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잡담론과 그 자신의 실패
어떤 소식을 듣고 나면 우리는 그 일을 안다고 생각한다.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 누가 어떻게 했다더라는 이야기, 요즘 무엇이 문제라는 이야기. 몇 문장을 듣고 나면 머릿속에 그림이 하나 그려지고 그것으로 정리가 끝난다. 더 알아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뒤 누군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견을 말한다.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는 것은 며칠 전에 들은 몇 문장뿐인데도 그렇다.
하이데거는 이 상태에 이름을 붙였다. 독일어로 게레데, 우리말로는 잡담이라고 옮긴다.
그가 남긴 정의가 서늘하다.
잡담은 그 사건을 미리 알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핵심은 알지 못한다는 부분과 이해한다는 부분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데 있다. 실제로는 모르는데 이해했다는 감각만 생긴다. 그리고 그 감각이 생기는 순간 탐구는 멈춘다.
모르는 것보다 위험한 것이 있다면 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상태가 흔한 이유는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려면 시간과 품이 든다. 자료를 찾아야 하고 상반된 주장을 비교해야 하고 판단을 유보한 채 견뎌야 한다. 반면 몇 문장으로 정리된 이야기를 받아들이면 그 모든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
우리가 하루에 접하는 정보의 양을 생각하면 이 지름길 없이 살기는 어렵다. 문제는 지름길을 썼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다는 데 있다. 요약본을 읽고 원본을 읽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잡담이 퍼지는 방식도 그가 짚었다.
말해진 것은 그 자체로 더 넓게 퍼져 나가며 권위적인 성격을 띤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문장이 여기저기서 반복되면 그 문장은 점점 사실처럼 들린다. 누가 처음 했는지도 모르고 근거가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말하니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쓰는 순간 나도 그 문장을 퍼뜨리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 무서운 것은 반복이 검증을 대신한다는 점이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으면 여러 사람이 확인해준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는 한 사람이 한 말이 여러 번 옮겨진 것일 뿐인데도 그렇다.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많다. 다들 어디선가 들었다고 하는데 그 어디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말은 계속 힘을 갖는다.
하이데거는 이 상태를 그들의 독재라고 불렀다. 독일어로는 다스 만의 독재다. 다스 만은 특정한 누구가 아니다. 사람들이라고 할 때의 그 사람들, 이름 없는 익명의 다수다.
이 독재의 특이한 점은 독재자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따른다. 강요당한 기억이 없으니 저항할 대상도 없다. 그저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
그리고 이 체제에는 처벌도 없다. 따르지 않는다고 벌을 주지 않는다. 다만 어색해질 뿐이다. 다들 아는 것을 나만 모르고 다들 하는 것을 나만 안 하는 상태. 그 어색함이 처벌보다 효과적이다.
그래서 이 독재는 유난히 잘 유지된다. 강제가 없으니 반발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복종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의견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어디선가 주워온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대개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간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이야기일 수 있다. 유행을 좇지 말고 주관을 가지라는 말은 흔하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함정은 자신이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고 믿을 때 오히려 더 잘 작동한다는 것이다.
주류에 저항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는 다수가 하는 말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한다. 그러니 그들의 독재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문장들이다. 주류를 비판하는 진영에도 자기들만의 상투어가 있고 자기들만의 유행이 있다. 그 문장들도 반복되면서 권위를 얻는다.
그러니까 저항하는 쪽에도 그들의 독재가 있다. 단지 다른 그들일 뿐이다.
더 나쁜 것은 저항하고 있다는 자각이 방어막이 된다는 점이다. 나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확신이 있으면 자기 생각을 검토할 이유가 사라진다. 이미 독립적이라고 믿으니까.
이 구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어떤 집단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정답이 만들어진다. 그 정답에서 벗어나면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 처음에는 획일성에 반대해서 모였는데 어느새 자기들만의 획일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람이 모이면 언제나 말의 규범이 생긴다. 무엇을 말해도 되고 무엇은 말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감각. 그것은 명시되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본래적 진리는 주류에도 저항에도 있지 않다. 어느 쪽에 서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분석은 날카롭다. 그리고 이 분석을 한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를 알면 더 날카로워진다.
하이데거는 1927년에 존재와 시간을 발표했다. 잡담과 그들의 독재를 경고한 그 바카라이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나치에 협력했다.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고 나치당에 입당했다. 총장 취임 연설에서 새 체제를 지지했다. 동료 학자들이 쫓겨나는 상황에서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것은 사소한 실수가 아니다. 그가 경고했던 바로 그것에 그 자신이 굴복한 것이다. 다들 그쪽으로 가니까 갔고,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믿었다.
더 뼈아픈 것은 그가 스스로를 흐름에 휩쓸린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본다고 믿었다.
이것이 그가 묘사한 구조와 정확히 겹친다. 자신은 다르다는 확신이 검토를 멈추게 만든다는 그 구조. 그는 그것을 바카라에 써놓고 몇 년 뒤 그대로 실행했다.
전후에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명확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 침묵이 그의 이력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도 논쟁이 있다.
그의 바카라을 읽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사람의 사유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이다. 사상과 삶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그가 20세기 철학에 남긴 것을 지울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존재와 시간이 이후 사상에 미친 영향은 사실이고, 그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 논쟁은 하이데거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과 작가를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더 큰 질문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고, 아마 앞으로도 하나로 모이지 않을 것이다.
