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넘어져 본 적이 있다.
여러 번 있지만 가장 오래 남은 건 반월당 지하상가에서였다.
2년쯤 전이다.
공사 중이라 평소 다니던 동선이 막혀 있었고 안내 표시는 당연히 시각 정보였다.
지하상가는 소리로 읽기 좋은 곳이다.
천장이 낮아서 반사음이 촘촘하고 가게마다 트는 음악이 달라서 위치를 알기 쉽다.
나는 그 구간을 수십 번 다녔고 어느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야 하는지도 몸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음악이 없었다.
공사 때문에 몇 집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지형이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
탱고가 멈춰 섰고 나는 왜 멈췄는지 몰라 반 발짝 더 나갔다.
발밑에 있던 낮은 턱에 걸렸다.
넘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쯤이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에 걸린 시간이 훨씬 길었다.
이것은 넘어지는 일보다 일으켜지는 일이 더 오래 걸린다는 사실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왜 개인의 부주의로 기록되어서는 안 되는지에 관한 기록이다.
4분
비장애인이 길에서 넘어지면 대략 3초 안에 상황이 끝난다.
넘어지고 툭툭 털고 일어난다.
민망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나는 그날 4분쯤 걸렸다.
먼저 사람들이 몰려온다.
"괜찮으세요?"
동시에 세 명이 물으면 대답할 수가 없다. 누구에게 답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다음 손이 온다.
양쪽 팔을 누가 잡는다.
어디를 잡을지 물어보지 않는다. 급하니까.
나는 그 손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니까 몸이 저절로 굳는다.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긴다.
몸이 굳으면 일으켜 세우기가 더 어려워지고
어려워지면 사람들이 더 세게 잡는다.
더 세게 잡히면 몸은 더 굳는다.
탱고가 그 사이에서 짖었다.
탱고가 짖는 걸 나는 거의 못 봤다.
사람이 개를 밟을 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방을 찾는 데 1분이 더 걸렸다.
휴대폰이 어디로 튀었는지 몰라서였다.
누가 주워 줬는데 그 사람이 내 손에 쥐여 줄 때까지 나는 그게 내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 4분 동안 나는 넘어진 사람이었다가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었다가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었다가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이 됐다.
몸의 통증은 사실 별것 아니었다.
무릎이 좀 까진 정도였다.
그날 저녁에 보보에게 말했다.
"창피한 게 아니라 좀 무서웠어."
보보가 물었다. 뭐가.
"내 몸이 잠깐 내 것이 아니었어."
이 문장을 설명하는 데 나는 꽤 오래 걸렸다.
넘어진 순간이 무서운 게 아니다.
넘어진 뒤에 내가 어떻게 다루어질지를 내가 정할 수 없는 시간이 무섭다.
어느 팔을 잡힐지 어느 방향으로 세워질지 언제 놓아질지를 나는 모른다.
알려 주는 사람도 없다. 다들 급하니까.
그건 악의가 아니다.
사람들은 정말 도우려고 그런다.
다만 도움은 대체로 이렇게 온다.
설명 없이 그리고 아주 빠르게.
빠른 도움은 효율적이지만 그 안에서 도움받는 사람은 잠깐 물건이 된다.
들어 올려지고 옮겨지고 세워진다.
그 사이에 아무도 묻지 않는다. 어디를 잡을까요.
나중에 알았는데 이건 낙상 그 자체보다 오래 남는다.
무릎의 상처는 일주일이면 낫고
그 4분의 감각은 2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나갈 때 되살아난다.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지난 8월 한 유튜버가 KTX에서 하차하다 넘어졌다.
전신마비 장애가 있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하차용 경사로를 내려오던 중 바퀴가 슬롯복무요원의 발에 걸리면서 앞으로 튕겨 나갔다고 한다.
그는 그 CCTV 영상을 자신의 채널에 공개했다.
그리고 논란이 커지자 같은 날 영상을 내리고 사과문을 올렸다.
현장에서 도와준 근무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에도 논쟁은 이어졌다.
영상 공개가 과했다는 쪽과 사고 위험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는 쪽이 갈렸고
영상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확보했느냐는 문제 제기도 나왔다.
나는 그 논쟁을 며칠 동안 들었다.
그리고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이 대화에 등장하는 사람이 두 명뿐이다.
넘어진 사람과 발을 올려놓았던 사람.
경사로를 만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논쟁의 어느 쪽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경사로는 왜 사람이 발로 눌러야 고정되는가.
그 발판은 언제 설치됐고 몇 년째 쓰고 있으며 마지막 점검은 언제였는가.
승하차 지원 인력은 어떤 교육을 몇 시간 받는가.
그 교육에 이 상황이 들어 있는가.
이 질문들은 지루하다.
조회수가 안 나온다.
그래서 논쟁은 늘 사람 쪽으로 흐른다.
질문의 방향
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질문을 한다.
