. 조금 곤란해서, 설명하기 귀찮아서, 지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신뢰를 갉아먹는 것은 극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이 사소한 것들이다.
극적인 거짓말은 오히려 이해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고 넘어간다. 반복되지도 않는다.
사소한 거짓말은 다르다. 자주 하게 되고 별일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그것이 쌓이면 저 사람 말은 반쯤 걸러 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로.
칸트가 정말 경고하려 했던 것도 아마 문 앞의 경찰 쪽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날의 작은 거짓말들. 그것들이 쌓여서 어느 날 아무도 아무 말도 믿지 않게 되는 상태.
그런 자리에 도착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가 내놓은 답은 지나치게 엄격했지만, 그가 던진 질문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