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지도를 읽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눈은 지도를 한 번에 본다.
손은 한 번에 손바닥만큼만 본다.
그래서 촉지도를 읽을 때는 전체를 여러 번 훑고 그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이어 붙여야 한다.
로비에 서서 그 작업을 3분쯤 했다.
촉지도를 읽는 순서는 대체로 정해져 있다.
먼저 판 전체의 크기를 양손으로 재고
현재 위치 표시를 찾고
거기서부터 선을 따라간다.
돌출된 선은 복도이고 두꺼운 선은 벽이고
작은 사각형은 방이다.
방 옆에 점자로 이름이 붙어 있다.
이 판은 잘 만든 편이었다.
점자 간격이 적당했고 선의 높이 차이가 분명했다.
만든 사람이 신경을 썼다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현관이 여기고 계단이 이쪽이고 승강기가 저쪽이고
3층에 자료실이 있다.
그 3분은 헛수고였다.
3층에 자료실은 없었다.
2년 전 리모델링 때 5층으로 옮겼다고 했다.
이것은 설치되어 있고 통계에 잡혀 있으며 사실과 다른 어떤 지도에 관한 기록이다.
없는 것보다 나쁜 것
5층까지 올라가서 자료실을 찾는 데 20분쯤 걸렸다.
승강기 앞에서 지나가던 직원에게 물었고 그분이 데려다줬다.
그러니까 결국 도착은 했다.
그런데 그 20분 동안 나는 계속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손으로 읽은 정보가 틀렸다는 걸 알았을 때의 감각.
정보가 없으면 나는 처음부터 사람을 찾는다.
그건 익숙한 절차고 그 절차에는 실패가 없다.
정보가 틀리면 나는 그 정보를 믿고 움직인다.
그리고 틀렸다는 걸 알게 되는 지점은 언제나 목적지가 아니라 엉뚱한 곳이다.
접근성에서 잘못된 정보는 없는 정보보다 나쁘다.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고 틀리면 그 방법을 안 찾는다.
그리고 한 번 틀린 정보를 겪으면 그다음부터 그 종류를 안 믿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날 이후 촉지도를 잘 안 만진다.
어차피 사람에게 물어볼 거면 처음부터 물어보는 게 빠르니까.
이게 접근성 시설이 실패하는 조용한 방식이다.
부수거나 없애서가 아니라 신뢰를 잃어서 안 쓰이게 되는 것.
그리고 안 쓰이면 이용률이 낮게 나오고
이용률이 낮으면 확대할 근거가 약해진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촉지도를 다시 만져 봤다.
표면이 매끈했다. 손때가 없었다.
읽힌 흔적이 없는 판이었다.
아마 나 말고는 아무도 만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조차 오늘 처음 만졌다.
손때가 없다는 건 정보학에서 꽤 중요한 신호다.
도서관에서는 어떤 바카라이 얼마나 읽혔는지를 대출 기록으로 안다.
기록이 없으면 표지의 상태로 짐작한다.
많이 읽힌 바카라은 모서리가 닳아 있다.
촉지도에는 대출 기록이 없다.
그래서 손때가 유일한 이용 기록이다.
매끈한 촉지도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2년 동안 여기 있었고 아무도 나를 읽지 않았다.
이 건물은 촉지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건물의 촉지도는 2년째 틀린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몰랐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확인할 방법이 애초에 없었으니까.
혼자 하는 실태조사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나는 이상한 일을 했다.
집 근처에서 자주 다니는 경로에 있는 정보 제공 시설을 하나씩 확인해 봤다.
연구라고 하기엔 표본이 없고 그냥 짜증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먼저 음향신호기.
우리 동네 큰 사거리에 음향신호기가 넷 다 달려 있다.
설치는 완벽하다.
그중 하나가 꺼져 있었다.
버튼을 눌러도 소리가 안 났다.
나중에 알아보니 고장은 아니었다.
야간에 소음 민원이 들어와서 특정 시간대에 음량을 줄여 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건 나쁜 사람들이 한 일이 아니다.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도 진짜고 담당자는 두 요구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다만 그 결정 과정에 이 신호기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민원은 접수 창구가 있고 이 기기의 이용자는 접수 창구가 없다.
이 비대칭이 접근성 후퇴의 가장 흔한 경로다.
시설을 만들 때는 계획이 있고 예산이 있고 준공 보고가 있다.
시설을 줄일 때는 그런 게 없다.
음량을 낮추거나 작동 시간을 줄이거나 안내판 앞에 화분을 놓는 일에는
아무 절차도 필요하지 않다.
만드는 데는 몇 년이 걸리고 무력화하는 데는 하루가 걸린다.
그리고 무력화는 어느 통계에도 반영되지 않는다.
그다음은 버스 정류장.
도착 정보 안내기는 화면으로만 나온다.
음성 안내 버튼이 달린 정류장도 있는데 우리 동네에는 없다.
이건 그냥 없는 것이니 통계상으로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정직하다.
그다음은 승강기.
점자 버튼은 있다. 대체로 잘 되어 있다.
다만 점자가 버튼 위에 붙어 있는지 옆에 붙어 있는지가 건물마다 다르다.
