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향수는 노트 목록만 봐도 의심이 든다.
바다. 소금. 회향. 사과꽃. 오스만투스. 볶은 커피 원두. 볶은 참깨.
앞의 넷까지는 이해가 된다. 해변과 꽃이라면 흔한 조합이다. 그런데 뒤의 셋이 문제다. 커피와 참깨가 왜 바다 옆에 서 있는가. 이 목록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오타를 의심했다. 서지 데이터를 다루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다. 분명 같은 레코드 안에 있는데 하나가 명백히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것처럼 보일 때.
그런데 이 향수는 오타가 아니었다. 완성까지 9년이 걸린 의도적인 배치였다.
출발점은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이다. 딥티크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몽타드르 고트로가 노르망디의 바르플뢰르라는 작은 어촌에서 보낸 시간.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바다가 있고 사과나무 과수원이 있고 그 근처에 커피 로스터가 있었다.
그것이 전부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극적인 서사도 없다. 다만 그 세 가지 냄새가 같은 공기 안에 있었다.
"기억은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다와 커피가 왜 같이 있냐고 물으시면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때 그 자리에 둘 다 있었을 뿐이에요."
이 대답을 듣고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가 이 향수의 노트 목록을 의심했던 이유는 그것이 분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양 계열이면 해양답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전제. 그런데 실제 경험은 그렇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계열별로 냄새를 맡지 않는다.
9년이라는 기간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향수 하나를 만드는 데 보통 몇 달에서 길어야 이삼 년이 걸린다. 9년은 예외적으로 길다. 그동안 여러 차례 시도가 무산됐다고 한다. 기억은 분명한데 그것을 향으로 옮기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돌파구는 뜻밖의 곳에서 왔다. 사진이었다. 테리 바이펜바흐라는 미국 사진가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발견되면서 접근 방식이 바뀌었다. 이 사진가는 자연의 단편을 초점이 흐릿한 방식으로 찍는 사람이다. 전체를 선명하게 담지 않고 일부만 또렷하게 남긴다.
기억을 재현하려 하지 말고 기억이 남는 방식 자체를 재현하자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셈이다. 이 전환이 없었다면 이 향수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조향사는 파브리스 펠레그랭. 그가 이 향수에서 택한 방식이 흥미롭다. 탑과 미들과 베이스로 내려가는 고전적 피라미드 구조를 쓰지 않고 후각적 풍경이라는 개념을 세웠다. 시간 순서가 아니라 거리 순서로 배치한 것이다.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
이 설계가 이 향수를 이해하는 열쇠다. 플로라벨리오에서는 노트가 차례로 등장했다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기에 있고 다만 초점이 옮겨 다닌다. 사진의 심도를 조절하는 것과 비슷하다.
첫 분무에서 소금기가 정면으로 온다. 뜨겁고 습한 열대의 바다가 아니라 서늘한 북쪽 바다다. 수온이 낮고 바람이 강한 해안. 여기에 회향이 섞이면서 풀의 쌉싸름함이 소금에 각을 세운다. 회향은 갯가에서 자라는 종류를 쓴다. 바위틈에 붙어 자라며 바닷물을 견디는 식물이다.
이 오프닝은 상당히 강하다. 확 치고 들어온다. 리뷰어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물어뜯는다는 말인데 과장이 아니다. 부드럽게 인사하고 들어오는 향수가 아니라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밀려드는 쪽에 가깝다. 바닷가에 서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파도 소리보다 먼저 오는 것이 바람이고 그 바람에 이미 소금이 섞여 있다.
중반부에서 사과꽃과 오스만투스가 올라온다. 사과꽃은 향료로 추출되지 않는 꽃이다. 라 튤립을 다룰 때 튤립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도 조향사가 상상으로 빚어야 하는 대상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사과꽃은 달지 않다. 과수원의 열매가 아니라 아직 열매가 되지 않은 상태의 냄새다. 오스만투스가 살구 같은 단내를 아주 옅게 얹으면서 그 밋밋함을 채운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다. 펠레그랭은 사과꽃에 명확한 역할을 부여했다. 안쪽 세계와 바깥 세계를 잇는 다리. 커피와 참깨가 집 안의 냄새라면 바다는 집 밖의 냄새이고 사과꽃은 그 사이 마당쯤에 있다.
