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이 갈등에서 찾아낸 것
명절 밥상에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공기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다. 누가 한마디 하고 다른 사람이 다른 의견을 낸다. 그런데 몇 번 오가다 보면 목소리가 커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각자 자기 문장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부부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시작은 사소했는데 어느새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 결국 누군가 자리를 뜨거나 문이 쾅 닫힌다.
이런 싸움의 특징이 있다. 끝나고 나면 양쪽 다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이긴 사람도 없다.
며칠 뒤에 생각해보면 더 이상하다. 그 주제가 그렇게까지 중요했던 것도 아니다. 서로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격해졌다.
왜 이렇게 되는가.
원인이 논리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싸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이 걸려 있다. 물러서면 진다는 감각이다.
여기서 말을 물리면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볼 것 같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다 틀린 것이 되어버릴 것 같다. 그러면 나라는 사람 전체가 조금 작아지는 것 같다.
그래서 계속 밀어붙인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주장까지 하게 된다. 물러설 수 없으니 앞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싸움이 끝난 뒤 자기가 한 말을 떠올리면서 내가 왜 저런 말까지 했지 하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을.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다. 지고 싶지 않아서 나온 말이었다.
이렇게 되면 양쪽 다 손해다. 상대는 상처를 받았고 나는 원치 않던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부부 싸움이 유난히 진흙탕이 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이기려는 마음이 강할수록 둘 다 지는 구조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 구조에는 고약한 성질이 하나 더 있다. 멀리 갈수록 돌아오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러서기가 쉽다. 별말 안 했으니까. 그런데 심한 말이 오가고 나면 물러서는 데 드는 비용이 커진다. 지금 물러서면 방금 한 말들이 전부 근거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밀어붙인다. 이미 지불한 것이 아까워서 더 지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그러다 보면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지나간다.
헤겔은 전혀 다른 질문에서 출발했다.
그의 관심은 왜 인류의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가에 있었다. 그는 인류사를 성장의 기록으로 읽었다. 어두운 시기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의식과 이해가 넓어져왔다고 봤다.
그는 이렇게 점점 각성해가는 인간의 보편적 정신에 세계정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개인의 정신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관통하며 움직이는 어떤 흐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궁금해했다. 왜 뒤로 가지 않는가. 왜 원시적인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이 흥미롭다.
갈등이었다.
정확히는 갈등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이었다.
갈등이 발전의 원인이라는 발상 자체가 낯설다. 우리는 보통 갈등을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평화로울수록 좋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헤겔은 반대로 봤다. 갈등이 없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겔이 제시한 구조는 이렇다.
역사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잡는다. 지배적인 사상일 수도 있고 제도일 수도 있고 기술일 수도 있다. 이것을 테제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에 반대하는 것이 등장한다. 안티테제다.
그러면 충돌이 일어난다. 논쟁이 벌어지거나 갈등이 생기거나 심하면 전쟁이 난다.
여기까지는 흔한 이야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부분의 경우 한쪽이 이긴다. 이기면 어떻게 되는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쪽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것을 발전이라고 보지 않았다.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여전히 하나의 입장이다. 그 입장에도 한계가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또 반대가 나타난다. 그리고 같은 싸움이 반복된다.
이긴 쪽도 진 쪽도 결국 제자리다.
발전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경우다.
이 지적이 날카로운 이유가 있다. 우리는 보통 갈등이 해결됐다고 말할 때 한쪽이 이긴 상태를 뜻한다. 논쟁이 정리됐고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중단이다. 진 쪽의 입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눌려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눌린 것은 언젠가 다시 올라온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갈등들을 보면 이 말이 실감 난다. 끝난 줄 알았던 문제가 몇십 년 뒤 다시 나타난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 뿌리는 같다. 한쪽을 눌러서 끝냈기 때문이다.
헤겔이 주목한 것은 세 번째 길이었다.
양쪽이 부딪힌 뒤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둘을 다 품는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경우. 이것을 진테제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합이라고 옮긴다.