위에 있으면 누르면서 읽히고 옆에 있으면 한 칸 어긋난 걸 누르게 된다.
문제는 음성 안내인데 어떤 승강기는 층수를 말하고 어떤 승강기는 안 말한다.
안 말하는 승강기에서는 문이 열리는 순간 여기가 몇 층인지 알 방법이 없다.
셋을 세어 봤다.
설치되어 있으나 작동하지 않는 것 하나.
설치되어 있으나 정보가 틀린 것 하나.
설치되어 있으나 기능이 반만 있는 것 하나.
셋 다 통계에는 설치로 잡힌다.
여기서 짚어 둘 게 있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종류의 실패다.
꺼진 것은 운영의 문제다. 켜면 된다.
틀린 것은 갱신의 문제다. 고쳐야 한다.
반만 있는 것은 기준의 문제다. 기준을 다시 써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통계는 이 셋을 구별하지 않는다.
전부 설치 완료 한 칸이다.
구별되지 않는 문제는 담당자가 정해지지 않는다.
담당자가 없으면 아무도 안 고친다.
접근성 시설의 상당수가 이 칸 안에서 조용히 늙어 가고 있다.
설치율이라는 지표
우리나라는 편의증진법을 중심으로 점자블록과 음향신호기와 점자안내판과 촉지도를 꾸준히 늘려 왔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많이 달라졌다.
그건 누가 뭐래도 성과다.
그리고 그 성과는 설치율로 관리된다.
몇 개소에 몇 개를 설치했는지.
설치율은 좋은 지표다.
명확하고 검증 가능하고 예산과 바로 연결된다.
다만 이 지표에는 한 가지 성질이 있다.
설치되는 순간 완료된다는 것.
그다음에 그 물건이 켜져 있는지 정확한지 실제로 쓰이는지는
그 지표가 다루는 범위 밖이다.
이 지표가 관리하는 건 사실 시설이 아니라 예산 집행이다.
얼마를 썼고 무엇을 샀는지.
접근성이 예산 집행의 언어로만 기록되면
그 시설의 수명은 준공일에서 끝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해 보고 싶다.
시각장애인이 음향신호기를 실제로 얼마나 쓰고 있는가.
촉지도가 공간을 이해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는가.
정보가 없어서 외출을 포기한 적이 1년에 몇 번 있는가.
제공되는 정보가 정확하다고 느끼는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전국 단위 통계를 나는 알지 못한다.
등록장애인 수는 안다. 장애 유형별 분포도 안다.
편의시설 설치 현황도 안다.
이용률과 만족도와 정보 부족으로 인한 이동 제약은 모른다.
정바카라학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 있다.
측정하지 않는 것은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하지 않는 것은 개선할 수 없다.
국가가 무엇을 측정하는가는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기는가의 목록이다.
그 목록에 없는 것은 평가되지 않고 예산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걸 증명할 방법도 사라진다.
지금 그 목록에는 물건이 있고 사람이 없다.
물건을 세는 게 쉬워서 그렇다.
개수는 논쟁이 없다. 세면 나온다.
사람의 경험은 세기 어렵다.
설문을 설계해야 하고 표본을 잡아야 하고 응답 방식도 접근 가능해야 한다.
시각장애인 대상 조사를 종이 설문지로 하면 그 조사부터가 실패다.
어렵다는 게 안 해도 되는 이유는 아니다.
다만 어렵기 때문에 늘 뒤로 밀린다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뒤로 밀리는 사이에
쉬운 지표가 정바카라의 언어를 다 차지한다.
이용 경험을 관리하는 나라들
다른 나라들은 이 부분을 좀 다르게 다룬다.
영국의 왕립시각장애인협회는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대중교통 이용 경험과 음성 안내 만족도와 이동 중 겪은 어려움과
독립적으로 이동할 수 있었는지를 정기적으로 조사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정부와 교통기관의 정바카라 개선에 쓴다.
이 조사에서 나오는 건 설치 현황이 아니다.
어떤 정보가 없어서 이동을 포기했는지
음성 안내가 실제 이동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어떤 환경에서 가장 불편했는지 같은 것들이다.
유럽연합은 접근성 데이터를 국가가 관리해야 할 정바카라 자원으로 본다.
점자블록이나 승강기가 있는지만 조사하는 게 아니라
실시간 접근성 정보와 음성 안내 제공 여부와 촉각 안내시설과
이용자의 접근 경험까지 표준화해서 쌓는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하나다.
얼마나 설치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쓰였고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본다.
정바카라의 중심에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조사에는 부수 효과도 있다.
정기적으로 이용 경험을 묻는다는 건
그 사람들에게 말할 자리가 정기적으로 생긴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구조에서 접근성 문제를 알리는 방법은 민원과 소송뿐이다.
둘 다 개인이 시간과 감정을 써야 하고 둘 다 대립 구도로 시작한다.
정기 조사는 그걸 일상적인 절차로 바꾼다.
싸우지 않고도 기록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는 것이다.
데이터는 있는데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관련 자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장애인 실태조사가 있고
교통약자 이동편의 실태조사가 있고
지자체별 접근성 조사가 있고
장애인단체와 연구기관의 이용 실태조사도 있다.