문제는 그 질문이 어디를 향하느냐다.
왜 앞으로 내려왔나.
왜 안전벨트를 안 했나.
왜 300번 잘하다 한 번 실수한 사람을 탓하나.
이 세 질문의 공통점이 있다.
전부 사람에게 묻고 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보자.
휠체어로 경사로를 내려올 때 앞으로 내려오느냐 뒤로 내려오느냐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경사가 완만하고 앞에 장애물이 없으면 앞으로 내려오는 게 자연스럽다.
무조건 뒤로 내려와야 한다는 규칙이 생기면 그건 안전이 아니라 통제다.
어느 방향으로 내려와도 안 넘어지게 만드는 게 설계고
한 방향으로만 내려오라고 하는 건 설계 실패를 이용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이런 규칙은 사고 뒤에 아주 빠르게 생긴다.
그리고 대체로 이용자를 향한다.
앞으로 내려오지 마세요. 반드시 직원 동행하에 이용하세요. 사전에 연락 주세요.
그렇게 규칙이 하나씩 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이동수단을 쓰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이 늘어난다.
조건이 늘면 이용은 줄고 이용이 줄면 개선 요구도 줄어든다.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붙는 규칙의 상당수는
실제로는 이용자를 줄여서 사고 건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고율은 개선되고 아무도 그 이동수단을 안 쓰게 된다.
두 번째 질문은 더 위험하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상황에서 몸이 휠체어에 묶여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휠체어 무게가 그대로 몸 위로 실린다.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부상이 덜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
안전벨트는 원래 다른 상황을 위한 장치다.
그걸 모든 사고에 적용하면 안전이 아니라 부적을 차게 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휠체어 이용자에게 안전벨트를 매고 다니라고 요구하는 건
그 사람이 자기 몸을 항상 고정된 상태로 두라는 뜻이기도 하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자세를 바꾼다.
그게 안전의 일부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선택지 자체를 미리 반납하라고 요구하면서
그걸 안전이라고 부른다.
세 번째 질문은 통계의 문제다.
300번 안전했고 1번 사고가 났다.
99.7퍼센트다. 훌륭한 숫자다.
그런데 그 1번을 겪는 사람에게 그 사고는 100퍼센트다.
확률은 시스템의 언어이고 몸은 확률로 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계산에는 빠진 게 있다.
비장애인이 넘어지는 것과 이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같은 사건 하나로 세면 안 된다.
전신마비가 있으면 손을 뻗어 몸을 받치는 반사 자체가 제한된다.
넘어진 뒤 스스로 일어날 수도 없다.
그 뒤에 오는 것이 아까 내가 말한 4분이다.
같은 낙상이 아니다.
그런데 사고 통계에서는 낙상 1건으로 똑같이 기록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비장애인은 넘어진 다음에 다시 그 길을 걷는다.
장애인은 넘어진 다음에 그 이동수단 자체를 다시 탈지 말지를 고민하게 된다.
한 번 그런 일을 겪으면 다음에 기차표를 예매할 때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리고 몇 번 반복되면 그냥 안 가게 된다.
이건 겁이 많아서가 아니다. 대체 경로가 없어서다.
비장애인에게 낙상은 사건이고
어떤 사람에게 낙상은 이동수단 하나가 목록에서 지워지는 일이다.
그래서 그 1번이 300번을 무효로 만들 수 있다.
확률로 계산하면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인데 삶으로 계산하면 당연한 대목이다.
마주 세워진 두 사람
이 사건에서 가장 마음이 불편했던 건 다른 부분이었다.
슬롯복무요원 이야기다.
그 사람은 20대이고 배치받아 온 사람이고 아마 며칠짜리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휠체어 경사로를 어떻게 고정하는지
고정할 때 발을 어디에 두면 안 되는지
그런 걸 얼마나 배웠을지 나는 모른다.
발을 경사로 위에 올려놓은 건 경사로가 움직일까 봐 그랬을 것이다.
즉 도우려던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동작이 사고가 됐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는 도움을 받으려던 사람과 도우려던 사람이 있었고
둘 다 다쳤다.
한 명은 몸을 다쳤고 한 명은 다른 걸 다쳤다.
여기서 구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인다.
구조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두 개인에게 맡기고
일이 잘못되면 그 두 개인을 마주 세운다.
경사로 고정이 사람 발로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이 정상인가.
그 장비는 발로 눌러야 안 움직이는 물건인가.
그렇다면 그건 장비 문제다.
발을 안 올려도 고정되는 구조를 만들면 이 사고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우리는 그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며칠 동안 이야기했다.
보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 다 수단이 된 거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장애인은 사고 사례가 되고 그 청년은 과실 사례가 되잖아. 둘 다 시스템 개선의 재료로만 쓰이고 있어. 그런데 원래 개선해야 할 쪽은 재료가 아니라 주체여야 하잖아."