이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실내와 실외를 냄새로 구분하고 그 경계에 꽃을 세운다는 발상. 실제로 집을 나설 때 우리가 겪는 것도 그런 전환이다. 문을 열면 안의 공기가 바깥 공기와 잠깐 섞이는 구간이 있다.
베이스에서 볶은 커피와 볶은 참깨가 나온다. 그리고 여기가 이 향수에서 가장 말이 많은 지점이다.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린다. 어떤 사람은 이 조합이 향수 전체를 망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 때문에 이 향수가 기억된다고 한다. 어떤 리뷰어는 바다 냄새와 커피 냄새가 번갈아 다가왔다 물러나는 통에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었다고 썼다.
나는 후자 쪽이다. 정확히는 그 불편함이 이 향수의 정직함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향수가 바다와 꽃만으로 구성됐다면 훨씬 편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훨씬 빨리 잊혔을 것이다. 커피와 참깨는 이 풍경이 그림엽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실제 기억이라는 증거다. 사람의 기억에는 늘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씩 섞여 있다. 그것이 빠지면 기억이 아니라 이미지가 된다.
기록을 다루면서 자주 마주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료를 정리하다 보면 분류에 들어맞지 않는 항목이 나온다. 버릴 것인가 남길 것인가. 대개 버리는 쪽이 깔끔하다. 그런데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 이상한 항목 하나가 그 자료 전체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경우가 있다. 예외는 오류가 아니라 정보다.
"저를 좋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다른 것과 헷갈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맞는 말이다. 이 향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향수를 잊지는 못한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이 향수는 현재 단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리뷰어가 시향해 보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며 그때 맡아 본 것이 특권이었다고 적은 글을 봤다.
이 대목에서 직업병이 또 도졌다. 향수는 사라지면 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창작물이다. 배합표가 남아 있어도 재료가 그때와 같지 않고 규제가 바뀌었을 수 있고 원산지 상황도 달라진다. 악보가 남으면 다시 연주할 수 있는 음악과 다르다. 향수는 재연이 아니라 재생산이어야 하는데 그 조건이 유지되지 않는다.
9년을 들여 만든 것이 몇 년 팔리다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그것을 맡아 본 사람들의 기록뿐이다. 기억을 담으려던 향수가 결국 기억으로만 남게 되는 셈이다.
온도에서 이 향수를 뿌리고 앉아 있던 날 재석 씨가 원두를 갈았다. 그라인더가 돌아가는 동안 손목에서 올라오는 커피와 실제 커피가 겹쳤다. 아주 잠깐 어느 쪽이 손목이고 어느 쪽이 방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향수의 커피는 진짜 커피보다 건조했다. 볶은 원두 자체의 냄새이지 추출한 커피의 냄새가 아니다. 물을 만나기 전의 상태. 참깨도 마찬가지다. 기름을 짜기 전의 볶은 씨앗이다. 둘 다 완성되기 직전에서 멈춰 있다.
이 향수 전체가 그렇다. 사과는 꽃일 때 멈춰 있고 커피는 원두일 때 멈춰 있고 바다는 물이 아니라 공기로만 있다. 아무것도 최종 형태에 도달하지 않는다. 기억이 대개 그런 식으로 남는다. 완성된 장면이 아니라 완성되기 직전의 조각으로.
여름 끝자락에 어울리는 향수라고 생각한다. 아직 덥지만 바람에 다른 것이 섞이기 시작하는 시기.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고 완전히 남아 있지도 않은 계절. 플로라벨리오는 그런 어중간한 자리에서 가장 잘 읽힌다. 정리되지 않은 계절에 정리되지 않은 향을 얹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