각각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것들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서로 다른 지표를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쳐서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조사는 시설을 세고 어느 조사는 만족도를 묻고
어느 조사는 지역 단위이고 어느 조사는 전국 단위다.
조사 시점도 주기도 다르다.
문헌정보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다룰 때 상호운용성이라는 말을 쓴다.
서로 다른 곳에서 만든 자료가 같은 기준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
메타데이터 표준이 왜 필요한지가 여기서 나온다.
자료를 많이 만드는 것과 그 자료들이 하나의 지식이 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지금 접근성 데이터는 앞쪽만 있다.
여러 곳에 쌓이는데 어디로도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다.
어떤 지자체가 촉지도를 100개 설치했다고 하자.
그 100개가 지금 정확한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치 시점의 자료는 시설 부서에 있고
그 건물의 리모델링 기록은 다른 부서에 있고
그 둘을 대조하는 절차는 어디에도 없다.
정보가 없는 게 아니다.
정보끼리 만나지 않을 뿐이다.
내가 오늘 겪은 3분의 헛수고는
사실 두 부서의 문서가 서로 만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그래서 데이터는 존재하지만 정바카라을 바꾸는 지식으로는 전환되지 않는다.
이건 행정 비효율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정보를 제공하는 정바카라과 그 정보가 실제로 쓰이는지 확인하는 정바카라이
아예 다른 체계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들고 나서 뒤를 안 보는 구조다.
그러면 2년 된 틀린 촉지도 같은 게 계속 생긴다.
고칠 수 있는 것
이 글을 쓰면서 그 건물에 전화를 했다.
촉지도가 실제와 다르다고 말했더니 담당자가 놀랐다.
정말 몰랐던 것 같았다.
바꾸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절차가 있어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건 이해한다.
그래서 이렇게 제안했다.
당장 판을 바꾸기 어려우면 촉지도 옆에 점자로 안내문 하나만 붙여 달라고.
자료실은 5층으로 이전했다는 한 줄.
그건 며칠 만에 됐다.
큰 개선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게 가능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이용자는 대체로 신고하지 않는다.
어디에 신고하는지 모르고
신고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그날 목적지에 가야 해서 그럴 시간이 없다.
그래서 접근성 시설의 오류는 대부분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이걸 이용자 바카라임으로 돌리는 논리가 가끔 나온다.
불편하면 말씀하시면 되는데 왜 안 하시냐는 것.
말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전화번호를 찾아야 하고 상황을 설명해야 하고
대체로 담당자가 아닌 사람에게 먼저 설명하게 되고
그 설명을 두세 번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통화 끝에 돌아오는 답이 검토하겠습니다이면
다음번에는 안 하게 된다.
신고를 이용자에게 맡기는 구조는
결국 가장 지친 사람이 가장 많은 일을 하게 만든다.
점검은 원래 만든 쪽의 일이다.
소화기도 승강기도 정기 점검을 한다.
접근성 시설만 유독 점검 주기가 없다.
시설을 만드는 예산은 있고
그 시설이 지금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예산은 없다.
그리고 확인하지 않으면 고장은 발견되지 않는다.
발견되지 않은 고장은 통계상 완벽한 시설이다.
제목: 촉지도의 아키텍처 혹은 설치되었으나 읽히지 않는 것들.
권리는 시설을 세우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경사로가 있고 촉지도가 있고 음향신호기가 있다는 사실은 출발점이지 결과가 아니다.
그것들이 켜져 있고 정확하고 실제로 쓰일 때 비로소 권리가 된다.
그리고 그 상태를 확인하려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봐야 한다.
정바카라은 설치한 점자블록의 개수를 기억할 게 아니라
그 점자블록 덕분에 혼자 등교하게 된 학생을 기억해야 한다.
음향신호기 설치율을 관리할 게 아니라
그 소리 덕분에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간 사람의 경험을 성과로 기록해야 한다.
측정의 대상이 시설에서 사람으로 옮겨 가면
비로소 무엇이 부족한지 어디가 심각한지 누구에게 도움이 되었는지가 보인다.
결론: 정보는 제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서비스가 아니다.
접근될 수 있어야 하고 활용될 수 있어야 하고
그 활용의 결과가 다시 정바카라으로 돌아올 때 권리가 된다.
내가 손으로 읽은 그 지도는 2년 동안 거기 있었다.
읽은 사람이 없어서 틀린 줄도 몰랐다.
접근성 시설이 읽히지 않는다는 건 실패의 신호다.
그런데 지금 우리 통계에서 그건 성공으로 잡힌다.
그나저나 그 건물에 다시 갈 일이 있었다.
점자 안내문이 촉지도 옆에 잘 붙어 있었다.
손끝으로 읽으면서 조금 웃었다.
한 줄짜리 스티커가 3분의 헛수고를 없애는 데 걸린 시간이 2년이었다.
탱고는 그날 승강기 앞에서 5층 버튼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보보가 말했다.
저 녀석은 한 번 간 곳을 잊지 않는다.
개는 업데이트가 빠른데 우리 촉지도는 아직 그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