이 논쟁에 간단한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의 실패가 그의 분석을 반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그는 자기가 묘사한 함정에 정확히 빠졌다. 그것도 그 함정을 누구보다 세밀하게 묘사한 직후에.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이 있다. 함정을 아는 것과 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점이다. 지도를 그릴 줄 아는 사람도 길을 잃는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분석을 더 무겁게 만든다. 잡담과 그들의 독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그 자신이 증명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조차 빠져나가지 못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결론으로 가지 않는다. 누구나 빠질 수 있으니 빠져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 통찰이 아니라 반복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한 번 깨달았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것이 그의 사례가 남긴 가장 실용적인 교훈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제시한 개념 중에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자기 자리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여기서 뿌리내린다는 말은 고집스럽게 한 자리를 지킨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는 뜻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가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말할 때 대부분은 어딘가에서 들은 것을 옮긴다.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을 직접 겪을 수는 없으니 남의 경험과 판단을 빌리는 것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을 빌린 것으로 인식하느냐 내 것으로 착각하느냐에 있다.
빌린 것을 빌린 것으로 알고 있으면 나중에 다른 정보가 오면 수정할 수 있다. 내 것이라고 믿으면 수정이 어렵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나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본래적으로 산다는 것은 특별히 독창적인 생각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지금 가진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에 가깝다.
이 구분이 실용적으로도 유용하다. 완전히 독창적인 생각을 하라는 요구는 실현 불가능하다. 우리가 쓰는 언어부터가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 요구를 목표로 삼으면 좌절하거나 아니면 독창적인 척하게 된다.
반면 출처를 아는 일은 가능하다. 이 판단은 그 기사에서 왔고 저 확신은 그 사람이 한 말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하는 정도. 대단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습관이 필요하다.
출처를 기억하면 좋은 점이 있다. 나중에 그 출처가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함께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으니 그 부분만 떼어내면 된다.
내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그렇게 안 된다. 뿌리째 얽혀 있어서 하나를 건드리면 전체가 흔들린다.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좀처럼 바꾸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하이데거가 덧붙인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내가 만나는 것들이 나를 염두에 두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
이 문장은 처음 보면 난해하다. 풀어보면 이렇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만날 때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정보로 처리하면 나는 그저 관찰자로 남는다. 뉴스를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 일에 대해 내 판단이 생길 이유가 없다. 남들이 하는 말을 따라 하면 된다.
반면 그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받아들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일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생각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내 판단이 필요해진다.
판단은 무관심한 곳에서 생기지 않는다. 나와 얽혀 있다고 느낄 때 생긴다.
이렇게 보면 본래적 삶이란 세상과의 관계를 다르게 맺는 일이다. 구경하는 자리에서 관여하는 자리로 옮겨오는 것.
다만 여기에도 주의할 점이 있다. 모든 일에 관여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너무 많고 시간과 마음은 한정되어 있다. 전부에 대해 자기 판단을 세우려다가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로 필요한 것은 구분일 것이다. 내가 판단을 가져야 할 일과 남의 판단을 빌려 써도 되는 일을 나누는 것. 그리고 빌려 쓰는 쪽에 대해서는 빌린 것임을 잊지 않는 것.
이 구분을 어디에 그을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다만 그 선을 스스로 그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마저 남들이 정해준 대로라면 결국 같은 자리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가 남긴 문장 하나를 보자.
완성된 대답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바카라임감이 없다.
이 말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우리는 보통 바카라임감을 성실함과 연결한다. 맡은 일을 잘 해내는 것. 그런데 여기서 바카라임감은 다른 의미로 쓰인다. 자기 대답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미 나와 있는 답을 가져다 쓰는 것은 편하다. 검증도 이미 끝나 있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틀려도 나만 틀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안전하지만 동시에 바카라임이 없다. 내가 판단하지 않았으니 내 것이 아니다.
이 지적이 매서운 이유가 있다. 우리는 보통 남들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에서 안심을 얻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크게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런데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그 안심이야말로 문제다. 판단의 바카라임을 익명의 다수에게 넘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크게 잘못된 일들이 벌어질 때 대부분의 사람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중에 물으면 답이 비슷하다. 그때는 다 그랬다고.
이 답변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알고 있었다. 그것을 바카라에 썼다. 그리고 정작 자신이 그 답변을 하게 될 자리에 서고 말았다.
용기를 내어 자기 대답을 찾는 사람이 바카라임 있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남들이 만들어둔 대답을 택했다.
이 글은 하이데거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협력은 변명될 수 없고 그의 침묵은 더욱 그렇다. 어떤 사상적 성취도 그것을 상쇄하지 못한다. 그가 남긴 개념이 유용하다는 것과 그가 한 일이 용납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다만 그가 남긴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고, 그의 실패는 그 분석의 가장 강력한 사례로 남았다.
우리는 대개 자신이 독립적으로 생각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그가 보여줬다. 자기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 알고 있다는 확신, 자기는 휩쓸리지 않는다는 자신감. 그것이 있으면 검토를 멈추게 된다.
그러니 물어야 할 질문은 나는 유행을 따르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질문에는 누구나 아니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확신하고 있는 이것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의 좋은 점은 답이 나쁘게 나와도 괜찮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들은 것이라는 답이 나와도 문제될 것이 없다. 대부분의 생각은 그렇게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아느냐다.
나쁜 것은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 상태다.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상태. 그 상태에서는 무엇을 믿든 그것이 나의 판단처럼 느껴진다.
이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것을 그만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미 한 사례를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의 사례를.