여기서 오해가 잦다. 합이라고 하면 두 개를 섞은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헤겔이 말한 합은 섞는 것이 아니다. 두 입장이 왜 부딪혔는지를 이해한 뒤에 그 부딪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자리로 옮겨가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 과정에 그는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지양이라는 말이다. 독일어로는 아우프헤벤이다.
이 단어를 그가 좋아한 이유가 있다. 독일어에서 이 말에 세 가지 뜻이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끝낸다는 뜻이다. 갈등이 종료된다.
둘째, 보존한다는 뜻이다. 싸우던 양쪽의 입장이 버려지지 않고 남는다.
셋째, 높인다는 뜻이다. 두 입장이 더 높은 자리에서 통합된다.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지양이다. 끝나는데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올라간다.
한 단어에 이렇게 상반된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끝낸다는 것과 보존한다는 것은 보통 반대말이다. 그런데 독일어의 이 단어는 둘을 함께 담고 있고, 헤겔은 거기서 자기 사유의 핵심을 발견했다.
우리말 지양도 비슷한 사정이 있다. 그칠 지에 오를 양이다. 멈추면서 오른다는 뜻이 글자에 그대로 들어 있다. 일상에서는 하지 말자는 뜻으로 쓰이지만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헤겔은 역사의 모든 진보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봤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지양은 타협이 아니다.
타협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물러서고 너도 그만큼 물러서자. 결과적으로 양쪽 다 원래 원하던 것의 절반쯤을 갖는다.
이건 나쁘지 않지만 발전은 아니다. 양쪽 다 조금씩 잃었을 뿐 새로운 것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잃었다는 감각이 남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문제가 된다.
지양은 다르다. 양쪽의 입장이 살아남는다. 잃는 것이 없다. 다만 그것들이 놓이는 자리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은 저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지금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타협하면 반씩 하기로 한다. 각자 원하는 것의 절반씩만 얻는다.
지양은 다른 질문에서 시작한다. 왜 저축이 중요한가. 왜 지금 쓰는 것이 중요한가. 물어보니 한쪽은 불안 때문이고 다른 쪽은 지금 이 시기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문제가 달라진다. 불안을 줄이면서 지금을 놓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절반씩 나누는 것과 다르다.
두 입장이 다 살아 있고 더 높은 자리에서 만난 것이다.
이 차이가 실제로 무엇을 바꾸는가.
타협에서는 각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놓고 협상한다. 요구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래서 협상력이 중요해진다. 더 세게 버티는 쪽이 더 가져간다.
지양에서는 각자가 왜 그것을 원하는지를 먼저 본다. 요구 뒤에 있는 이유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면 대개 요구는 달라도 이유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부부가 여행지를 놓고 다툰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바다에 가고 싶고 다른 사람은 산에 가고 싶다. 타협하면 반은 바다 반은 산으로 간다. 이동에 시간을 다 쓰고 둘 다 만족하지 못한다.
이유를 물어보면 다를 수 있다. 한쪽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 싶었고 다른 쪽은 사람이 없는 곳에 가고 싶었다. 그러면 조용한 바닷가라는 답이 나온다. 절반씩이 아니라 둘 다다.
물론 이유까지 내려가도 정말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타협해야 한다. 다만 그 전에 확인은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핵심은 상대의 입장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싸울 때 우리는 상대를 틀렸다고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야 내가 이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양의 관점에서 보면 상대의 입장은 제거 대상이 아니다. 재료다. 그 입장 안에 내가 못 본 것이 들어 있고, 그것을 포함해야 더 나은 것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물러서는 일에 대한 감각도 달라진다.
물러서는 것이 지는 것이 되려면 이 싸움이 승패를 가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목표가 더 나은 답을 찾는 것이라면 물러서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더 나은 답에 도달하면 양쪽 다 이긴다. 각자 혼자서는 도달하지 못했을 자리에 함께 갔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 느낌을 기억할 것이다. 한참 부딪히다가 어느 순간 둘 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나오는 순간. 그러면 방금 전까지 다투던 것이 갑자기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 순간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있어야 나온다. 같은 곳을 보는 사람끼리는 새로운 것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헤겔의 관점에서 보면 의견이 다른 사람의 존재는 불행이 아니다. 조건이다.