그 말이 정확했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이런 구조에서는 도우려는 사람도 결국 지친다는 것.
승하차 지원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매뉴얼은 얇거나 없고 교육은 짧고 장비는 오래됐고
그런데 사고가 나면 이름이 남는 건 자기다.
그러면 그다음부터 무엇을 하게 될까.
안 하게 된다.
조심스러워지고 소극적이 되고 가능하면 그 일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소극성은 나중에 이런 문장으로 나타난다.
죄송한데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안전 문제가 있어서요.
지원하는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구조는 결국 지원받는 사람도 배제한다.
이 둘은 같은 문제의 앞면과 뒷면이다.
영상이라는 문제
영상 공개가 적절했느냐는 질문은 남는다.
나는 그 판단을 여기서 하고 싶지 않다.
본인이 이미 내렸고 사과했으니 그건 그 사람의 몫으로 끝난 일이다.
다만 왜 영상이었을까는 생각해 볼 만하다.
장애인이 겪은 일을 말로 설명하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이 온다.
과장 아니냐.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
이건 앞에서 말한 문제와 이어져 있다.
넘어지는 일 자체는 누구나 겪는다.
그래서 넘어졌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넘어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건 3초짜리 기억이다.
4분은 설명하기 어렵다.
몸이 잠깐 자기 것이 아니게 되는 감각은 더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영상은 설명이 계속 실패해 온 자리에서 나온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와 별개로
말로는 전달이 안 된다는 판단 자체는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건 우리 슬롯가 그동안 그 말을 얼마나 안 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동시에 이 방식에는 대가가 따른다.
증거를 내놓아야 믿어 주는 구조에서는
증거에 찍힌 사람이 반드시 생긴다.
이번에는 그게 20대 슬롯복무요원이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는 자기 입장을 설명할 채널이 없었다.
100만 명이 보는 채널과 아무 채널도 없는 사람이 같은 화면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에는 두 종류의 비대칭이 겹쳐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비대칭.
발언권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의 비대칭.
이 두 비대칭이 하필 서로 반대 방향이었다.
그래서 논쟁이 그렇게 꼬였던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누가 옳았느냐가 아니다.
이 두 비대칭을 다 만들어 놓은 쪽이 따로 있는데
그쪽은 이 논쟁에서 한 번도 호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목: 경사로의 아키텍처 혹은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사고가 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람을 본다.
누가 부주의했는지 누가 실수했는지 누가 더 잘못했는지.
그 습관은 편하다.
사람은 사과할 수 있고 처벌할 수 있고 교육할 수 있으니까.
구조는 사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구조 대신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사람을 찾아서 끝내면 같은 사고가 다시 난다.
그 슬롯복무요원이 다음 달에 소집 해제되고 새 사람이 오면
그 사람은 또 발로 경사로를 누를 것이다.
그렇게 배웠을 테니까. 아니 배운 적이 없을 테니까.
사고 조사에서 가장 흔한 함정이 근접 원인만 보는 것이다.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일 가장 눈에 띄는 동작.
발이 거기 있었다. 그래서 걸렸다. 원인 규명 끝.
그런데 안전공학에서는 그 뒤를 묻는다.
왜 그 발이 거기 있어야 했는가.
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조건이 무엇인가.
그 조건을 만든 결정은 언제 누가 했는가.
질문을 뒤로 밀수록 개인의 이름은 사라지고 결정이 남는다.
그리고 결정은 바꿀 수 있다.
개인의 부주의는 바꿀 수 없다. 사람은 계속 바뀌니까.
이동은 권리다.
그런데 권리는 도착으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도착했는가까지 포함해야 한다.
넘어지지 않고 내렸는가. 남의 손에 들려 일으켜지지 않았는가.
그 4분을 겪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4분을 겪었을 때 그것이 나의 부주의가 아니라
누군가의 설계 결정으로 기록되는가까지 포함해야 한다.
기록되는 방식이 다음 사고를 결정한다.
개인의 실수로 기록되면 그 개인을 교육하고 끝난다.
설계의 결함으로 기록되면 그 설계를 고치게 된다.
같은 사고인데 어디에 적히느냐에 따라 다음이 달라진다.
결론: 존엄한 이동이란 안 다치고 도착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넘어졌을 때 내 몸이 여전히 내 것으로 남아 있는 것까지를 뜻한다.
그리고 그건 개인의 조심성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발을 올리지 않아도 고정되는 경사로에서 만들어진다.
그나저나 그날 반월당에서 넘어진 뒤로 탱고는 그 구간을 지날 때 유난히 느리게 걷는다.
공사는 진작에 끝났고 턱도 없어졌는데 아직도 그런다.
보보는 저 녀석이 나보다 기억력이 좋다고 했다.
나는 그게 기억력이 아니라 바카라임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하나 넘어뜨린 걸 2년째 자기 탓으로 알고 있는 개가 있다.
그 개보다 반응이 느린 기관들이 있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