다만 여기에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헤겔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비판이 있었다. 인류사를 진보의 기록으로 읽는 관점 자체가 낙관적이라는 지적이다.
20세기에 벌어진 일들을 겪은 뒤에는 이 낙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역사가 언제나 더 높은 곳으로 간다는 보장은 없다. 후퇴하는 시기가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상실도 있다.
그리고 진보라는 말 자체가 누구의 기준인가라는 문제도 있다. 어떤 이에게 진보였던 것이 다른 이에게는 파괴였던 사례가 역사에 많다.
그러니 헤겔의 큰 그림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갈등에 대해 관찰한 부분은 여전히 유용하다. 충돌이 반드시 승패로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승패로 끝나면 문제가 반복된다는 것.
이건 역사 전체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갈등이라는 구조에 대한 관찰이다. 그리고 이 관찰은 훨씬 작은 규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큰 이론에서 쓸 만한 부분만 떼어내 쓰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헤겔 본인은 이 구조를 세계정신이라는 거대한 그림 안에 놓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통찰은 그것을 낳은 체계보다 오래 산다. 체계가 무너져도 관찰은 남는 경우가 있다. 갈등에 대한 그의 관찰이 그런 종류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관찰은 검증하기 쉽다. 자기 경험에 대보면 된다. 이겨서 끝낸 싸움과 함께 답을 찾은 싸움 중 어느 쪽이 다시 돌아왔는지.
다시 명절 밥상으로 돌아가보자.
거기서 지양이 일어나는 일은 사실 흔치 않다. 대부분은 누군가 화를 내거나 누군가 참으면서 끝난다.
왜 어려운가.
첫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지양에는 상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싸움은 대개 빠르게 진행된다. 감정이 올라오는 속도가 이해가 쌓이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둘째, 상대의 입장을 재료로 보려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신뢰해야 한다. 저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저러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미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는 이 전제가 서지 않는다.
셋째,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이기고 싶기 때문이다. 더 나은 답보다 내가 옳았다는 확인이 급할 때가 있다.
그래서 지양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기로 마음먹어야 일어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한 사람만 시작해도 된다는 점이다. 양쪽이 동시에 결심할 필요가 없다.
싸움이 격해지는 것은 서로 주고받기 때문이다. 한쪽이 세게 나오면 다른 쪽도 세게 나온다. 그런데 한쪽이 질문으로 바꾸면 흐름이 끊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으면 상대는 대답을 해야 하고, 대답을 하려면 자기 이유를 정리해야 한다.
그 순간 대화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 물론 항상 통하지는 않는다. 다만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성공률이 높다.
헤겔이 남긴 문장 중에 이런 취지의 이야기가 있다.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발전의 기회가 없다.
이 말이 겨냥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고집을 부리면 상대가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울 기회를 잃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갈등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방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못 본 것을 가진 사람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 옳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 사람 자리에서는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이길 것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무엇을 보고 저렇게 말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싸움의 성격이 바뀐다. 승패를 가리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자리로. 그리고 이 전환은 상대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갈등이 이렇게 풀리지는 않는다.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도 있고 물러서면 안 되는 문제도 있다.
누군가 명백히 부당한 것을 요구할 때 그것과 절충하는 것은 지양이 아니다. 그저 양보일 뿐이다. 헤겔이 말한 것은 두 입장이 각각 나름의 근거를 가질 때의 이야기다.
그러니 먼저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근거를 가진 두 입장의 충돌인가, 아니면 한쪽이 그냥 부당한 상황인가.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합을 찾으려 하면 손해를 보는 쪽이 계속 손해를 보게 된다.
다만 대부분의 일상적인 다툼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이겨야 할 이유가 없는 싸움을 이기려다 둘 다 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싸움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헤겔은 200년 전에 이미 적어두었다.
이기지 말고 올라가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